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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욕의왕 Jan 12. 2016

상자를 가져가라고 전화해야겠어요

물건 정리하듯 마음을 정리하는 게 쉽지 않아요.


 그 아이에게 이제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게 아니었어요. ‘사랑하지 않는다’니 그 아이에게 사랑한다고 말 한 적은 있었나 싶었거든요. 어떻게 끝내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입 밖으로 나온 말일 뿐이었는데. ‘그냥 연락하지 마, 작은 너의 페니스로 애쓰는 거 싫어'라고 할 걸 그랬나. 아무튼, 그랬다면 이런 연락도 오지 않았겠죠.


짐을 정리해서 달라고? 왜 선물도 돌려달라고 하지? 강아지 오줌 냄새가 나는 키엘 향수는 포장도 아직 안 풀었거든요. 어쨌든, 만나면 어떻게 해서든 나를 모텔로 끌고 가려고 노력할 그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어요. 그 아이는 항상 ‘하이 피델리티’나 ‘어바웃 어 보이’ 같은 닉 혼비의 소설 대목을 줄줄 읊었는데, 남녀가 한 침대에만 누울 수만 있다면 다시 회복되지 못할 관계는 없다고 진심으로 믿었거든요. 자기가 존 쿠삭도 아니면서. 아무튼, 화목한 가정에서 잘 자란 남자아이의 의심 없는 명랑함은 이런 식으로 제 목을 조르곤 했어요.

처음에는 뭐 별거 있겠냐 싶었죠. 하나둘씩 그 아이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모아 놓고 보니 어느새 상자에 가득하더라고요. 삶에는 항상 흔적이 남으니까, 프라이팬의 기름때를 벗겨 낼 때처럼 처연해지는 순간이 없거든요. 이래서 사는 게 구질구질하다고 엄마가 그렇게 얘기했나 봐요.

어쨌든 마지막으로 눈길이 닿은 것은 바로 비알레띠 브리카 모카포트 였어요. 고작 3개월 남짓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한 주제에 그 아이는 천연덕스럽게 커피를 잘 만들어내는 척했거든요. 배낭여행 하다가 사왔다고 진짜 기특한 유럽 아이라고 자랑했었는데, 후미진 저의 방에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와서는 ‘그래도 내가 있으니까 좋지.’하고 물어보는 그 녀석만큼이나 이 녀석도 기특한 구석이 있었어요.

뜨겁게 달아올라서 ‘치익’하는 소리와 함께 맛있는 커피를 뽑아내는 그 모습도, 저의 좁은 방에 가득 차는 향긋한 커피 향도, 제 손에 쥐여 주던 머그잔에 담긴 커피의 기분 좋은 온기도 그 녀석, 아니 이 녀석 덕분에 알게 되었으니까요. 디자인도 크기도 다양한 비알레띠 모카포트지만 저한테는 그 녀석이 아니 이 녀석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렇네요. 무슨 정리를 하겠다고 이렇게 수선을 떨었나 싶어요. 그 애가 준 닉 혼비 책도, 존 르 카레 책도 여전히 책꽂이에 꽂혀있거든요. 오라고 말 한 적도 없었는데 말도 없이 찾아왔으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나갈 때까지는 일단 둬야겠어요.

이참에 상자를 가져가라고 전화하려고요. 침대에 누워도 내 침대에 누워야 편하죠. 무슨 얘기를 또 늘어놓을지 커피를 마시면서 들어봐야겠어요.

물건은 정말로 힘이 센 것 같아요. 그러니까 돈의 전지전능함은 말할 것도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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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 – 네이버 검색 최저가격은 42,970원 그런데 뭐 이것저것 사다보면 5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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