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하려고 마음먹었다면 뭐라도 사주고 시작해야죠.
서브를 준비하며 테니스공을 치마 속 바지 안으로 넣자 관중석의 남자들이 침을 삼켰습니다. 공은 네트를 건너며 열심히 날아다녔지만, 사람들의 눈은 한 곳에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얼굴 혹은 엉덩이. 누구보다 본인이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었겠지요. 그녀는 마치 다른 선수들을 비웃는 것 같았습니다. "뭘 그렇게 열심히 해?" 열 받을 일이지만 그럴만했어요. 그깟 공은 좀 못 치면 어떻습니까. 우승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은퇴한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그녀를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안나 쿠르니코바. 쉽지도 않은 이름인데 말입니다.
여자친구를 꾀느라 스포츠 의류 사이트를 뒤지는 도중에 그 이름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이런 옷은 어때? 안나 쿠르니코바라고 알아?" 알 턱이 없었습니다. 그 질문을 한 건 단지 여자친구가 상상하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이 옷을 입고 땀 흘리는 멋진 모습을 상상하며 라켓을 잡아볼 생각을 하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습니다. 실제로 제가 아는 몇몇 여성 테니스 동호인들은 그런 상상으로 운동을 시작했었더랍니다. (단, 하다 보면 아무도 이런 테니스 스커트, 드레스를 입지 않습니다.)
다행히도 사진을 보더니 꽤 마음에 드는 눈치였습니다. 상상에 약간의 불을 지펴봅니다. "네가 입으면 틀림없이 예쁠 거야."
이러는 이유가 다 있습니다. 매주 금요일 밤이 되면 구구절절 말합니다. “나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해. 알지? 내일… 테니스 모임…”. 매주 반복하지만 다음 주에 또 설명하게 됩니다. “토요일 오전은 어차피 너도 늦잠 자니까 상관없잖아?” 이 말을 했더니 여자친구가 영영 날 상관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아, 저도 알고 있습니다. 데이트하기로 한 날, 운동 후 퀭한 눈을 보이면 싫어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일찍 일어나 소풍 가는 건 힘들어하면서 테니스 하러 갈 때는 새벽부터 그렇게 들뜬 모습이라니, 그래선 안 될 일입니다. 속마음을 들키지 않는 것이 좋아요. 그런데 이번엔 시치미 떼고 신 나지 않은 척 제 마음을 숨기는 것이 무척 힘이 듭니다.
같이 하려고 마음먹었다면 뭐라도 하나 사주고 시작해야 하는 거라고 하지요. 이 옷을 선물하면 좀 나아질까요. 말한 대로 잘 어울려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안나 쿠르니코바처럼 섹시하진 않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