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 (動詞)

여백이 낳은 여백

by 김가희


무대는 잠을 잔 듯 적막했고, 공간은 아직 이름 없는 숨결로 채워져 있었다. 첫 호흡이 발바닥을 밀어 올리자, 정지된 공기가 파동처럼 일렁였다. 몸은 그 흔들림을 받아 적절한 무게로 기울고, 관성의 끝에서 새로운 균형을 찾는다. 아무런 선고도 요구받지 않은 자세가 그대로 문장이 되고, 발끝은 쉼표 없는 긴 문장을 연주한다.


이 순간 삶은, 설명이 아닌 움직임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동사가 명사보다 먼저였다는 사실을 믿어 왔다. 이름은 뒤늦게 붙는 꼬리표일 뿐, 몸짓이 먼저 세계를 긋는다. 나의 팔이 잔물결 같은 곡선을 그리자, 허공은 곧장 언어가 된다. 해석하지 않아도 어깨의 높낮이가 의미를 배치한다. 말보다 관절을, 어휘보다 각도를 신뢰한다. 어떤 문장도 이 불균형의 즉흥성을 따라올 수 없다고 느낀다. 그래서 때로는 기록의 욕구조차 사치가 된다.


숨이 목을 통과할 때마다 낮은 울림이 머릿속 어딘가를 두드린다. 나는 그 미세한 떨림이 이미 하나의 논리라는 것을 체험한다. 글자로 번역되지 않은 소리들이 감각의 지도를 미리 그려 놓는다. 발음도, 의미도 태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이미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다. 사유는 곧 움직임의 자궁에서 나왔다는 확신은, 언어 이전의 나를 일으켜 세웠다.


한 번의 회전이 시작되면 중력은 협상 가능한 약속으로 변한다. 나는 뒤로 기울었다가 비틀림을 견인 삼아 앞으로 돌진한다. 고정된 좌표가 해체되고, 시간은 길이가 아닌 압력으로 압축된다. 숨이 짧아질수록 과거가 응축되고, 숨이 길어질수록 미래가 늘어난다. 그 사이에 ‘지금’은 진동수로만 측정되는 밀도 높은 소우주가 된다. 나는 그 우주를 발바닥으로 측정하며 다음 동작을 모색한다.




예술 정신이 스스로 구축한 대상을 전복한다는 명제는, 무릎의 굴곡에서 더욱 선연해진다. 관습이 새겨진 몸의 사용법을 깨뜨려야만, 새로운 관점이 구축된다. 낯선 가동범위가 깊숙한 곳에서 잠자던 감각을 깨운다. 오류로 보이는 동작이야말로 가장 급진적인 치료라는 걸 깨닫는다. 파열음이 잦아들수록 신체와 의식은 이상하게도 가벼워진다.


나의 발목을 휘감는 원심력은 어느 한 학문에도 온전히 담기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빈틈을 이동하며 학문을 넘어선 사전을 편집한다. 한 기호가 다른 기호를 호출하고, 호출된 기호가 또 다른 기호를 모색하며 끝없이 미끄러지는 번역의 장이 열린다. 나는 그 미끄러짐 자체에 매혹된다. 완결은 유예되고, 비어 있는 자리는 창작의 온실이 된다. 존재의 결여는, 바로 이 무한한 초대의 현장이다. 여백이 여백을 낳는 그곳에서만, 움직임은 의미화를 거부하며 스스로를 덧칠한다.


관객이 없을 때 무대는 오히려 더 웅변적이다. 발뒤꿈치가 마루에 남긴 열은, 객석의 숨소리보다 오래 기억된다. 보이지 않는 기록관은 바닥 밑에 숨어 압력과 마찰을 촘촘히 채집한다. 우리는 여기서 증명의 필요를 잃는다. 몸이 남긴 흔적이야말로 가장 정확하기 때문이다. 어떤 관객도, 심사위원도, 이 무대를 평가할 근거를 찾지 못한다. 이유가 사라질 때, 비로소 결과는 명료해진다.




나의 동작에는 표준어가 없다. 오늘의 글리사드는 쉼표이지만, 내일은 물결로 변할지도 모른다. 착지가 마침표였다가 다시 연결사가 되며, 신체의 문법은 끝없이 재편된다. 나는 늘 새로운 어휘를 발명하며, 전통적인 구두점을 해체한다. 서사와 논증 대신 몸의 흐름이 논리를 구성한다. 관객을 설득하는 대신, 나의 신경계를 직접 호출한다. 이것이 내가 택한 설득의 방식이다.


억압된 기억은 어깨의 긴장으로 저장되어 있었다. 나는 해석 대신 회전을 선택해 그 기억을 풀어낸다. 팔이 원을 그리는 동안 신경계는 과거의 지도에 새 문양을 덧입힌다. 의미망이 윤활유처럼 부드러워지면서 막혀 있던 경험이 다시 흐른다. 그 과정에서 나는 ‘무엇을 느꼈는가’보다 ‘어떻게 움직였는가’를 묻게 된다. 결국 치유는 물리적 사건으로 이루어진다.


손끝이 허공에 남긴 잔흔은 다음 동작을 끌어당긴다. 빈칸을 메우려는 충동이 또 다른 표현을 탄생시킨다. 그 덕분에 움직임은 완결을 유예하며 자신을 무한히 개정한다. 끊임없는 유예 속에서 나는 완벽한 결여로 존재한다. 이곳은 변화의 서식지다. 나는 그 서식지에 영구히 머문다. 사라지는 동시에 또렷해지는 이 모순이 내 무형의 주소다.




마지막 착지에서 나는 알게 된다. 남은 것은 단 하나의 동사, ‘움직인다’라는 동사뿐이라는 사실을. 그 동사는 설명이 아니라 존재의 근거다. 단어가 사라져도 흐름이 남고, 이름이 잊혀도 압력이 기록된다. 그래서 나는 매일 불필요한 정체성을 벗고 스스로를 움직여 기존의 중심을 깨뜨린다.


결국 삶은 체온을 가진 서술이다. 우리는 이 온도 속에서만 스스로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 정지된 자세가 익숙해질 때마다, 의도적으로 무게중심을 틀어라. 관습이 만든 균형을 무너뜨릴 때마다, 세계는 다시 작성된다. 익명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 완전한 묘사다. 근육이 만들어낸 문장은 어떤 사전에도 실릴 수 없는 삶의 증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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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지지 않은 감정은 내면에 흐릅니다.

이 글은 '가희: 그럼에도 희망을 이음' 연재 중 하나로,

감각을 지나 정돈되어 가는 생의 여정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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