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緋緞)

얇음이 만든 깊이

by 김가희


만나는 사람이 많으면 덜 외롭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오히려 사람들 사이에 있을수록 나는 더 깊은 고독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투명한 그림자들 사이에서, 조용히 나 자신을 붙잡은 채 순간들을 버텼다.


우리는 고립의 서늘함과 공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기에, 언젠가 누군가가 나를 온전히 이해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붙잡는다. 그런 식의 연결은 어쩌면 허상일지도 모른다. 서로를 바라보고 손을 맞잡아도, 결국 모든 존재는 각자의 세계 속에 홀로 서 있다. 이 진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관계의 본질에 대해 다시 묻게 된다.



어떤 이에게는 쓰라린 진실처럼 느껴질 것이다. 부둥켜안고 살아가기도 벅찬데, 우리는 서로를 찌르고, 가장 가까운 사람마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니. 누군가의 눈에는 참으로 비참하게 비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런 생각을 해본다. 온전히 다 이해할 수 없기에, 전부를 공감할 수 없기에 삶이 흥미롭지 않은가. 각자의 세계 속에서 모두와 '인간'이라는 지점에서 만나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충만함으로 이끌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이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좌절적인 현실이 아닌, 수려한 욕망의 결과다.




인간의 본질적 욕망 중 하나는 우리가 각자의 세계를 세우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개인은 고유하다. 선천적 기질과 후천적 성격은 같은 순간을 다양하게 느끼도록 만들었고, 이것이 결국 각기 다른 경험을 낳았다. 마치 외모가 서로 비슷해 보여도 단 하나도 같은 얼굴이 없듯이. 인간이란 본래부터 그렇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 특별성을 부여하며 살아간다. 그런 고유함으로 인해 우리는 사회 속에서 높아지기도, 낮아지기도 한다. 하지만 사회를 넘어 생각해 보라. 애초에 사회 이전에 인간이 있지 않은가. 한 존재가 타인과 연결될 수 있는 가장 근원적 방식은 그저 자신의 자리에 서서 눈을 마주 보고, 손을 맞잡는 것이다. 자신의 세계를 잃지 않으면서도 서로를 감각하고, 공명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인간에게 허락된 가장 순수한 만남이다.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 싶어 하면서 동시에 온전한 교류를 원한다는 사실은 놀라울 정도로 신비롭다. 모순된 감정을, 결코 같이 갈 수 없는 두 축을 모두 느끼는 것에 대해 자책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욕구를 이성으로 잘라내지 않고 모순된 상태 그대로를 품을 수 있느냐에 있다. 진정한 세상과의 연결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타인의 감정에 공감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아주 부드럽고 얕은 표면에 머무를 때가 많다. 공감은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행위다. 그 사람의 감정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수긍해 주는 것. 하지만 그 감정의 무게와 진폭까지 온전히 짊어지는 일은 아니다.


그래서 공감은 관계를 이어주되, 늘 보이지 않는 투명한 막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지려는 손끝에서 미묘한 떨림이 느껴지는 이유다. 그리고 공감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듣고 이해하고, 상대의 세계로 조금씩 스며드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공명은 다르다. 공명은 타인의 감정과 완벽히 같은 진폭으로 존재하는 상태다. 자신의 입장과 과거를 지워낸 자리에서, 오직 그 감정의 순수한 결만 남아 서로를 울린다.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 느낀 감정의 질량이 동일할 때만 가능한 깊이이다.


공명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순간, 찬란한 섬광처럼 일어나고 사라진다. 더도 덜도 없이 같은 무게로 울림이 퍼질 때, 두 존재는 잠시 경계가 사라진 듯한 경험을 한다. 이때 우리는 깨닫는다. 진정한 만남이란 이해가 아니라, 동일한 떨림으로 서로를 비추는 순간이라는 것을.



감정을 있는 힘껏 껴안아본 사람만이 타인의 고통과 기쁨에 같은 진폭으로 울릴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음악처럼, 보이지 않는 파동이 서로를 감싸 안는 일이다. 그래서 공명은 설명하기보다 경험되는 것이다. 한순간, 서로의 진동이 포개지는 듯한 그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관계의 본질에 닿는다.




누군가는 묻는다. 왜 이 시대의 연결은 이토록 차갑고 얕은 것이냐고. 하지만 이 질문은 어쩌면 ‘얕은 깊이’의 자리에서 나오는 감각일지도 모른다. 너무 많은 사람들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사회 속에서, 진한 울림을 느끼지 못하는 것.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비껴가는 듯한 허전함을 경험하는 것이다.


세상은 변화하고 있다. 이 변화는 단순히 사회 구조의 재편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사고의 도약을 요구한다. 얕음은 어쩌면 이 시대의 특징이다. 그러나 따뜻함이라는 온도는 인간 본성 깊숙이 새겨져 있는 것이기에 결코 사라질 수 없다. 그래서 오늘날의 세상은 따뜻하지만 얕게 닿을 수밖에 없는 구조를 지닌다.


그러나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얕게 스며드는 따뜻함이기에, 그것은 여러 겹으로 차곡히 쌓여 우리를 감싼다. 과거 세대의 울림이 한 번의 큰 파동으로 다가왔다면, 이제 우리는 더 자주, 더 다양한 방식으로 많은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다. 얕지만 부드러운 비단들이 겹겹이 이어질 때, 그것 역시 다른 형태의 깊이가 된다.




세상과의 진실한 연결은 잘려나간 나의 일부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과거의 기억들을 되짚고 흩어진 조각들을 잇다 보면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축적의 끝에 다다랐을 때, 놀랍게도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자리에 도달한다. 이때 삶을 대하는 태도는 서서히 판단에서 감각으로 옮겨진다. 이해가 아닌 온전히 느끼는 자리에 서게 된다.


결국 나의 세계와 타인의 세계를 이어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를 숨김없이 드러내어 순간의 울림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공명은 필연적이다. 그것은 의지와 무관하게 자연스레 발생한다. 그러므로 내가 바라는 세상과의 연결은 이미 상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어떠한 왜곡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내가 나를 온전히 드러냈을 때, 그 진심은 가늘고도 무한한 실이 되어 모든 존재와 이어진다.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이미 충만하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깊은 행복이 고요히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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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지지 않은 감정은 내면에 흐릅니다.

이 글은 '가희: 그럼에도 희망을 이음' 연재 중 하나로,

감각을 지나 정돈되어 가는 생의 여정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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