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음 (赤)

여유의 잠식

by 김가희


눈동자의 가장 안쪽이 붉게 물들었다. 깜빡임으로 지워지지 않는 미세한 얼룩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실핏줄이 하나둘 떠오른다. 붉음은 경계를 넓히며 가장자리로 번진다. 통증보다 먼저 온 변색이 피로의 사실을 말해준다. 결국 눈은 붉은색에 잠식되었다.


그 장면이 마치 나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처음엔 한 점의 불편함이었지만, 곧 생각의 실핏줄을 따라 감정이 번져나간다. 붉게 물든 나의 마음. 그 사소한 신호를 넘겼더니 하루의 색이 붉어진 것이다. 나는 물들어버린 현실 앞에서야 비로소 나의 상태를 인정했다.




서랍에서 오래된 안약을 꺼냈다. 라벨 잉크가 번져 숫자가 눌려 있다. 손톱으로 긁자 얇은 막이 일어나고 지난 날짜가 드러났다. 병을 기울이면 액체가 바닥에 붙어 작은 원을 남겼다. 나의 눈꺼풀 안쪽은 모래처럼 거칠어지고 있었다. 이것을 넣으면 금방 나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다가왔다. 그 후 ‘유통기한’이라는 단어가 귓속에서 또렷해지자, 손이 뚜껑 위에서 잠시 멈췄다. 그 시간이 순간 방의 공기를 길게 만들었다.


뚜껑 돌아가는 소리가 재빠르게 지나갔다. 고개를 젖히자 미적지근한 두 방울이 나의 각막 위로 떨어졌다. 금속 맛 같은 자극이 눈가로 번진다. 눈물이 섞이며 초점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유통기한의 숫자를 다시 응시했다.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편안함을 기다렸지만 따가움이 먼저 자리를 잡아버렸다. 나의 숨은 짧아졌다가 길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눈 안쪽의 열을 손등으로 더듬었다.



몇 분이 지나자 붉음이 경계를 넓혔다. 실핏줄이 가장자리로 길게 뻗어갔다. 깜빡임의 간격은 짧아지고 있었다. 급한 해결이 고통의 방향만 바꿔 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껴 둔 한 방울이 오히려 아픔을 묶어 둔다. ‘시간’이라는 단어가 눈꺼풀의 무게와 겹쳤다. 통증은 줄지 않고 자리를 옮겨갔다. 나는 얼굴 모서리에 맺힌 물자국을 닦아냈다.


거울 앞에 서자 붉은 얼룩이 눈을 채우고 있었다. 균열은 이미 동공을 밀어내고 확장되었다. 방금의 선택이 눈에 기록된 것이다. 결여를 서둘러 메우면 결여의 윤곽은 더 선명해진다. 쉬운 선택은 도약의 자리를 뺐는다. 그렇게 급하게 채워진 자리에는 또 다른 통증이 앉는다. 그것은 다음 판단의 폭이 좁아지게 만들고, 그곳에서는 하나의 길만 보인다. 그 길의 반복은 우리의 색을 바꾼다. 나는 오늘의 붉음을 내일의 경계로 남겼다. 오래된 안약은 다시 서랍으로 돌아갔다.




오래된 안약 하나에 기대었던 안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잘못된 선택이 나를 고통 속에 몰아넣은 것이라고 붉어진 시야가 나를 향해 말했다. 시간의 여유가 사라진 자리에서 마음의 여유도 함께 사라진다. 좁아진 생각이 선택을 왜곡시켰다. 눈앞의 안약이 불안을 줄이려다 불안을 키워버린 방금 전 판단을 비췄다.


양쪽 끝에서 번지던 붉음이 마침내 중앙에 닿았다. 책의 글자는 겹치고 줄 간격은 무너졌다. 책상 위 사물의 선들이 모두 일그러졌다. 중심이 흐려지면 주변 형태도 함께 흔들린다. 흔들리는 세계는 지금의 마음을 닮았다. 가득 채워져 버린 여유는 작은 불편을 크게 만들었다. 작은 것이 커지며 선택을 다시 압박한다. 반복은 눈을 더 붉게 물들인다. 거울에 비친 눈이 오늘의 결론을 대신했다. 결과는 이미 시야에 번졌다.


나는 빠르게 몸을 일으켜 문을 연다. 바람을 마주하며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주변의 공기가 바뀌자 눈의 열기가 서서히 식기 시작했다. 병원 대기실의 불빛이 하얗게 번졌다. 의사의 손전등이 동공을 비추고, 처방전이 내 손에 쥐어졌다. 새 약의 첫 방울이 각막 위로 고였다.




삶이 조급해질수록 손은 가까운 것에 닿는다. 가까운 것은 대개 쉬운 만큼 무거운 대가를 지닌다. 여유가 없을수록 눈은 먼 곳을 바라보지 못한다. 시야가 좁아지면 쉬운 답만 크게 보인다. 그것은 통증을 잠시 옮겨 놓을 뿐이다.


최선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다. 다만 오늘의 기준을 조금 더 선명히 남기는 일이다. 지금의 편의는 대개 내일의 짐이 된다. 나를 위해 오늘의 선택을 다뤄야 한다. 나의 마음은 기준을 단단하게 만들고, 그 자세가 흔들리는 우리를 지탱해 준다.


나는 쉬운 길을 경계선으로 삼는다. 손이 먼저 움직일 때 날짜를 먼저 확인한다. 편의가 앞설 때 기준을 불러 세운다. 작은 불편을 견디며 어려움을 덜어낸다. 결국 삶을 지키는 것은 큰 결심이 아니라 그런 사소한 선택이다. 급박함은 이유가 될 수 없고, 여유는 만들어내야 한다. 오늘의 붉음을 떠올리며, 나는 그 값을 미리 치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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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지지 않은 감정은 내면에 흐릅니다.

이 글은 '가희: 그럼에도 희망을 이음' 연재 중 하나로,

감각을 지나 정돈되어 가는 생의 여정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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