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방황
기대
늘 그렇다. 그들은 나의 선택에 상처받는다. 그간의 끈질긴 관계에 대한 배려를 뒤로하고 나를 위한 선택을 해 온 지 몇 년. 새로운 사람은 기약 없이 나의 인생에 들어왔고 변화의 시기에 맞춰 흩어졌다. 간혹 인간은 타인의 움직임을 곧 자기 자신에 대한 거부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것은 관계의 본질이 아니라 기대의 작용이다. 기대가 무너질 때 인간은 상처를 느낀다. 그것을 피한 적은 없다. 오히려 그 순간이 나의 삶을 불태우는 시작이었다. 불꽃은 상처의 끝에서 피어난다.
속도
갑작스러운 타인의 연락 부재. 그 속도감에 우리는 충격을 받곤 한다. 속도란 상대적 감각이다. 나의 오랜 준비가 애석하게도 상대에게 한순간의 단절로 다가갔다. 그렇기에 당황은 그들의 몫이 된다. 인간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순간을 두려워한다. 알 길 없는 시간은 벼랑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끝없는 추락에 대한 고뇌는 지각의 산물이다. 단지 나의 움직임에, 그들은 단절을 보았다.
욕망
떠난다. 이 단어를 사용해 본 적이 없다. 나에게 있어서 떠남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나도, 이 세상도, 그대들도, 나를 떠난 적이 없고 내가 떠난 적도 없다. 그러나 인간은 관계를 언어로 붙잡고, 언어 속에서만 단절을 확인한다. 떠남은 사실 흐름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우리는 누구도 완전히 떠나지 않는다. 다만 방향이 달라지고, 시간이 엇갈릴 뿐이다. 떠남이란 언어는 세계를 고정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만든 환영이다. 우리는 그 환영을 넘어 불꽃처럼 다시 태어난다.
준비
여하튼 내가 몇 개월을 한 장소에 있는다 해서 익숙함을 추구한다 생각하면 그건 오산이다. 위험한 흐름이란 게 있다. 어쩌면 나에겐 가장 가치 있는 흐름일 수도 있겠다. 그것은 내부에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다 한 순간에 걷잡을 수 없는 발작을 시작해서 현실을 흔든다. 인간은 흔히 고요를 평온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고요는 움직임의 부재가 아니라 움직임의 잠복이다. 보이지 않는 열망은 반드시 언젠가 모습을 드러낸다. 반복은 정지가 아니라, 다음의 준비다.
움직임
나아가라. 계속하라. 상황에 대한 투쟁의 부추김을 받아 속수무책으로 나는 공기 위에 몸을 맡긴다. 그때의 전율이 있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종착점도 모르는 그런 두드림. 되풀이되는 호흡은 새로운 나의 문을 열어젖힌다. 인간은 목적 없는 움직임을 두려워하지만, 바로 그 무목적성이 자유다. 자유는 불안을 동반하고, 그 불안은 삶의 확증이 된다. 불안과 흔들림 없는 자유는 없다. 그렇기에 나는 흔들림을 기다린다. 불안조차 연료라서.
버려짐
정말이지 버려진 것들의 처지를 이해하는 심정이라니. 아니. 이것은 생각이 만든 늪일 뿐이라. 주체적인 그리고 아주 능동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이 버려졌다는 발상을 하는 것을 보기란 정말로 아린다. 버려짐은 상황이 아니라 해석이다. 인간은 익숙함이 사라질 때 돌발적 방어를 취한다. 그러나 사라짐은 변형이다. 변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가 곧 버려짐이라는 언어를 만든다. 나는 누구도 버린 적이 없다. 다만 변형의 속도가 다를 뿐이다.
오해
적어도 그러한 것이, 개인은 각자의 상황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마다한다는 사실이다. 설명은 언제나 부족하고, 침묵은 빈틈을 메운다. 그러나 침묵은 동시에 오해를 낳는다. 인간은 설명되지 않는 공간을 어려워한다. 그래서 스스로 상상을 채워 넣는다. 그 상상은 곧 상처가 된다. 상처는 부재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상처는 불안에서 태어난다. 이해받기를 갈망하는 태도, 그것이 충족되지 못했을 때의 절망, 그것이 상처다. 침묵은 나의 언어였지만, 상대에게는 공백이었다.
허상
결국 진심을 다해 기다린 자들은, 초기에 그들을 보호해 주었던 상대에 대한 안정감을 잃어버린 채 상실하고 말아 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환상적이었던 나에 대한 안정감은 그들의 습관적인 삶이 만들어낸 또 다른 도피처였을지도 모른다. 안정은 욕망의 산물이다. 인간은 불변의 대상을 찾으려 하지만, 타자 또한 언제나 흐른다. 나는 안정의 기표가 되었으나, 그 안정은 지나가버린 나었다. 기반은 언제나 붕괴된다. 안정은 결국 자기기만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 허상은 불꽃 앞에서 쉽게 타버린다.
거짓
좌절된 기대. 어쩌면 나는 그것에 부응해야 할 이유도 체념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기대는 언젠가 무너진다. 기대는 불가능한 지속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지속을 신앙처럼 믿는다. 기대가 깨질 때 나는 그것을 자유라 부른다. 상처와 자유는 같은 사건의 양극이다. 나는 자유를 택했다. 자유는 상처를 만들었다. 그렇기에 그 상처는 진실이다. 그 진실이 새로운 불을 피우는 또 다른 불씨가 됐다.
평온
그래서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나의 자유로운 영혼은 놀란 이들의 감정과 함께 가고자 한다. 스스로에게 내려지는 유죄판결. 애초부터 생이별은 아니었지만 극히 보편적인 모습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자유는 무심함이 아니라, 타인의 불안을 인식하는 행위다. 나의 움직임으로 인해 그들의 평온이 흔들렸다는 것을 안다. 이제는 필요한 정도의 주의를 기울이고자 한다. 진정한 자유는 타인을 고려할 때 완성된다. 자유는 함께 타오르는 온기다.
방식
어처구니없는 나의 영혼의 자유로운 무심함에 대해 빈약한 약속을 하지는 않겠다. 또 언제 내 안의 알맹이가 단조로움에 무료함을 느끼며 뛰쳐나가 새로운 길을 걷고자 할지는 나조차 미리 알 수는 없겠다만, 지금의 평온을 무너뜨리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약속은 할 수 있다. 자유는 예측 불가능하지만, 신뢰는 예측 가능하다. 그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 한다. 약속은 불을 지키는 테두리여야 한다.
반복
끝날 줄 모르는 나의 방황은 불규칙적으로 찾아온다. 인간은 불규칙을 두려워하지만, 사실 불규칙 또한 규칙이다. 방황은 혼돈이 아니라 나를 향한 헌신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패턴을 알게 된다. 나의 방황은 나의 리듬이고, 그 리듬은 나를 자유롭게 한다. 이러한 무작위 한 리듬은 나의 고유한 주기다. 주기는 불을 다시 지핀다. 방황은 불의 계절이자 순환이다.
맺음
유감스럽지만 매년 여름을 기대해 보는 것도 좋다. 나의 방황은 계절처럼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기다림은 불안을 동반하지만, 불안은 사랑의 다른 표현이다. 존재를 사랑한다는 것은 존재의 불안을 감당하는 일이다. 인간은 불안을 견딜 때 비로소 성숙해진다. 그 불안을 필히 나의 몫으로 받아들인다.
.
.
.
.
.
말해지지 않은 감정은 내면에 흐릅니다.
이 글은 '가희: 그럼에도 희망을 이음' 연재 중 하나로,
감각을 지나 정돈되어 가는 생의 여정을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