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 (祝祭)

무대 없는 달리기

by 김가희


노을이 저무는 저녁, 나는 신발끈을 꽉 묶고 길 위에 선다. 아스팔트의 잔열이 발바닥을 뜨겁게 지지고, 풀과 먼지 냄새가 섞여 코끝을 때린다. 숨을 가다듬기도 전에 몸은 앞으로 튀어나간다. 땅을 찍을 때마다 심장이 큰 북처럼 울리고, 하루라는 무게가 조금씩 뒤로 밀려나는 것을 느낀다.


처음의 몸은 가볍다. 팔과 다리가 박자를 찾으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잡는다. 호흡은 규칙적으로 오르내린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곧 다가올 무거움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이 경쾌한 평온은 오래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다. 달리기의 매혹은 늘 초반의 의지 속에서 시작된다.




주변 풍경이 빠른 속도로 밀려간다. 나무는 짙은 덩어리로 변하고, 건물은 그림자의 면만 남는다. 하늘은 분홍과 주황으로 갈라지며 어둠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나는 눈을 크게 뜨지 않는다. 앞을 본다는 건 풍경을 확인하는 게 아니라, 발과 호흡을 세는 일이기 때문이다. 단순해질수록 길은 명료해지고, 명료해질수록 나는 더 멀리 간다. 지금 달리는 이유는 복잡함을 떨쳐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잡함을 한 걸음의 박자로 정리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단순함은 곧 깨진다. 종아리는 돌처럼 무거워지고, 발목은 제 기능을 잃은 듯 휘청거린다. 시야의 가장자리가 순간적으로 검게 흔들린다. 순간, 나는 ‘끝났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은 여기서 멈추자고 몸이 그렇게 선언하는 듯하다. 그때 발이 땅과 스치는 소리가 나를 붙잡는다. 끝이라 믿었던 단절은 오히려 새로운 박자의 시작이었다. 무너짐은 파국이 아니라 전환이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만약 돌아본다면 분명 쉬어갈 자리가 보일 것이다. 하지만 거기엔 내 발걸음을 지탱하지 못하는 어제의 그림자만 남아 있을 뿐이다. 붙잡지 못할 것들을 두고 간다. 달리기는 앞으로만 흐르는 강물 같아서, 과거를 등에 진 채로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결연하게 등 돌리는 순간, 길은 다시 열린다.


스쳐 달리는 사람들의 호흡이 들린다. 누군가는 앞서가고, 누군가는 느리지만 묵묵히 버티고 있다. 제각기 다른 리듬이지만, 모두가 같은 저녁의 시간을 가르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나를 위로한다. 고통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고, 희망 또한 내 안에만 있지 않았다. 그 깨달음이 내 발걸음을 다시 단단하게 붙들어 준다.




달리기는 축제다. 그러나 이 축제에는 무대가 없다. 누구는 골목으로 빠지고, 누구는 다리를 건너 속도를 올리고, 또 다른 누구는 신호에 걸려 숨을 고른다. 종착지가 다르기에 종착지는 없다. 중요한 건 끝에 닿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달리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다.


그때 가슴에서 알 수 없는 울컥함이 차올랐다. 눈물이 맺힐 듯한 감정이 갑자기 들었지만, 그 감정에는 이름이 없었다. 그러나 그 무명의 감정이야말로 내가 살아 있다는 가장 직접적인 증거였다. 나는 처음으로 숨 대신 감정에 압도당했다. 새로운 샘물이 내 안에서 솟구치는 순간이었다.


하늘은 남색으로 물들고, 가로등이 하나 둘 불을 밝힌다. 바람은 낮의 열기를 거두고 서늘한 감각을 피부 위에 올려놓는다. 멀리서 자전거 체인의 금속성 소리와 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겹쳐 들려왔다. 그러나 그 소리들은 호흡과 섞이며 하나의 합주가 된다. 언어 없이도 설명되는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지금 몸으로 체감한다.




마지막 코너를 돌며 바닥의 작은 면적이 나의 체중과 열망을 동시에 받아낸다. 땅은 힘을 받아 몸을 다시 밀어 올리고, 근육은 습관처럼 효율을 찾아낸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 불완전함을 남겨둔다. 완벽이란 허상을 떠나, 나는 인간으로 남는다. 그 속에서만 자유가 살아난다.


크게 숨을 내쉰다. 오래된 나를 그 숨에 실어 흩어버리고, 새로운 나를 다음 숨으로 받아들인다. 달리기는 가르침이었다. 죽음은 새로운 시작의 조건이고, 떠남은 재탄생의 서막이다. 넘어짐과 회복, 고독과 연대가 같은 호흡 안에서 반복되는 것이 곧 삶이라는 것을 나는 글이 아니라 호흡으로 이해한다.


멈추었을 때, 나는 알게 된다. 멈춤은 끝이 아니라 다음 반복을 위한 휴식이라는 것을. 발바닥에서 땅의 온기가 빠져나가고, 근육의 떨림이 잦아든다. 길 위에 홀로 서서 숨을 고르며 생각한다. 내일의 나는 어떤 호흡을 맞이할까. 오늘의 떠남은 내일의 시작과 같은 문장 안에 있고, 나는 그 문장을 내일 다시 달리며 이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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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지지 않은 감정은 내면에 흐릅니다.

이 글은 '가희: 그럼에도 희망을 이음' 연재 중 하나로,

감각을 지나 정돈되어 가는 생의 여정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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