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자리의 풍경
창가에 앉아 커피잔을 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 표면에 맺혔던 거품은 천천히 꺼져내렸고, 따뜻하던 온기는 손바닥에서 조금씩 빠져나갔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잔 안을 들여다보았다. 마치 그 속에서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혹은 사라진 무언가의 흔적을 찾으려는 듯. 그 장면은 단순한 지연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고백이었다. 슬픔은 대체로 이렇게 시작된다. 누구도 직접 말하지 않고, 어떤 이도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자리에서, 사소한 정지 하나로 손을 내민다.
슬픔이란 결국 부정이다. 충족되지 않은 욕망, 끝내 닿지 못한 열망에서 솟아난다. 순간의 무력감은 쉽게 인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침묵하거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앉아 있거나, 혹은 손끝으로만 커피잔을 만지작거린다. 언어는 그 자리에 도달하지 못한다. 늘 몸이 먼저 반응한다. 미세한 떨림, 갑작스러운 눈빛의 공허함, 지나치게 길어진 정적. 그것은 곧 '나는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무언의 부정이다.
그러나 부정은 오래 머물 수 없다. 억눌린 절망은 결국 눈물로 흘러나온다. 울음은 단순한 체액이 아니다. 그것은 무너지는 나의 잔해이자, 다시 살아 있으려는 몸부림이다. 절망과 희망은 뒤섞여, 눈물 속에서 서로를 바꾼다. 우리는 그 모순 속에서 비로소 자기 존재를 감각한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만약 인간에게 눈물이 없다면, 슬픔은 어떻게 흘러나올 수 있을까. 어쩌면 병으로, 혹은 폭력으로, 더 파괴적인 방식으로 몸을 휘감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울음은 가장 원초적인 구원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눈물이 구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눈물은 해소되지 못한 채 다시 안으로 스며들어, 몸을 갉아먹는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슬퍼하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슬픔이 어디를 향하는가이다.
슬픔이란 결국 자신의 한계를 마주하는 순간에 온다. 끝내 채울 수 없는 무언가, 그리고 더는 도달할 수 없는 세계 앞에서 우리는 무릎을 꿇는다. 그러나 바로 그때, 삶의 진실이 드러난다. 한계를 모르는 자는 또 다른 한계를 만들 수 없다. 닿을 수 없는 자리에 부딪히는 찰나, 인간은 자기 삶을 새롭게 본다. 아이가 처음 넘어져 울음을 터뜨리는 것처럼, 성인 역시 끝내 닿지 못한 곳에서 어린아이처럼 운다. 이것은 성숙이자 퇴행이다.
나는 거리의 풍경 속에서도 이 반복을 본다. 어떤 이는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 화면만 들여다본다. 어떤 이는 발걸음을 빠르게 옮기며 무언가를 잊으려 한다. 그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지만, 깊숙이 들어가면 같은 그림자를 품고 있다. 그것은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슬픔이다. 몸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어깨가 무겁게 처지고, 숨이 가빠지고,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떨린다. 이것은 늘 몸을 통해 먼저 드러난다.
슬픔은 그만큼 전인적이다. 그것은 단순히 마음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 전체를 흔든다. 신경계는 흥분하고, 면역은 약화되고, 병리적 반응이 일어난다. 몸이 먼저 신호를 켜고, 정서는 그 신호를 해석한다. 그러나 모든 울음이 같진 않다. 닫힌 울음은 고통의 회로 안에서만 맴돈다. 동일한 장면을 반복 재생하며 감각과 의미를 분리시킨다. 반대로 열린 울음은 자아의 경계막을 미세하게 열어 세계와 닿는다. 울음의 지향성이 바뀌는 순간, 감정은 쏟아짐에서 이동으로 변한다.
몸의 층위에서 울음은 자율신경의 과열을 식히고 호흡의 리듬을 복원한다. 하지만 해소는 생리적 배출만으로 완결되지 않는다. 상징의 층위—말, 이미지, 증언—가 개입할 때 울음은 정서의 언어가 된다. 스스로의 감정을 정확히 지목하고, 누군가의 목격이 그 지목을 확인할 때, 막혀 있던 회로가 열린다. 이때 눈물은 ‘왜’라는 질문을 품은 매개체가 되고, 기억은 고정된 상처가 아니라 다시 쓰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결국 눈물은 선의나 희생의 문제가 아니다. 눈물이 판정을 내리는 순간이 아니라 질문을 통과시키는 통로일 때, 우리는 자기 내부의 폐쇄에서 세계와의 접속으로 옮겨 선다. 울음은 우리를 무너뜨리면서 동시에 경계를 가늘게 만든다. 그 틈으로 시간이 드나들고, 타인이 드나들고, 내가 다시 나에게 도착한다. 이때의 울음은 해소가 아니라 연결의 회복이 된다.
슬픔은 덧없음을 가르친다. 모든 것은 흘러가고, 사라지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덧없음 때문에 우리는 삶을 사랑한다. 붙잡을 수 없으니 더욱 끌어안는다. 덧없음은 허무가 아니라 강렬함이다. 삶은 덧없기 때문에 빛난다. 슬픔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허무가 아니라 사랑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웃음이 우리를 가볍게 한다면, 눈물은 우리를 무겁게 한다. 그 무게가 있어야만 삶은 깊이를 얻는다. 웃음만 있는 삶은 얇다. 눈물이 스며든 삶은 단단하다. 슬픔은 인간의 삶을 발효시킨다.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 속에서 삶은 맛을 얻는다. 우리는 슬퍼했기 때문에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일어선 창가의 자리에 어느새 다른 이가 앉아 있었다. 새로 담긴 커피잔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누군가는 떠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들어온다. 그러나 바뀐 것은 사람이 아니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삶의 새로운 장면이다. 끝나버린 순간은 다시 오지 않지만, 그 자리에서 태어난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다시 살아가게 하는 숨은 호흡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것은 타인을 위해 흘릴 눈물로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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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지지 않은 감정은 내면에 흐릅니다.
이 글은 '가희: 그럼에도 희망을 이음' 연재 중 하나로,
감각을 지나 정돈되어 가는 생의 여정을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