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총선을 앞두고 선거제 개편 논의가 한창입니다. 국회의원 비례대표 정수를 50명 더 늘이자는 황당한 주장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의원 숫자 때문에 정치가 이 지경이 됐다고 믿는 발상 자체가 놀랍습니다. 이런 가운데 여의도 한켠에서는 국회의원 세비를 절반으로 줄이자는 ‘더 믿기 힘든’ 주장이 나와 눈길이 갑니다.
더불어민주당 이탄희 의원은 21일 페이스북을 통해 “세비 절반 먼저 약속하고 국회의원 정수 토론을 하자”고 밝혔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국회의원 정수를 늘여야 한다면 세비를 절반으로 줄여놓고 협의를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국민들이 의원 증원의 ‘진정성’을 이해해 줄 것이라는 취지인 것 같습니다.
이 의원은 “대한민국 가구당 평균소득이 연 6414만원(2021년 기준)이다. (반면) 국회의원 세비는 약 1억5500만원(2022년 기준)이다. 월평균 1285만원,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국회의원 세비를) 가구당 평균소득에 맞추자. 국민을 닮은 국회의원이 돼서 국민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국민의 생활감각으로 의정활동을 하자”고 강조했습니다.
이탄희 의원이 의원 정수 늘이기와 세비 삭감을 연계해 풀어나가자고 제안을 한 배경은 지금 의원들이 턱 없이 많은 세비를 받고 있다는 반성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고 반가움을 표합니다. 이 의원은 동료 의원들의 따가운 눈총과 ‘혼자 잘 났느냐’며 시기와 질투를 퍼붓는 불편함을 당분간 감수해야 할 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국회의원 세비는 세계경제 위기 시그널과는 상관없이 좀처럼 꺾이지 않고 우상향 곡선을 그려왔습니다. 주변 눈총으로 양심이 찔렸던지 지난 2020년은 세비가 동결된 적이 있었습니다. 정의당 등이 나서서 30% 삭감을 주장했지만 요식행위에 불과했고 ‘여의도 식구’들은 그렇게 제 밥그릇 챙기기 앞에서 여야 구분 없이 대동단결을 했습니다.
국회의원 세비는 1949년 3월 31일 ‘국회의원 보수에 관한 법률’로 처음 제정됐습니다. 당시 국회의원 1인당 세비는 연 36만원이었습니다. 이후 국회의원들의 세비는 경제성장과 함께 줄곧 인상돼 왔습니다. 1991년 국회의원 세비는 4468만9000원까지 치솟았습니다.
IMF와 국제 금융 위기 등의 경제 대 충격이 있었지만 의원들 ‘밥그릇’은 절대 줄지 않았습니다. 자기들 밥그릇 크기를 자기들 스스로 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양심에 좀 찔렸던지 2020년 세비 협상 때는 민주당이 의원들의 회의 일수 10% 이상 불출석 시 페널티형 세비 삭감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뜬구름 잡는 소리에 그쳤습니다.
한국 국회의원이 받는 세비는 세계 톱10 수준입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국 중 10위권이었습니다(2019년 12월 기준). 지난해 기준으로 일본 국회의원은 코로나19 삭감 이전엔 1552만8000엔(한화 1억4889만원)이었고 삭감 이후엔 1238만4000엔(한화 1억1875만원)입니다. 미국은 하원의원, 상원의원 모두 연봉이 17만4000달러(한화 2억2785만원)입니다. 영국의 경우 미국과 마찬가지로 양원제지만 상원의원은 수당을 받지 않고 회기 중 회의에 참석하면 교통수당과 일당이 지급됩니다. 상임위원회, 공공법안위원회, 합동위원회, 지방위원회에 참석하면 추가수당으로 1만6865파운드(2640만원)를 받습니다. 영국 하원의원 연봉은 8만4114파운드(한화 1억3240만원)입니다.
1인당 국민소득(GDP) 대비 의원 연봉은 우리나라가 3.36배로 가장 높습니다. 그 뒤로 일본(2.31배) 미국(2.28배) 영국(2.03배)이 이어집니다. 사실상 우리나라 의원들이 받는 세비가 세계 주요국보다 높습니다. 국회의원 연봉(의원수당+의원활동비)은 지난해 기준으로 세전 1억5426만원입니다. 여기에 업무추진비, 유류지원비, 공무수행 출장지원금 등 각종 명목으로 경비가 지원됩니다. 보좌직원 9명을 두는 데 들어가는 돈까지 합치면 의원 한 명당 1년에 7억5600만원이 지원됩니다.
문제는 세비를 포함한 의정활동 총 지원비는 국회가 열리나 안 열리나 매달 의원들 통장에 꼬박꼬박 입금된다는 사실입니다. 국민의 피같은 세금이 일을 하든 안 하든 무조건 의원들 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의원 1인당 세비 대비 생산성은 공개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낮은 수준입니다. 21대 국회는 발의된 안건의 가결률이 11%(21일 기준)로 최악의 국회로 꼽히는 20대(15%)보다도 낮은 역대급 ‘무능 무실적 집단’으로 기록될 판입니다.
의원들이 발의를 하기는 하는데 비슷한 내용이거나 과거 법안을 그대로 베끼는 등의 문제로 아예 논의도 되지 않고 쓰레기통으로 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안건 가결률이 역대급으로 낮은 것입니다. 지난 1월, 2월 17개 국회 상임위원회 가운데 이른바 ‘일하는 국회법’인 ‘매달 3회 이상 법안심사소위 개최’ 조항을 준수한 상임위원회는 단 3곳에 불과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 간의 ‘대선 2차전 정쟁’으로 국회에서 타협의 화음이 사라진 지도 1년이 돼 갑니다. 민생과 직결된 법안 상당수는 국회에서 ‘천덕꾸리기’ 신세로 처박혀 있습니다. 재난 피해를 본 소상공인 지원을 위한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전세 사기 방지를 위한 ‘주택임대차보호법’, 밀린 임금을 지급하려는 사업주가 정부에 융자를 신청할 수 있게 한 ‘임금채권보장법’, 반의사불벌죄 조항을 폐지한 ‘스토킹처벌법’, 보험사기 대응력을 높인 ‘보험사기방지법’ 등은 여야 견해차가 크지 않은데도 국회에서 잠을 자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고물가 고금리 임금정체의 경제 위기 악순환이 만성화 돼 가고 있지만 국민들이 피부로 느낄 만한 여야 타협의 획기적인 대안들이 전혀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정부대로 매사 비협조인 야당 욕만 하고 있고, 야당은 야당대로 ‘대표 죽이기’에 저항하느라 타협과 상생은 엄두도 못 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식물 국회가 이어짐에도 베트남 등지로 3박4일 ‘쇄신 회의’를 다녀오는 등 의원들의 일상은 평온하기만 하고, 세비도 꼬박꼬박 챙겨먹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한데 의원 정수를 늘이겠다고 또 여야가 마주 앉았습니다. 지난 17일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는 정치관계법개선소위원회를 열고 3대 선거제 개편안을 국회 전원위원회에 올리기로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1안은 지역구 소선거구제+권역별 병립형 비례제, 2안은 소선거구제+권역별 준연동형 비례제로 현행 소선거구제를 유지하되 의원 정수를 50명 확대하자는 내용입니다. 국회의원 정수를 300명에서 350명으로 늘리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3안은 도농복합 중대선거구제+권역별·병립형 비례대표제로 의원 정수 300명을 유지하되, 지역구 의석을 줄이고 비례대표 의석을 확대하자는 내용입니다. 김진표 국회의장은 의원정수를 310석으로 10석 늘리는 방안을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놀고먹는 의원들’ 눈총을 의식했던지 여야는 선거제 개편 관련 의원 정수를 300명 그대로 유지하는 쪽으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국회의원들은 여야가 나뉘어 서로 싸우는 것 같지만 기본적으로 한통속이고 기득권입니다. 해마다 우상향으로 올라가는 세비 인상률만 봐도 그렇습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세비를 받지 않거나 상임위 출석률 등으로 페널티를 주는 ‘삭감요소’를 법으로 만들 법도 하지만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 것도 ‘정치’라는 탄탄한 기득권 ‘곳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두꺼운 철문을 스스로 열어젖히려고 이탄희 의원이 세비 절반 삭감을 주장했지만 이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