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보수의 심장’ 대구의 서문시장 등을 방문하자 말들이 많습니다. 대통령의 공식 행사 일정은 단순히 현장을 방문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국가 최고지도자가 특정 행사에 참석한다는 것은, 그 행위를 통해 대통령의 국정철학과 국가 운영의 메시지도 함께 전달된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국정 통치의 일환이기도 합니다.
사실 대통령의 지지율이 바닥을 기고 국민에게 비판을 듣는 경우가 많아지면 아무리 멘탈이 좋은 대통령일지라도 현장을 방문할 마음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참모들은 안절부절못하다가 종국에는 꾀를 내게 됩니다. 오로지 대통령만 보면 물개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지르는 열혈 지지층이 있는 곳으로 대통령을 ‘모시고’ 갑니다. 대통령도 ‘팬’들의 열성적인 응원 기운을 좀 받으려고, ‘여론이 좋지 않지만 이렇게 나를 지지하는 국민도 있다’며 안도감을 느끼려고, ‘묻지마 환대’를 해주는 곳으로 본능적으로 이끌리게 됩니다.
이를 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여론조사 지표상에 나타나지 않고 숨어서 윤 대통령의 파이팅을 응원하는 ‘샤이 보수층’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윤 대통령이 직면한 바닥 민심의 지점은 분명 대통령실이 바짝 정신 차리지 않으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의 초입에 와 있는 듯합니다.
무엇보다 윤 대통령 당선 1년이 넘었음에도 국민의 머릿속에 뚜렷이 남을 만한 ‘윤석열’만의 ‘시그니처 정책’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윤석열 대통령 하면 떠오르는 게 어떤 것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독자님들은 무엇이 가장 먼저 생각나는지요. 물론 진영대결의 프레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으니 대답만 해)’식의 뻔한 대답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래도 굳이 몇 가지를 꼽자면 전임 대통령들이 ‘실패’했던 ‘청와대’ 용산 이전입니다. 많은 국민은 윤 대통령이 구중궁궐 같은 청와대를 국민 품에 돌려주고 자신은 그보다 ‘허름하고’ 불편한 용산 국방부로 옮겨간다고 했을 때, ‘정치 신인’ 대통령이 적어도 외양적으로는 정치개혁을 이루고 싶어 하는 열정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멀쩡한 청와대를 놔두고 용산 국방부로 집무실을 이전한 근본적인 이유는 권위주의 잔재를 벗고 국민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가려는 소통의 대통령상을 직접 실천한다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용산 국방부 건물로 옮겨간 이후 역대 대통령들에 비해 국민들과 소통을 잘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윤석열 소탈 행보’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여겨졌던 기자들과의 ‘도어스테핑’도 ‘날리면 사태’ 이후 중단됐고 언제 재개될지 기약이 없습니다. 또한 윤 대통령이 취임 직후부터 꾸준하게 정책을 주도하고 이끌어가는 이슈는 보이지 않습니다. 대통령실은 악재가 생기면 적당히 뭉개고 시간을 끌다가 더 큰 악재가 터지면 이전 이슈가 묻히게 방치하는 ‘두서없는’ 국정 추진 전략으로 ‘아마추어 정권’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당과의 관계는 또 무섭게 집착하고 개입합니다. 윤 대통령은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당무 개입 논란까지 무릅쓰고 기어코 ‘윤석열 아바타’ 대표와 ‘친윤계’ 일색의 당 지도부를 용산의 ‘들러리’로 세워놓았습니다. 집권당의 날고 긴다는 ‘정치 전문가’ 금배지들은 윤석열 대통령 기세에 가위눌려 그 어떤 독자적 행보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당에서 따박따박 1억5000만원의 세비를 받아먹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대통령실과 집권당의 총체적 난국에 대해 발 벗고 나서서 해결하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통령의 서슬 퍼런 기에 눌려 혹시 말실수나 하지 않을까 눈치 보기에 급급합니다. 이러는 사이에 윤 대통령 국정운영 긍정 평가는 30% 붕괴 직전이고 부정 평가는 60%대를 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이 ‘지지율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그럴듯한 명분 뒤에 숨어서 ‘내 마음대로 하겠다’고 한다면, 그래서 내게 손뼉을 쳐주는 국민들만 만나겠다는 ‘통치 편의주의 발상’을 노골적으로 전개한다면 이는 심각한 국정 난맥을 부를 것입니다. 대통령을 불편하게 하거나 쓴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안 만나면 된다’며 무시하고 오로지 내 편한 대로만 하려는 윤 대통령의 국정운영 스타일이 얄밉기도 하고 서운하다고 여기는 국민들도 많습니다.
지난 4월 1일 윤 대통령 부부는 대구 서문시장을 찾았습니다. 윤 대통령이 취임 후 서문시장을 찾은 것은 지난해 8월 26일 이후 두 번째입니다. 윤 대통령은 대권 주자 시절부터 이곳을 여러 차례 찾았습니다. 2021년 7월, 같은 해 10월, 대선 하루 전날인 지난해 3월, 대통령 당선인 시절인 지난해 4월에 이곳을 방문한 바 있습니다. 대선후보와 당선인, 대통령 재임 때를 모두 포함하면 윤 대통령 혼자 서문시장을 6번이나 방문한 셈입니다.
윤 대통령 지지율이 하락세를 보이고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 낙마 사태 등으로 국정운영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지지층 결집과 위기 돌파를 위해 서문시장을 ‘또’ 방문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옵니다. 특히 집권 2년 차를 맞은 윤 대통령의 올해 지역 방문 가운데 영남권이 절반에 달합니다. 인사는 검사, 지방은 영남으로 대통령 입맛에 맞춘 ‘편중 현상’이 심각합니다.
야권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은 서문시장 대통령이냐” “대통령이 박수 받을 만한 곳에만 간다면 진정한 국가의 최고지도자 역할을 포기하는 것이다”는 성토가 이어집니다. 정치전문가들도 “윤 대통령이 진영을 뛰어넘는 최고지도자의 국가통합 역할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오죽했으면 윤 대통령의 ‘멘토’로 알려진 신평 변호사조차 “윤석열 정부는 지금 과도하게 10분의 3을 이루는 자기 지지층을 향한 구애에 치중한다. 윤 대통령이 대구의 서문시장을 네 번이나 방문한 것은 그 상징적 예다. 그것은 달콤한 늪이다. 그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한 선거는 패배할 수밖에 없다”고 일갈했습니다.
반면 윤 대통령은 오는 3일 정부 출범 후 처음 열리는 제주 4.3 추념식에는 참석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해외 순방 준비’ ‘일정상 이유’를 사유로 들었다고 합니다. 제주 4.3 추념식은 매년 그날에 열리기 때문에 대통령이 참석하려면 사전에 조정이 가능했음에도 불참하는 것은 다른 속사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와 주호영 원내대표도 참석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윤석열 정권 차원에서 4.3 추념식 참석 ‘보이콧’을 한 셈이 됐습니다.
대통령실은 “지난해 대통령 당선인 신분으로 참석했고, 같은 행사에 매년 가는 것에 대해 적절한지 고민이 있다”는 궁색한 해명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확연히 대비되는 ‘행사 참석 기준’에 대한 뒷말이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권 때 의전비서관을 지낸 탁현민은 올해 초 한 인터뷰에서 “‘쇼’ 한다는 말 기분 나쁘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문재인 정권이 남북 관계뿐 아니라 국내 정치도 ‘쇼’만 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문재인 정권은 ‘쇼’를 너무 정교하게 남발하다가 비판을 많이 들었다면 윤석열 정권은 ‘쇼도 하나 제대로 못 한다’는 비판을 듣고 있습니다.
탁현민 전 비서관이 문재인 정권과 함께 퇴장한 뒤 윤석열 정권의 의전 절차 등에 시시콜콜히 지적하는 모양새가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의견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좋은 정치는 진실과 진심을 담아 보여주는 것이고, 나쁜 정치는 욕망과 욕심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던 말은 윤석열 정권 참모들도 한번 되새겨봤으면 합니다.
어차피 정치가 쇼잉(Showing, 보여주기)일 수밖에 없다면 그것이라도 ‘좌우’ 균형감 있고 좀 세련되게, 심사숙고하는 척이라도 하면서, 적어도 ‘절반의 반대 국민’들에 대해서도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쇼’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지지율 좀 떨어진다고 ‘우리 동네’로 달려가서 ‘나 잘하고 있지요’ 하며 자아도취에 빠져 좋아하는 장면은 ‘권위주의 독재정권’의 ‘군중 동원 쇼’를 연상케 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전날인 지난해 3월 8일 제주 유세에서 “절대 우리 (4·3 사건) 유가족과 도민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아, 윤석열 정부는 정말 다르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약속한 바 있습니다.
그 목소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보수 대통령으로서 사상 처음 제주 4.3 추념식 참석은 물 건너가 버렸습니다. 국민들이 보고 싶은 ‘쇼’는 ‘우리 편’에게 달려가 ‘돌직구’를 던지며 으스대는 대통령이 아니라 ‘적’ 진영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용서와 화해를 구하는 용기 있는 대통령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게 비록 재미없는 쇼라고 할지라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