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오후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감표위원들이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한 감표를 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한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이날 다시 국회 본회의 표결에 부쳐졌으나 결국 부결됐다. 사진=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한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13일 국회 본회의 재투표에서 부결돼 결국 폐기됐습니다. 양곡법 개정안은 쌀 초과 생산량을 정부가 매입해 농민 피해를 최소화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는 대표적 민생법안입니다. 이에 대한 찬성 여론도 높았습니다.
하지만 여야는 단 한 번도 타협을 보여주지 못한 채 민주당은 ‘일방적 발의’로, 국민의힘은 ‘대통령 거부권’이라는 극단적 대응만 고집하다 협치의 판을 차버리고 말았습니다. 민주당이 ‘신 양곡법’ 재 발의를 고심중이라고 하지만 한번 어긋난 퍼즐이 다시 맞춰지기 쉽지 않습니다. 여야는 상대가 아파할 만한 곳만 골라 공격하기에 바쁠 뿐 농민들의 생존권 따위는 안중에 없습니다.
이번 양곡관리법 개정안 폐기로 당장 농민들이 입을 피해는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간호사법 등 또 다른 민생법안도 타협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이렇게 정치가 실종돼 버렸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야당 대표와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윤 대통령은 오늘(4월 14일)부로 민주화 이후 역대 최장 ‘불통’ 신기록(340일)을 찍었습니다.
현재의 정치판은 여야 모두 상대의 헛발질과 불통을 악마화 하며 그 반사이익만을 노리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야당으로부터 협치와 민생을 내팽개친 검찰 독재 정권의 우두머리로,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개인의 사법 리스크를 당으로 막아내는 파렴치한 수장으로 낙인찍기 바쁩니다. 그러면서도 당장 국회의원의 밥그릇이 걸린 선거구제 개편 문제는 여야 모두 추진하는 시늉만 합니다.
여야는 그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정치’라는 기본적 문제해결의 시스템이 있지만 그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농부가 농사를 짓지 않으면 존재 이유가 없듯이 정치인이 정치를 하지 않으면 ‘무쓸모’입니다. 정치인들은 4년마다 다가오는 선거 때 금배지 하나 달려고 반짝 여론 눈치를 보지만 그 이후부터는 또 무엇이든지 자기들 마음대로입니다. 정작 민생과는 별 관련 없는 의원 불체포동의안같은 것에는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듭니다.
정치의 실종은 곧 정치인의 실종을 의미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치를 모른다’는 단순한 이유로 그나마 근근이 유지돼 온 여야 협치의 관행을 깡그리 무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다 국민의힘 장악 의지는 그 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검찰 정권’의 은밀한 정보 활용 가능성으로 의원들은 겁에 질려 있는 듯합니다.
이 모든 것이 윤석열 대통령의 ‘오야붕 정치’ 때문입니다. 내년 총선 공천권을 무기로 여당 의원들을 전부 대통령의 발아래 두려합니다. 작은 반론만 나와도 즉각 대통령 ‘부하’들의 진압이 시작됩니다. 통제와 감시가 일상이 됐습니다.
이번 미국 도청 의혹 사건에 대해서도 대통령실이 우측 깜빡이를 켜자 국민의힘은 일제히 그 방향으로 쪼르르 따라갑니다. 선수 높은 중진의 따끔한 충고나 쓴 소리도 없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에 찍히면 공천은 물론 ‘개인 신상’까지 염려해야 하는 상황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윤 대통령은 여당을 김기현 대표를 정점으로 수직 계열화 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습니다.
과거에는 계파 보스의 곁에는 ‘정치적 동지’들이 있었습니다. 명령만 충실히 따르는 ‘부하’가 아니라 이슈를 토론하고 협의해서 계파의 통일된 가치를 추구하는 정치인들이 많았습니다. 최형우 김동영 한화갑 권노갑 김상현 정대철 서청원 김무성 정두언 등을 ‘꼬붕’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보스와 뜻이 맞지 않아 치받기도 하는 정치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더 큰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자생력을 갖춥니다.
하지만 지금은 큰 정치인이 성장할 토양 자체가 갈아엎어지고 있습니다. 윤 대통령과 ‘함께’ 국민의힘의 가치를 추구할 만한 정치인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오로지 ‘윤석열이즘’에 묶여 용산 눈치 보기에 급급한 무소신 정치인들만 눈에 띕니다. 국민의힘의 비민주적인 소통 구조를 비판하거나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소신 있는 의원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과 같이 보수정당이 ‘1인 독단’으로 운영된다면 다음 총선에서는 정치인들의 씨가 마를 수도 있습니다. 공천에 목을 맨 의원들이 윤 대통령의 ‘윤허’로 금배지를 달게 되면 과연 그들이 소신 있는 행보를 보일 수 있을까요. 현재 정치의 본질적 문제는 바로 보스가 입맛대로 휘두르는 ‘공천 곤봉’에 있습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보수정당이 궤멸될 수도 있다”는 심각한 우려도 나옵니다. 지금과 같이 윤 대통령이 여당을 ‘사조직’화 할 경우 다음 공천에서는 소신 행보를 할 만한 중진들은 대거 탈락하고 말 잘 듣는 ‘금배지 부하’들로 당이 채워질 수도 있습니다. 이번 전당대회에서 ‘만만한’ 김기현 대표를 점찍은 것이 그 전조입니다. ‘김기현 미만 커트’가 된다면 국민의힘은 ‘오야붕’ 윤석열과 ‘꼬붕’들만 남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주자 시절이던 지난 2021년 10월, “호남은 민주당 ‘나와바리’”라고 발언했다가 당시 민주당 의원들로부터 집중포화를 맞은 적이 있습니다. ‘나와바리’란 ‘새끼줄을 쳐 표시한 경계’라는 뜻의 일본어로 흔히 폭력조직의 영향권이나 세력권을 이르는 속어로 사용돼왔습니다. 민주당을 비판하려 쓴 표현이었지만 공적인 자리에서 부적절한 표현을 썼다는 지적이 잇따랐습니다.
조국 전 장관은 다음 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기자 간담회에서 나와바리란 일본어를 사용한 윤석열. ‘오야붕’ 마인드의 소유자답다”고 썼습니다. 오야붕은 두목, 우두머리란 뜻의 일본어입니다. 오야붕은 그럴듯한 ‘단체’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개인 사조직으로 씁니다. 윤 대통령이 국민의힘을 ‘자유민주주와 헌법 정신 수호’라는 미명 아래 윤석열 사조직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거기에는 정치나 정치인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정치는 다양성이 생명입니다. 다양성은 경쟁을 부르고 선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획일적인 일방독주는 정치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올 오어 낫싱’의 극단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 폐해는 이미 양곡관리법 폐기로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폐기’와 ‘독주’가 있을 것이고 그 피해는 오롯이 국민들의 몫입니다. 정치의 복원과 정치인의 부활이야말로 윤석열 대통령의 ‘사조직’에 맞서는 안티테제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정치의 시대가 도래하기를 기원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