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윤석열 대통령의 ‘바이든-날리면’ 논란에 이어 또 다시 대통령의 인터뷰 해석을 두고 갑론을박이 일고 있다. 윤 대통령을 인터뷰한 워싱턴포스트 기자는 25일 국민의힘 일각에서 주장하고 있는 윤 대통령의 발언 해석 차이 논란에 대해 자신이 직접 해명 글을 올렸다.
워싱턴포스트 기자인 Michelle Ye Hee Lee는 자신의 SNS에 올린 글에서 “녹음 파일을 갖고 재차 교차 검증했다. 한 마디 한 마디 문자 그대로(word-by-word) 올린다”고 밝혔다. 워싱턴포스트 기자가 공개한 녹취록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정말 100년 전의 일들을 가지고 지금 유럽에서는 전쟁을 몇 번씩 겪고 그 참혹한 전쟁을 겪어도 미래를 위해서 전쟁 당사국들이 협력하고 하는데 100년 전에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라고 하는 이거는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발언한 것으로 돼 있다. 여기에는 분명히 ‘저는’이라는 주어가 들어가 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대통령실은 위 문장을 주어가 없는 판본으로 자체 공개했다. 대통령실은 워싱턴포스트 인터뷰 보도 이후 별도 설명 자료를 내고 “지금 유럽에서는 참혹한 전쟁을 겪고도 미래를 위해 전쟁 당사국들이 협력하고 있습니다. 100년 전의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고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는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설득에 있어서는 저는 충분히 했다고 봅니다”라는 윤 대통령 발언을 공개했다.
대통령실 공개본에는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라는 발언의 주어(저는)가 빠져 있는 것이다. 이는 워싱턴포스트 기자가 “무조건 무릎 꿇어라라고 하는 이거는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공개한 것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대통령실의 공개본을 근거로 국민의힘에서 ‘주어가 빠져서 혼동이 생긴 것’이란 취지로 방어 논리를 펴면서 논란이 확산하고 있다. 인터뷰 번역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대변인을 비롯한 국민의힘 당직자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 발언의 주어가 윤 대통령이 아니라 일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유상범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25일 MBC 라디오에서 “한글 원문을 보면 주어가 빠져 있다”며 “(영어로) 번역 과정에서의 오역”이라고 말했다. 유 대변인은 전날 논평에서도 “대통령실이 공개한 한국어 인터뷰를 보면 윤석열 대통령은 유럽의 미래지향적 협력을 강조하며, 주어를 생략한 채 해당 문장을 사용했다”면서 “그리고 해당 문장은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라고 하는 것은 (일본이) 받아들일 수 없다’로 해석해야 한다. 바로 뒤에 ‘이는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이것이 상식적이다”고 주장했다.
김정재 국민의힘 의원도 25일 라디오에서 “일본이 무조건 무릎을 꿇으라고 하는 것은 일본이 받아들일 수 없다, ‘일본’이라는 주어가 해석에서 빠진 것 같다”고 말했다. 김병민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워싱턴포스트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을 갖다가 썼을 텐데, 대통령의 발언 진의를 있는 그대로 가지고 썼는지에 대해서도 한번 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며 “단어 하나하나, 이렇게 오해의 소지가 있게 인터뷰가 나가는 건 아쉽다”며 논란의 책임 소재를 언론에 돌렸다.
하지만 워싱턴포스트 기자가 직접 윤 대통령 발언 전체를 공개하면서 여당이 거짓 해명을 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지난해 윤 대통령의 미국 방문 때 ‘바이든-날리면’ 논란에 이어 이번에는 ‘I-Japan’ 논란이 일고 있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발언이 알려지자 더불어민주당은 “어느 나라 대통령이냐”며 강하게 반발했다. 강선우 민주당 대변인은 24일 국회 브리핑을 통해 “윤석열 대통령의 일본 과거사에 대한 인식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며 “대한민국의 주권과 국익을 지켜야 할 대통령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지 충격적”이라고 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같은 날 기자들과 만나 “대한민국 대통령의 발언인가 라고 의심이 될 정도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라며 “참으로 당황스럽고 참담하다”고 했다. 온라인에서도 ‘한일관계에 있어서 여전히 불편한 국민감정이 있는 게 현실인데 윤 대통령은 그것을 아예 무시하고 국민들을 소몰이하듯이 일방적으로 끌고 가고 있다’는 성토의 글이 이어졌다.
윤 대통령 발언에 대한 야당 공세가 계속되자 ‘주어 논란’은 또 다시 정치 쟁점화 될 가능성이 커졌다. 여당은 대변인과 최고위원 등을 총출동시켜 파문 수습에 나서고 있다. 윤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중인 상황에서 ‘사소한 발언’ 하나로 국빈방문 의미도 퇴색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여권이 총력 대응에 나선 형국이다.
하지만 정치권에서는 “윤 대통령의 발언 파장으로 여론이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국민의힘이 적극 나서서 대통령의 발언을 ‘바로잡는’ 해명을 잇달아 내놓았는데 그것이 오히려 더 큰 역풍을 부르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사실 유럽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피해보상과 진심어린 사과 등으로 비교적 빨리 각국의 관계가 정상화되었지만 한일 관계는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뤄졌지만 일본의 ‘모호한’ 사과와 각료들의 의도적인 망언과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으로 양국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은 한일 양국에 가로놓인 진정한 사과와 화해의 강을 혼자 뛰어 넘은 뒤 국민들을 ‘과거에 머물러 있지 말라’며 강압적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윤 대통령이 ‘설화’에 휩싸이면 대통령 ‘친위부대’들이 나서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묻지마 쉴드’를 쳐주는 볼썽사나운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대통령이 돌출발언을 하면 억지논리를 내세워 취지가 잘못 전달된 것이라며 언론 탓을 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번 논란도 인터뷰를 직접 한 기자가 ‘원문’을 전부 올려 팩트를 확인해주었음에도 국민의힘은 또 다시 발뺌을 하며 뭉개기를 시도하고 있다. 국민들을 우습게 보는 오만한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로지 ‘윤석열 사수’만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여권 일각에서도 윤 대통령 발언에 대한 당의 대응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는 사람들이 많다. “윤 대통령이 미래 한일관계를 위해 작심하고 그런 발언을 했다고 하면 그 취지를 국민들에게 잘 설명하고 소통하려는 겸손한 태도를 먼저 보여주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윤 대통령 발언이 ‘제 2의 날리면’ 사태로 비화할 조짐을 보이자 여권은 또 다시 해석 차이 운운하며 억지 논리를 폈다.
이런 비상식적인 대응이 계속되면 윤 대통령에 대한 신뢰가 급격하게 무너질 수 있다. 이는 결국 야당의 불필요한 저항을 초래하고 그것이 국정운영에도 막대한 영향을 줄 수 있다. 특히 이번 발언으로 윤 대통령의 일본 인식과 역사관이 국민 상식과도 너무 동떨어진 것이 드러났고, 대통령의 국민통합 의무도 망각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날리면’으로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던 국민들이 이번에는 주어(저는) 해석을 두고 문법 공부에 들어갈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