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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주홍 Jan 16. 2023

아메리칸 빌리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오키나와 여행기 5 

한창 MBTI가 유행하던 시절에도, 나는 E(외향형)과 I(내향형) 차이 외에는 아무것도 몰랐다. 무 썰듯이 사람을 고작 16가지로 구분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굳이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 번은 친구가 계속해서 MBTI 관련 질문을 쏟아내길래 '난 그런 거 관심 없어'라고 쏘아붙이니, 이런 답변이 돌아와 깜짝 놀랐다.


"너 ENTP구나?"


ENTP, 정답이었다. MBTI에 관심 없는 MBTI래나 뭐래나.


여하튼 MBTI 결과에 따르면 나는 J(계획적)이라기보다는 P(즉흥적)인데, 이 특성은 여행을 할 때면 여실히 발휘된다. 대충 동선만 정해놓으면 여행 준비 80%는 끝. 구체적으로 어딜 가고 뭘 먹을지는 닥쳐서 정하면 된다는 게 마이 스톼일~


주변의 파워 J들은 혀를 끌끌 차는 소리지만, 이렇게 대책 없이 다녀도 지난 수십 번의 여행 동안 사실 큰 문제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사전 정보 없이 맞닥뜨리게 된 의외의 상황들이 더 큰 즐거움을 줬다.


특히 연초 연휴로 많은 변수가 있었던 이번 오키나와 여행에서 나는 'P의 여유' 덕에 한층 색다른 희열을 느꼈다.




오키나와에서 제일 큰 쇼핑몰이라는 이온몰 라이카무.

기대했던 크로플 아이스크림 집에 찾아갔더니 폐업하고 없어졌더라. 대신 들어간 옆 가게에서, 우리는 '인생 타코야끼'를 만났지.


한 블로거가 '인생 사진 겟'했다는 스티커사진 기계가 안 보인 건? 다른 곳도 대충 비슷하겠지 하며 다짜고짜 제일 줄이 짧은 기계에 들어갔다.


그 결과 인생사진은커녕 과한 포토샵의 '매드몬스터' 사진을 '겟'… 15분은 깔깔 웃었다. 500엔은 버렸지만 뭐 덕분에 재미난 이야깃거리와 추억이 생겼다.


무엇보다도 내 '준비성 부족'의 진가가 가장 발휘된 장소는 바로 아메리칸 빌리지였다.



와아- 

아메리칸 빌리지 사인이 보이는 순간 나는 실제로 탄성을 질렀다.


그곳은 마치 깜짝 크리스마스 선물과 같았다. 서프라이즈~

그 어떤 마음의 준비도 없이 내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고 동화 같은 크리스마스 장식의 향연을 만났으니까.


아메리칸 빌리지에 대관람차가 있다는 것만 대충 알고 갔지, 이렇게 멋진 곳인지는 꿈에도 몰랐더랬다. (심지어 대관람차는 예산부족으로 없어졌다고 한다)


만약 사진을 좀 찾아보고 갔다면 감동이 덜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기대치가 높았을 테니까.


그러나 하얀 백지상태에서 만난 아메리칸 빌리지는 환상적이었다. 반짝이는 조명과 크리스마스 나무, 사람만 한 눈사람, 다채로운 표정의 산타들 사이를 걷고 있노라면… 마치 연말이면 꼭 나오는 겨울 냄새나는 할리우드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



호들갑을 떨며 여기저기 뛰어다니던 것도 잠시, 배꼽시계는 정확했다. 요기할 겸 먹은 타코야끼 소화는 이미 끝난 지 오래. 새로운 음식을 넣어달라며 알람을 울려댔다.


재빨리 트립어드바이저를 뒤져 찾아간 스키야끼 집은 땡.

연초 연휴로 문을 닫았다.

외관이 멋스러웠던 타코집도 땡. 

역시 문을 닫았다.


이쯤 되니 나는 근처 그럴싸한 아무 집이나 들어가고 싶었다. 관광지 음식이 다 거기서 거기겠지 싶었고, 여기선 뭘 먹어도 맛있을 거란 확신도 들었기 때문이다.


"저기 간판 괜찮게 생겼네. 저기서 스테이크 먹자"

"아니야, 저긴 명륜진사갈비 같아."


문을 연 커다란 스테이크집을 발견하곤 그냥 들어가자고 했더니, 'J'인 나의 동반자가 이렇게 말했다.

후기를 찾아보니 '그냥 양 많은 곳'이라는 평가가 대다수고, 여기저기 분점이 많은 것도 맘에 안 든다고 했다. 그래서 명륜진사갈비 같고, 그래서 가기가 싫으시단다.


('스테이크 88'이라는 집이었다. 나중에 오키나와 다른 도시를 가보니 진짜로 분점이 과하게 많긴 더라. 너무 흔한 체인점 같아서 결국 이때 안 가길 잘했다 싶긴 했다.)


허기를 못 참는 나는 점점 짜증이 시작했고, 자꾸 안으로 더 들어가자고 하는 그가 미워지려고 했다.



그러다 나는 또 한 번 '진짜'를 만났다.


Christmas Land라는 8층짜리 고층 건물이었다. 입구에 서있는 장난감 장병들과 빨간색 하얀색의 마법지팡이. 크리스마스 마차와 익살스러운 쿠키.


'인공 야경' 마니아인 나에게는 별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는 최고의 전경이었다.


배고픔도 잠시 잊고 신나게 사진을 찍다 그 건물 4F에 WINE & STEAK라는 표지판 발견했다.


'콜?' 묻자,

그도 다행히 '콜!'.

지쳤던 건지, '즉즉흐르'(작작해라)는 내 눈빛을 읽었던 건지. 우리는 함께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예상대로 음식 맛은 그저 그랬다. 스테이크 하나와 생선 휠레 하나를 시켰는데, 한국에서도 충분히 먹을 수 있는 맛이었더랬지.


하지만 이 판국에 맛이 중요할쏘냐. 비싼 가격에는 장식값까지 포함된 것이라고 생각하면 모두 용서됐다. 내 뒤에는 무려 앞치마를 두른 산타 할아버지가 있었다고!


마시멜로우를 참은 끝에, 배로 보상을 얻은 것 같았다.

'조금 더, 조금 더'를 외치며 인내한 결과 또 하나의 멋진 장소를 마주하고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은 거야. 네가 무엇을 고를지 아무도 모르지."

(Life is like a box of chocolates, you never know what you are going to get.)


식사를 마치고 통통해진 배를 부여잡고 나오는 길.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명대사 생각났다.


아무리 사전에 마음을 먹고, 철저히 준비를 한다 하더라도. 우리네 인생에서 언제 쓰디쓴 초콜릿을 집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매번 달콤한 초콜릿만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언제 어떤 초콜릿을 먹게 되더라도, 그 맛 자체보다는 맛을 대하는 마음 자세가 더 중요한 건 아닐까. 사실 우리는 이날 저녁으로 뭘 먹어도 행복했을 것이다. 악몽 같은 사건들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록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이상 여행 준비를 제대로 안 해서 항상 현지에서 뒤통수를 맞는, 그래서 더 즐겁다고 주장하는 게으른 P의 항변.


우리는 이렇게 1월 1일 오키나와에서의 아름다운 둘째 날 밤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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