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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주홍 Jan 15. 2023

불타버린 슈리성에서 숭례문을 떠올리다

오키나와 여행기 4

한 해의 첫날,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해 우리가 찾은 곳.


오키나와 검색을 하면 으레 나오는 이곳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빨간 성', 슈리성이었다.

https://oki-park.jp/shurijo/en/


슈리성 정전의 화재 전 모습


슈리성은 2019년 발생한 큰 화재로 정전을 포함한 6개 동이 불타버렸다.


일단 차를 주차하고 난 뒤 주차장에서 성문 초입까지는 외관상 별다른 화재의 상흔이 보이지 않았다. 예상보다 멋진 이국적 풍경에 신이 나서, 이곳저곳을 까불까불 뛰어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혹시 오늘이 1월 1일이라 티켓값을 안 받는 건가?'

잠시 오해할 정도로 티켓을 사기 전에 둘러볼 공간만 해도 꽤 넓었다.



그러나 그건 확실한 착각이었고~ 이내 티켓 오피스가 설치된 넓은 마당이 나왔다. 무대에선 오키나와 전통 공연이 진행 중이었다. 처음 보는 오키나와의 전통 의상과 악기가 고즈넉한 새해 첫날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이~이~~~~'


내 귀에는 '이'라는 말만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높은 피치의 음악. 이 섬의 뿌리, '류큐 왕국'의 전통 언어라고. 중국 경극의 배경음악과 비슷한 독특한 느낌이었다.



2019년 10월, 오키나와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였돈 슈리성을 집어삼킨 화재의 원인은 허무하게도 '전기합선'이었다.


화마는 6개 목조건물과 1500여 점이 넘는 유물을 집어삼켰다. 30년이나 걸려 복원한 지 겨우 1년 만의 일이었다.


"일본 하면 섬세함, 장인정신. 이런 이미지인데. 고작 전기합선으로 세계문화유산을 태워먹다니…"


문화재의 참혹한 화재 소식을 들으니 2008년 우리의 숭례문 화재 사고도 떠올랐다. 70대 노인의 방화에 '국보 1호'가 한순간에 속수무책으로 타들어갔었지. 황당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이었다.



400엔 티켓값을 내고 내부로 들어갔다. 화재 현장은 커다란 임시 가벽으로 덮여 있었다. 사진에서 본 정전의 모습은 가벽 위 '그림'으로만 존재했다.


다만 곳곳에 유리창이 뚫려있어서 투명한 벽 너머로 복원 현장을 볼 수 있었다. 요즘엔 적당한 목재도 부족하고 복원 과정에 참여할 장인들도 적어서 굉장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멋진 위용을 자랑하는 붉은 성을 직접 보지 못한 아쉬움도 물론 없지 않았지만, 한편으론 화재복원 현장을 두 눈으로 지켜본다는 것이 그 나름대로 또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6년을 목표로 하는 복원된 모습은 그 이후 언제라도 볼 수 있겠지. 하지만 복원이 진행 중인 모습은 지금 밖에 못 보는 것 아닌가. 어쩌면 우리는 평소보다 더 귀한 광경을 마주했던 건지도. (혹시 이런 걸 보고 정신 승리라고 하나?)



슈리성의 성곽길을 걷다 보니 숭례문 근처 남산 둘레 길이 떠올랐다. 슈리성은 전체적으로도 일본 보다는 우리나라의 경복궁이나 중국의 자금성 분위기를 풍겼다.


성곽 위에서 한눈에 내려다본 나하 시내의 '붉은 지붕'들도 역시나 일본 본토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알고 보니 오키나와가 일본에 편입된 지는 200년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류큐왕국은 450년간 별도 왕국으로 존재했다.


지금이야 오키나와를 당연히 일본 땅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지리적으로도 오키나와는 일본보다는 중국이나 대만에 더 가까웠던 것이다.


슈리성에도 중국 사신을 알현하는 공간과, 일본 사신을 알현하는 공간이 모두 있었다. 일본과 중국, 두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 조그만 섬나라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힘겨웠을까.


그 역시 우리나라 한반도 선조들의 모습과 비슷한 점이다. 1500km 드넓은 태평양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이 작은 섬과 한반도의 공통점이 참 많기도 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400엔이 복원에 적게나마 보탬이 되기를 바라며 이제는 슈리성을 내려올 시간.


슈리성 성문 양쪽에 자리한 오키나와 수호신 '시사'를 다시 만났다. 시사는 제주도 돌하르방처럼 이 섬 곳곳에서 정말 많이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의 '해태'와 생김새가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사는 보통 쌍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 수컷,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암컷이라고 한다. 수컷은 입을 벌리고 나쁜 것을 위협해 쫓아낸다는 의미, 암컷은 입을 다물고 물어온 복을 놓치지 않는다는 의미다.


우리나라 해태에는 암수 구분이 있나? 찾아보니 의견이 나뉘는 것 같은데, 동그란 '구(球)'를 누르고 있는 것이 수컷, 아기를 데리고 있는 것이 암컷이라는 주장도 보인다.



성곽길을 내려오니, 올라갈 땐 가득했던 구름이 물러가고 어느새 새파란 하늘이 나와있었다.


새로운 슈리성의 모습을 기원하며 다음 나들이 장소인 쇼핑몰로 이동했다.


슈리성 화재 이후에도 가볼 만합니다.

무엇보다 잿더미 속에서도 희망은 돋는다, 그런 기운을 받았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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