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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잠 Sep 23. 2019

생리컵, 나의 몸

나의 몸은 나의 것이니 .

생리컵을 쓴 지 이제 일 년이 넘었다. 처음에는 넣고 빼는 일이 힘들어서 진땀을 좀 흘리기도 했는데, 몇 번 하다 보니 익숙하게 되었다. 이제는 손가락을 깊이 넣어 생리컵이 잘 펴졌는지 확인하는 일도 전혀 힘들지 않다. 

생리컵이 나에게 준 자유로운 세상! 이 나이가 되어서야 이걸 알게 된 것이 억울할 정도다. 

양이 많은 둘째 날은 조금 신경이 쓰이지만 양이 적은 날은 아예 생리를 하고 있는지 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자유롭다. 생리기간도 좀 짧아진 것 같고, 생리통도 줄었다. 물론, 기간이나 통증은 나이가 들고 있어서, 약을 먹어서, 이러저러한 변화로 나타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생리컵 사용을 시작한 작년부터의 변화인 것은 확실하다. 

내가 만난 자유가 너무 좋아서, 한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생리컵을 전파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만난 자유를 모든 여성들이 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직 생리컵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들도 꽤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성의 몸에 무언가를 넣는다는 것, 분명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1. 여성은 주고, 남성은 가진다.

'여친이 아직도 안 줬니?' /  '나는 오늘 너를 가질 거야!'

이건 명백하게 남자들의 언어다. 이 반대의 표현을 성적인 의미로 쓰는 것은 본 적이 없다.

여성은 남성과 관계를 가졌을 때, '남자가 줬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여성이 남성을 가진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성적인 의미로 해석하기 어렵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를 가진다는 표현은 거의, 성적인 의미로 해석된다. 

여성은 주고, 남성은 가진다. 이 문장의 목적어는 명백하게 '여성의 몸'이다. 

언어는 가치관을 담는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언제나 '성적 대상'이지 '성적 주체'가 아니다. 


2. 더 이상 여자가 아니다.

여성은 여성으로 태어나서 여성으로 죽는다. 삶의 어느 순간에 성별이 변할 일은 없다. 그런데 어느 순간, 더 이상 여자가 아니라는 말을 스스로 하거나, 주변으로부터 듣는다. 

보통 이 말은 더 이상 성적인 매력을 갖기 어려운 나이가 되었다는 뜻으로 쓰인다. 혹은 생리가 끝나버려서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성적인 매력이 없으면 여성이 아니라는 것은 여성이 '성적 대상'일 때만 존재 가치를 갖는다는 말이다. 아이를 낳을 수 없으면 여성이 아니라는 뜻이라 해도 여성은 '아이를 낳을 수 있을 때'에만 존재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이 이렇게까지 참혹한 뜻인데도 여성 스스로가 쓰는 경우도 많다. 여성들은 언제나 '대상'의 위치에 있었으므로 그 자리에 자신이 놓이는 것을 매우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느낀다.


3. 할례

아직도 많은 나라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할례가 이루어지고 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할례를 하는 이유는 여성이 성적 쾌감을 느끼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성적 쾌감을 느끼지 못하는 여성은 성을 욕망할 수 없고 성적 주체로서 자신을 인식할 수 없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여성을 대상으로 할례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물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정신적인 의미에서라면 할례가 없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우리 사회에도 '성적 주체로서의 여성'이 별로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성적 욕망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신의 성적 욕망을 어떻게 실현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성적 욕망을 가지는 것이 여성적이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많은 여성들이 보다 더 매력적인 성적 대상이 되기 위해 노력하도록 배운다.


여성과 남성은, 여성과 남성이기 이전에 동등한 인간이다. 누구는 주체가 되고 누구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여성이나 남성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도 성적 주체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자신의 성적 즐거움을 위해 탐구하는 행위가 자연스럽게 여겨질까? 아니, 즐거움은 커녕 자신의 몸을 대상이 아닌 자신의 것으로 보고 탐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다. 


고백하건대, 생리컵을 알게 되었을 때 나도, '나는 아줌마니까 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리컵을 쓰면 쓸수록 활동이 많은 젊거나 어린 사람들이 이것을 쓰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이것을 성경험이 없는 아이들이 쓰도록 권장하는 것은 왠지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게 단지 생리컵인데도, 여성들의 삶을 훨씬 편안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데도, '여성의 몸에 무언가는 넣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도 여성이고 '성적 주체'로 살아오지 못한 까닭이다. '대상'은 주체의 선택을 받을 뿐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선택하고 욕망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닌가. 


생리컵을 쓰기 시작하면서 내가 내 몸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를 깨달았다. 

그저 가려야 할 것, 감춰야 할 것, 부끄러운 것 등으로 생각하며 내 몸을 얼마나 사랑하지 못했는지 깨달았다.

내가 추구해야 할 것은 누군가의 대상으로서 나와 내 몸이 아니라 나로서의 나이고 나의 것인 몸이다. 

나의 것인 나의 몸은 나를 위해 편해질 권리가 있다. 

외국에서는 어린아이들도 자연스럽게 생리컵을 쓴다고 들었다. 사실, 생리컵이 뭐 대단한 거라고 이렇게까지 고민을 해야 하나. 생리혈이 흐르지 않도록 작은 컵을 내 몸에 넣는 일을 이렇게 까지 복잡한 생각 끝에 해야 한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다. 불편한 마음 대신 편한 몸을 선택하면 될 일이다. 나의 몸은 나의 것이니.


2018년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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