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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실컨설턴트 May 16. 2019

회사는 언제 그만둬야 할까?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찾은 합리적인 퇴사 타이밍

회사원이 된지 20년이 다된 지금까지 저는 꽤 운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아직은 심각하게 퇴사를 고민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요즘 약간은 복잡한 상황에 처하면서 퇴사를 고려해보게 되었습니다. 그건 일 자체에서 오는 고민이라기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한계를 느낀 것이 원인이었죠.


도대체 회사는 언제 그만둬야 하나?


고민의 절정기에 우연히 손에 잡힌 책이 셀리 케이건이 쓴 ‘죽음이란무엇인가’라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 중간 즈음에 죽음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책의 제목 그대로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입니다. 그의 말은 이렇습니다. 

태어나서 소멸할 때까지를 타임라인으로 나타낼 수 있다면, 우리 육체는 타임라인의 왼쪽 끝에서 시작해 오른쪽 끝에서 끝난다. 그리고 N-P-C-D의 네 단계를 거친다.
- N : New 갓 태어난 아기
- P : Person 사람다운 기간
- C : Coma 코마상태
- D : Death 죽음
인간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N-P-C-D 단계를 거친다


신체 기능이 작동하는 시기는 N-P-C 단계입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상태죠. 숨을 거두고 나면 D 단계입니다. 여기서 그가 던진 화두는 실질적인 죽음이 어느 시점이냐는 것입니다. 

제대로 기능하는 육체에 대해 생각해보죠. 우리의 몸은 여러 가지 기능들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습니다. 호흡하고, 음식을 소화시키고, 이리저리 움직입니다. 이런 기능을 그는 신체 기능(body function), 줄여서 'B 기능'이라 칭합니다. 인간은 B 기능 외에, 고차원적인 인지 기능도 수행하죠. 이를 인지 기능(person function), 줄여서 ‘P 기능’이라 부릅니다. 이 프레임에서 본다면, 사람이 태어나 N 단계를 거치는 동안은 오직 B 기능만이 가능합니다. P 기능은 아직 시작되지 않습니다. P 단계에 들어서야만 신체(B) 기능과 인지(P)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죽음을 신체 기능 작동이 멈추는 순간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2번 시점에서 죽습니다. 문제는 C 단계입니다. 가령 우리가 고차원적인 인지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는 코마(Coma) 상태가 되었다고 가정해봅시다. 하지만 B 기능은 아직 정상적으로 작동합니다. 이런 경우 죽음의 순간은 언제일까요?

삶을 육체적 관점으로 받아들이느냐 인격적 관점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죽음의 순간은 달라지겠죠. 육체 관점으로 본다면 생물학적으로 살아있는 상태를 살아 있다고 간주하므로 죽음의 순간은 2번 시점이 됩니다. 하지만 인격 관점을 받아들이게 되면 C 단계에서 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죽음의 순간은 1번 지점이 됩니다.




서두에 던진 화두를 풀어보기 위해, 그림을 적절한 퇴사 타이밍을 잡기 위한 도구로 변형해 보겠습니다. 동일한 그림으로 직장 생활에 대비해보면 신기할 정도로 맞아 떨어집니다.

직장 생활 사이클에 적용한 N-P-C-D 단계


입사부터 회사를 그만둔 상태까지를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라고 가정하면, N(New) 단계는 신입사원으로 갓 입사한 사원증은 있지만 아직 사람 역할 못하는 기간이 됩니다. P(Production) 단계부터 생산적인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D 단계는 회사를 그만 둔 상태이겠죠. 아마도 2번 시점이 사내시스템 아이디 빼앗기고, 노트북 반납하고, 퇴직금이 정산되는 순간이 될겁니다. 여기서도 문제는 역시 C(Coma) 단계입니다. 


공식적으로는 조직에 속해있지만 생산적이지 않은 상태.
이 기간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요? 


셀리 케이건의 말을 다시 빌리면 이 구간은,

"존재하고 있지만, 살아있는 것은 아닌 기간입니다."


C 구간을 어떻게 볼 것인가? 최근 제가 퇴사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얼마나 더 내 철학과 생각을 가지고 회사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앞서 얘기했지만 저는 직장인 치고 운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2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제 철학에 합당하면서 비교적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해왔으니까요. 그런데 최근 프로젝트 하나를 진행하면서 처음으로 겁이 났습니다. 

리더의 입장에서 이해 관계에 있는 다른 부서와 협의를 하다 보니 이제 저도 나름의 철학대로 회사 생활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남았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생각이 들었습니다.

프로젝트에 관련되어 있는 조직은 5개 정도였습니다. 일의 성격 문제였는지, 프로젝트에 참여한 부서들이 유난히 일을 우선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책임 소재에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죠. 처음에는 화를 냈습니다. 욕도 해봤죠. 그러다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어쩌면 내가 비정상이고 저들이 직장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많아 졌습니다. 


만약 내가 여기서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간다면 나는 다를 수 있을까?
내 철학과 생각에 비추어 합당하다 생각하면 어떤 책임도 감수하며 밀고 나갈 수 있을까?


자신할 수 없었습니다. 덜컥 겁이 나더군요. 

그런데, 그럴 수 없다면 나는 살아있는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일까요? 내 철학에 의거해 하는 일이 회사에서 전혀 없다면 나는 존재하는 것일까요? 놓여져 있는 것일까요?


직장 생활에서 C 구간에 대한 해석은 여기서 내려집니다. 삶에서 C 구간의 정의는 생각보다 간단했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신체기능은 작동하지만 인지기능이 없는 상태'입니다. 직장 생활에서의 C 구간은 약간 다릅니다. 이 구간은 다시 2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법적으로 회사에 소속되어 있지만, P(Production) 기능을 전혀 하지 않는 상태
- 전혀 일을 하지 않는 상태
- 일은 하고 있지만 자신의 인격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누군가의 일만을 하고 있는상태


이제 처음 던졌던 화두, “회사는 언제 그만둬야 하나?”로 돌아가 보죠. 


직장 생활 사이클에 적용한 N-P-C-D 단계


2번 지점은C 구간까지 마친 지점입니다. 간혹 스스로 그만두는 경우도 있겠으나, 일반적으로 이 지점은 자의에 의해서 보다는 타의에 의해 직장 생활이 마감되는 시점입니다. 반면 1번 시점은 스스로 회사에서의 자신의 역할을 생각하고 자신의 판단에 의해 회사를 그만두는 경우가 될 것입니다. 


상사가 지시한 일만을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경우가 회사에서는 대부분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일로만 회사 생활을 채우면 우리는 ‘하루살이’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정해진 일을 반복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집단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실존적 직장인으로 사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회사에서 10건을 일을 수행해야 한다면,

첫째, 8개는 지시 받은 일을 하더라도 2개는 내 일을 만들어보려 발버둥쳐 볼 것

둘째, 10개 모두 지시 받은 일을 해도 일을 내 철학으로 해석하고 조정해가는 노력을 하는 것.


제 경우는 이렇습니다. 운 좋게 지금까지는 첫 번째 유형으로 회사 생활을 해왔습니다. 이제는 두 번째 유형으로 살아가는 시간이 늘어나겠죠. 그리고 언젠가는 해석과 조정의 과정도 못하는 순간에 이를 겁니다. 2번 지점, 그 때가 제가 회사를 그만둬야 할 시점이라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2번 지점에서 회사를 그만둡니다. 단지 사람에 따라 C 구간이 짧을 수도, 유난히 길 수도 있겠죠. 셀리 케이건 교수도 쉽게 결론 내리지 못했듯이 저도 무엇이 옳은지 모릅니다.


책의 말미에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정말 중요한 건 이것이다.
우리는죽는다. 때문에 잘 살아야 한다.
죽음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다.


저는 이 부분을 이렇게 변형해 봤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직장생활을 마감한다.
때문에 잘 살아야 한다.
직장 생활의 끝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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