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산 산책을 끝내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휠체어에 한 할아버지가 타고 있었고 좀 젊은 노인이 뒤에서 밀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흔한 풍경이고 대개는 요양보호사가 휠체어를 밀고 다니는데 그들은 딱 보기에도 부자간이었다.
휠체어 안의 노인은 초점 없는 눈으로 조는지 자는지 꺼떡거리고 있었고 밖의 노인은 한 손으로 휴대폰을 보며 천천히 밀고 있었다.
“어...어..바바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휠체어 안의 노인이 발음했고 아들은 휠체어를 세운 후 앞으로 가서 안의 노인을 들여다보았다.
“아이고, 아버지. 조금 있다가 드셔야죠.”
아들의 말을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아버지는 배가 고프단 얘기 같았다.
“조금 기다리세요. 다 왔어요.”
시각은 11시였고 아직 식당이 시작하려면 30분은 기다려야 했다.
‘아휴 저 노인네는 죽지도 않고 아들 고생시키는군. 아들도 상노인인데.’
내 일도 아니고 내 아버지도 아니었지만 노인이 이렇게 더블로 있으면 공연히 한숨이 나왔다.
그들을 지나치며 로비로 들어섰는데 식사를 하기 위해 미리 기다리고 있는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 또 아까와는 다른 노인 아버지와 노인 아들이 있었다.
아버지는 여지없이 휠체어를 타고 있었는데 아들은 휴대폰을 들고 있진 않았다.
“부친께서 올해 97세신데 제가 75이에요. 어머닌 돌아가셨고요. “
부자 주변의 노인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아는 체를 했다.
아마 일면식이 있는 사이들이지 싶었다.
“그렇지. 요즘엔 며느리가 아니라 아들이 모신대.”
“얼마 전에 목욕탕에서 아버지 목욕시키던... 내가 그때 알아봤지. 효자야.”
머리카락이 하나도 남지 않은 허리가 굽은 할아버지가 아는 체를 했다.
목욕탕에서 만났다가 밖에서 다시 만난 것이 아는 체할 만한 일인지 잠깐 혼돈스러웠다.
만약 나라면 좀 부끄러웠을 것인데.
그때 다른 자리에 있던 할머니 그룹이 약간 일렁거렸다. 그리고 그중 한 분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옆의 할머니에게 속삭였는데 다 들렸다.
“남자 목욕탕에 똥이 떠다녔대요. 괄약근이 약하면 탕에 들어가지 말아야지.”
“아유, 더러워. 저 노인네라고?”
“아니, 아니 저 양반인지는 잘 모르고... 하여튼 그랬대.”
남자 사우나탕에 대변이 떠있었단 얘긴 나도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았다. 그때도 여론은 그랬다.
괄약근이 약하면 탕에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
난 내 괄약근이 튼튼한지 약한지 알 수 없었다. 사우나엘 가보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앞으로도 가지 말아야겠단 생각을 했다. 혹시 아는가. 여탕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면 당사자로 내가 지목될지.
로비를 지나 심란한 마음으로 복도에 들어서는데 죽음의 나이를 생각했던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친정 부모님이 80을 넘었을 때쯤이었다.
그 정도 연세면 돌아가셔도 좋겠다고. 몸도 정신도 비교적 건강하실 때.
그러나 양가 부모님 중 세분은 짧게는 6년에서 최장 14년까지 더 사셨고, 시어머니는 80이 넘은 지 13년이 지났으나 아직도 돌아가실 기미는 전혀 없다.
이곳에 와서야 내 기대가 얼마나 야무졌던 것인가 생각하곤 한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80대는 대부분을 차지할 만큼 넘치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기에 알맞은 나이를 맘대로 생각도 못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내 생각인 80을 기준으로 한다면 남편은 10년 뒤에, 나는 14년 뒤에 죽는 게 좋을 나이인 데 그 뜻을 이룰 수 있을까?
답은 당연히도 ‘어렵다’가 될 듯하다. 그래서 우울했다.
이런 내 생각이 들키면 노인들은 얼마나 섭섭해할까. 분노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작 내가 80이 되었을 때도 여전한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나 남편이나 너무 오래 살면 딱해서 어찌할 것인가? 스위스도 아무나 가나?
궁금하고도 묘한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엉겨버리다가 한 순간 멍해졌다.
아하, 이러다가 치매가 생기는가 보다!
너무나 생각이 복잡해서 도저히 풀릴 기미가 안 보일 때,
가위로 얽힌 실을 싹둑 잘라버리듯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