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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인듯 Sep 29. 2022

먹이  

떠나고 싶었으나 여전히 실버아파트를 떠나지 못한 나는 세 번째 가을을 맞았다. 


올해 먹산에는 유난히 도토리가 많았다. 

산 어디를 봐도 귀엽고 앙증맞으며 반질반질 빛나는 도토리가 무리 지어 있곤 했다. 

어떤 것은 미처 모자를 벗지 못한 채로 있기도 했다.      


이럴 때 맨머리로 등산을 하다가는 여기저기서 도토리로 얻어맞기 십상이다. 

그런데 도토리로 머리를 맞으면 아프다거나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웃음이 난다는 것이 다른 얻어맞는 일과는 달랐다. 


          

“언니 도토리 좀 주워와. 엄마가 도토리묵을 엄청 좋아하시는데.”


며칠 전 모임에서 먹산의 도토리 얘길 했더니 후배가 대뜸 나에게 하는 소리였다.      

나는 사실 도토리를 주워본 적도 없고 도토리묵을 만든다는 것은 상상도 해본 일이 없는 데다 도토리묵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야, 산에 다람쥐와 고라니도 있는데 걔들이 겨울에 먹어야지.”     


도토리를 주울 생각이 전혀 없는 나는 궁색하지만 사실이기도 한 대답을 했다. 

그러자 후배는 예상했다는 듯이 나의 거절을 웃어넘겼다. 


“언니, 걔네들 먹을 건 충분해. 도토리가 얼마나 많이 나는데. 사람도 먹으라고 도토리가 열리는 거 아닌가? 산에서 나는 것은 동물이나 사람에게나 다 먹이야. 좀 주워와 봐.”     



후배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산을 오르는 데 그만 나도 모르게 도토리를 줍고 있었다.


‘아휴, 세상에나!’


도토리는 금방 손안에 가득 찼고 가방에 털어 넣은 후 다시 주워서 털어 넣길 두 번 더 했다.   


   

그러다가 도토리에 눈이 팔려 땅만 보고 걷는 내가 한심했다.   

   

더 이상 줍기를 포기하고 그냥 걸어가는데 숲 사이에서 덤불을 헤쳐 가며 뭔가를 줍는 아주머니 같은 할머니를 발견했다. 분명히 도토리를 찾아 줍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아주 작은 가방을 허리에 동이고 있었다. 보통은 배낭이나 커다란 비닐봉지를 가지고 와서 도토리를 쓸어가곤 했는데 사뭇 달랐다.


“저, 도토리 주우시는 거죠? 제가 한 움큼 주웠는데 드릴게요.”


공연히 멋쩍어하는 할머니에게 내 도토리를 세 움큼 옮겨 드렸다. 할머니는 작은 가방에 도토리를 받아 넣고는 사탕을 하나 꺼내 주었다. 


“이거 하나 드세요. 며칠 동안 사람들이 도토리를 주워서 저에게 주네요. 어젠 어떤 할아버지가 두 주먹 주워 주시면서 ‘벌써 두 번째 드리는 겁니다.’ 그러시더라고요.”


할머니의 표정은 매우 행복했다.

“아주머니 복이죠 뭐. 누구나 다 그러는 건 아니잖아요?”     


할머니는 도토리를 주우며 올라가겠노라고 손짓으로 나를 떠나보냈다.  


    

정상에는 자주 만나는 할아버지들이 서너 분 계셨다. 

그중의 한 분은 서류봉투만 한 검정 비닐봉지를 도토리로 가득 채운 것 같았다.   

  

“할아버지, 도토리 주우셔서... 드시나요?”


노인은 산 위에 설치된 철봉으로 단련한 몹시 단단한 몸을 지닌 분이었고 매우 멋쟁이였다. 

평소의 모습으로 봐선 도토리를 주울 것 같지 않은 노인이 도토리를 한 봉지나 들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왠지 씁쓸했다. 

그래서 바보 같은 질문을 한 것인데 노인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이렇게 며칠 주우면 한 10kg 되지. 그거 가루로 만들어서 아들 집에 갖다 주면 명절에 도토리묵을 만들어.”     


나는 속으로 ‘오 마이 갓’이라고 외쳤다. 저 집 며느리도 저 도토리를 좋아할까? 명절날 도토리묵을 쑤어야 하는 처지가 그다지 즐거운 일일 것 같진 않았다. 내 세대라면.   


   

먹산을 오르는 대부분의 노인들은 그렇게 한결같이 도토리를 주웠다. 

희어진 머리에 굽은 허리로 더욱 몸을 구부려 천천히 무엇인가를 줍는 모습은 수렵채집 시대를 살아낸 인류의 먹이활동 같아 애잔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그러나 다소 위로가 되는 것은 그들이 주운 도토리로 자신의 10kg를 채우기도 하지만 다른 이에게 몇 주먹씩 건네주기도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산을 되짚어 내려오다 산 아래쪽에 이르니 알밤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다. 

시장에서 파는 밤과는 비교가 안 되게 작았지만 난 밤을 얼른 집어 들었다. 


걸어가다가 톡 하고 떨어지면 바로 밤송이가 벌어지고 그 속에서 신선한 알밤이 굴러 나왔다. 

그렇게 몇 군데서 밤을 주우니 두 주먹이 넘었다.  

   

이번엔 밤을 줄 할머니도 보이지 않았지만 나도 밤을 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도토리와 달리 밤은 구워서 바로 먹을 수 있는 것이었기에 주우면서 슬쩍 웃음이 나왔다. 

     

‘먹이활동의 유전자는 다 똑같군!’     


잣나무 군집을 지나는데 채 익지 않은 잣송이가 내 발밑으로 내던져졌다. 

놀라서 위를 쳐다보니 날다람쥐 한 마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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