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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인듯 Oct 14. 2022

혹시 천사?

가을이 깊어지면서 실버들의 행보는 눈에 띄게 줄었다. 


난방이 팡팡 틀어져 있는 로비나 카페에 삼삼오오 모여 담소하거나 역시 난방을 자유롭게 틀 수 있는 동호회실에서 각자의 취미 활동을 했다. 

     

내가 사는 동에는 각종 동호회실이 있는데 바둑과 마작이 단연 압권이었다. 

방을 하나만 쓰던 바둑인들은 그 세를 확장하여 제2의 바둑실까지 확보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동호회실에서 두 개 층을 내려가면 각종 종교 모임실이 있는데 지난주에 우리 옆의 옆집 여주인이 기독교실엘 간다고 옆구리에 뭔가를 끼고 갔다. 

“성경 필사하려고요. 그냥 아는 권사님이랑 둘이. 노는 거죠 뭐. 아파트 위해서 기도도 하고 사우나도 하고 오려고요. “

옆의 옆집 여주인은 나보다 젊은 사람이었고 말이 느리긴 했지만 활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짧은 커트 머리를 보고 있으면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매일 오전만 근무하는 사무실엘 출근하고 있었다. 하여튼 그녀는 내가 본 가장 젊은 입주민이었다.  

    

그리고 지하 4층으로 내려가면 언제나 기합소리가 들려오는 탁구장이 있었다. 

탁구는 확실히 실버들의 운동이어서인지 늘 예약이 꽉 차 있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로비나 일부 동호회실, 탁구실, 골프연습장 정도에서만 움직임이 감지될 뿐 실버 아파트는 고요 속에 잠들기 시작하는 게 가을이다.      

 



바스락거리는 마지막 낙엽들을 밟으며 정상을 지나 운동기구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철봉에 매달려 대롱거리며 발밑에 펼쳐진 갈색의 가을 산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정상이 어디인지 알 수 있을까요? 여기가 정상이 아닌 모양이네요.”

돌아보니 키가 껑충한 유난히 검은 머리의 여자가 먹산 안내도 옆에서 내게 묻고 있었다. 

여자는 손에 수첩 같은 것을 들고 있었는데 고개는 약간 숙인 채였다. 

“예. 정상은 여기서 조금 더 저쪽으로 가셔야 돼요. 높이가 여기와 별 차이는 없지만 아마 정상석의 표지판이 있을 거예요.”     

여자는 끝내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정상 쪽으로 갔다. 

‘숲 해설사라도 하려는가? 먹산 숲 해설사 모집한다고 광고 붙었던데.’

일반적인 우리 실버들의 등산 모습과는 사뭇 다른 검은 머리 등산객은 그렇게 내 시야에서 떠나갔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나도 집을 향해 내려가는데 중간 휴식 지점에서 그 여인이 또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는 걸 보았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다가가서 물었다.

“정상은 잘 찾으셨어요? 거기 돌 있죠? 무슨 공부하시나 봐요?”

그러자 여자는 비로소 얼굴을 들고 나를 바라봤다. 

건강하다고 할 수 없는 창백하고 병색이 도는 얼굴의 여인은 족히 70은 넘어 보였다. 

“예, 덕분에 정상을 잘 찾았어요. 공부가 아니고 이건 기도서예요.”

여인은 손에 들고 있던 수첩 같은 것을 내게 보여주었다. 뭔가 글씨가 씌어 있는 것 같은데 벗겨져서 알아볼 수 없는 짙은 감청색의 표지였다.   

   

그렇다면 여인은 정상을 찾아 그곳에서 기도서를 낭독했던 것인가? 기도를 했다는 것인가?

여인이 너무 겸손하게 웃음 띈 얼굴로 나를 바라봤기에 난 무엇을 묻는 것이 무례하게 느껴졌다. 

“곳곳을 다니면서 기도하고 있어요. 여긴 노인들이 많이 계신 곳이잖아요. 그분들의 안녕과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죠. 이 산에 오르시는 모든 노인들을 위해서요. 저도 여기 살거든요.”     


난 경이로운 눈빛으로 등을 보이고 내려가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걷고 있어서 혹시나 넘어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저 여인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렇게 기도서를 들고 다니며 기도하는가? 


    

생각해보니 나의 실버 생활 가운데 기도서의 여인과 비슷한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여름에 비가 한바탕씩 내리고 나면 등산로에 물길을 만들어 물이 쉬이 빠지게 해 놓고 다른 쪽엔 흙을 돋우어 계단을 만들어 놓는 노인들이 있었다. 

또 어느 날은 등산로에 싸리비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기도 했는데 누가 이 길을 쓸고 있는가 궁금했었다. 그러던 차에 그 주인공을 만나기도 했다. 상당히 늙었으나 체격이 좋은 할머니였는데 고전적인 싸리비로 길을 벅벅 쓸고 있었다. 

“할머니, 산을 청소하시네요. 감사합니다.”

내가 멋쩍게 인사하자 할머니는 땀을 훔쳐내곤 시원하게 웃었다.

“여기 노인네들이 맨발로 다니는 사람들도 있더라고. 또 돌 밟아서 미끄러지면 큰일 나잖아. 그래서 그냥 내가 쉬엄쉬엄 쓸지 뭐.” 

그러고는 싸리비를 근처의 상수리나무에 턱 걸어놓고는 아무렇지 않게 걸어 올라가는 것이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여느 세상들과 마찬가지로 실버 아파트도 그러하다.

이곳 역시 심술쟁이 노파도, 고집불통 영감님도 많다. 치매가 시작되는 노인이 있고, 홀로 남은 인생의 고독을 이웃과 나누는 멋진 노익장들이 있다. 그리고 이제 막 실버의 세계에 들어서서 나처럼 버벅대는 젊은 노인들도 많다.      


살아가는 삶의 모습과 향기는 여느 세상과 비슷하나 한없이 조용하고 담담한 곳.

왈칵 울음을 터뜨릴 만큼 서러운 일도, 울화통을 건드릴만큼 화낼 일도, 이치를 따져가며 목청을 높일 일도, 견디지 못할 만큼 기쁘거나 슬픈 일도 모두 숙성되는 이곳.     


각각 다른 방식이었으나 남을 이해하고 생각하며 결국에는 사랑의 마음마저 느껴졌던.      


아마도 이곳엔 노인 모습의 천사들이 꽤 입주해 있는 모양이다. 

그런 까닭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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