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부터 1월까지의 감상한 영화를 가볍게 모으며.
* 이번 글과 함께 페어링 하기 좋은 음악
:: 혁오 (hyukoh) - 공드리
작년 하반기부터 기존에 했던 다시 프리랜서식의 일이 많아지고 N 잡을 병행 하며 대학원까지 준비하느라 (그렇지만 부지런히 많이 놀기도 했다.) 정신없는 연말을 보냈었는데 연초가 되고 바로 언제 그랬냐는 듯 캘린더는 텅텅 비워졌다. 마치 새벽까지 집에서 많은 사람들이랑 파티를 하고 동이 텄을 때 사람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의 헛헛함이 느껴진달까. 지금 내 안에 들끓는 정적인 에너지를 터뜨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코시국에 불안정한 프리랜서인 사람으로서 숨통이 끊기기 직전인 것 마냥 밥줄은 간당간당하게 남아있고 집에만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대학원에 붙고 나서 낮에 일해야 할 직장을 찾고 있는데 취준생들이 왜 자존감을 갉아먹는지 이번 한 달을 보내면서 알게 됐다. 스스로 자존감 높고 늘 자신감이 있다고 자부한 나 자신이었는데 긍정적인 연락이 없을 때마다 그동안 내가 걸어온 길이 잘못됐나 싶기도 하고 생각의 깊이엔 끝도 없이 느껴졌다. 부정적으로 잠식하는 내가 될까 봐 두려워서 하루에 무언가를 규칙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 하나가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겨우 마무리 지은 긴 서론이었다.
제목 그대로 나는 내 주변의 대부분에 의미 부여하기를 잘하고 좋아하는 사람이다. 좋게 말하면 어떤 것에든 공감과 이해를 잘하는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남들이 보기에 뜬구름 잡는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특히 요즘 날씨나 계절, 시간은 물론이거니와 현재 나의 심리나 상태를 대변해주는 작품을 찾아 감상한 뒤에 위로받는 것을 좋아한다. 아무리 사람들이 좋다, 재밌다, 명작이다라고 말했어도 내가 느끼기에 현재 상황들에 부합되지 않는 작품이라면 내 휴대폰 메모장에서 계속 밑으로 밀릴 뿐이다. (구미가 당기는 영화는 언젠가 봐야겠다는 마음에 휴대폰 메모장에 늘 메모하는 습관이 있다.)
작년 12월부터 올해 1월까지 크게 작게 눈이 많이 내렸다. 메모장에는 테마별로 영화를 나누어서 간단히 기록을 남겨놨는데 시기가 시기인지라 눈이 오면 꼭 보겠다는 작품들을 메모장에서 골라 21년 12월이 되고 나서 22년 1월이 되기까지 못 봤던 영화들을 하나둘씩 보기 시작했다. 마치 정말 아끼는 옷을 좋아하는 분위기와 날씨에 맞춰서 이제야 꺼내 입은 느낌과 비슷하다.
1. <소공녀 (Microhabitat, 2017)>
12월이 되고 나서는 내 미래에 대해서 고민하고 자기 검열이 심해지며 마음이 또다시 나부낄 때 <소공녀>의 '미소'를 보며 힘을 얻었다. 처음에는 역시나 추운 겨울이 시작되고 나서 보자고 했던 영화인데 생각보다 잔잔한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타인의 시선 상관없이 3년 차 프로 가사도우미라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며 미소는 꿈을 좇다가 현실에 부딪혀 포기하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희망을 주는, 시각적으로 형상화 한 캐릭터가 아닌가 싶다. 이름 그대로 '미소'를 안겨주는 사람으로서 말이다. 위스키, 담배, 사랑하는 남자 친구만 있으면 남부럽지 않은 인생을 자부하는 그녀의 자신감이 부러웠다. 나야말로 내가 흔들릴 때도 불구하고 나를 버티게 해주는 것들은 뭘까?
2. <윤희에게 (moonlit winter, 2019)>
눈이 펑펑 왔었던 12월 중순쯤에는 <윤희에게>를 봤다. 홋카이도의 오타루를 배경으로 우리나라보다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을 배경으로 했는데 조용하고 평화로운 도시처럼 인물들 간의 잔잔한 기승전결을 보여주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눈을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실내에 있을 때 내리는 눈을 멍하니 보는 건 좋아한다. 고립되어 있는 느낌 속 평화로움이랄까. 집 문을 열고 나가면 오타루처럼 발이 푹푹 빠질 만큼 쌓여있을 것만 같은 일체감이 든다. 여담으로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주말이었던 다음날 친한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오늘 뭐 없으면 나 홀로 나무 보러 갈래?'라며. 올림픽공원의 나 홀로 나무는 계절을 타지 않고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장소인 건 알고 있었지만 유독 눈이 펑펑 오는 때의 나 홀로 나무가 아름답다는 걸 알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나 홀로 나무에 정신 팔려 있는 사이, 나랑 친구는 그 옆에 아무도 밟지 않은 땅에서 쌓인 눈을 맘껏 밟고 새로 구입한 장갑을 낀 채로 눈을 던지며 즐거워했다. 쌓인 눈의 아름다움을 가볍고 즐겁게 경험했다. 그리고 아점으로 먹은 카레우동과 돈카츠까지 완벽했다.
3. <인턴 (the intern, 2015)>
22년이 되고 나서 가장 처음으로 봤던 작품은 영화 <인턴>이었다. 새해가 되고 나서 계획을 지독하게 세우는 계획형 인간이었으나 (물론 지금도 계획형 인간이지만.) 올해는 내 나이도, 상황도 부정하기보단 받아들이기가 비교적 쉬웠다. 그래서 계획보단 신선하고 새로운 자극이 더 필요했기 때문에 이 영화를 찾았다. 킬링타임용으로 보기 좋은 것 같으면서도(영화 중간중간에 가벼운 유머요소들이 있다.) 줄스(앤 해서웨이)의 열정과 벤(로버트 드 니로)의 지혜를 엿볼 수 있어서 오랜만에 쉬지 않고 계속 봤던 것 같다. 두 인물 모두 내가 닮고 싶은 캐릭터였다. 힘이 넘치는 2,30대에는 분출할 수 있는 모든 에너지를 쏟고 싶고 중장년층이 됐을 땐 젊은 날에 분출한 에너지를 지키기 위해 지혜롭게 노력하고 싶다.
4.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5)>
일주일 전부터 본격적으로 '넷플 연가'라는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수많은 주제들의 모임들이 있었는데 나는 작년부터 기록에 관련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고(그래서 브런치도 시작을 했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며 자극을 받는 것과 동시에 어떻게 기록을 현명하게 남기고 계신지도 궁금했다. 1주 차의 영화는 미셸 공드리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과 바로 밑에 다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 였는데 작품을 미리 보고 만나게 됐다. 눈이 와서 본 영화는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눈이 많이 오고 추운 겨울을 시간적 배경으로 한 영화여서 주제와 맞는 이 글에 넣게 됐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나도 이 영화의 줄거리를 알고 있는 상황이었고 '언젠간 꼭 봐야지' 하고 역시나 메모장에 남겨둔 영화 중 하나였다. 처음 보는 거라 봤을 땐 시간의 흐름이 뒤죽박죽처럼 느껴졌고 결국 이해가 안 돼서 유튜브에서 해석을 보고 한번 더 본 뒤 받아들여졌다. 예전에 미셸 공드리 감독의 또 다른 작품인 <무드 인디고>를 봤을 때 독특한 연출기법을 알게 됐다. 현실성 있는 이야기들을 판타지로 연출하면서도 그 안에는 인물들의 슬픔을 잘 녹여냈다고 생각했다. 미셸 공드리는 이렇게 전개하는 와중에도 곳곳에 미장센을 부여한다. <이터널 선샤인>에서는 클레멘타인의 헤어 컬러로 개인의 감정과 시간을 파악하기 좋은 요소중 하나였다. 거의 완벽하게 이해와 해석을 하고 다시 영화를 보게 되니 처음과 너무 다르게 느껴졌다. 이 영화의 마지막을 보게 되면 내가 남기고자 하는 질문에 이해를 하실 수 있을 텐데 이 영화와 글을 보시는 분들에게 여쭤보고 싶다. 결말을 아는 사랑이라면 그래도 다시 시작하시겠냐고. 나는 무조건 'okay'다. 끝이 어떻게 되든 현재 상대에게 느끼는 내 감정이 가장 중요하니 불나방처럼 뛰어들겠다. 그게 설령 바보 같은 짓이라도.
5. <원더풀 라이프(Wonderful life, 1998)>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이터널 선샤인>과 함께 보게 된 <원더풀 라이프>다. 이 작품 역시 언젠가 보자고 보자고 했었는데 넷플 연가 덕분에 게으른 내가 이 영화를 드디어 보게 됐다. 이 작품 역시 마치 사계절 중 가장 마지막인 겨울을 시간적 배경으로 한 이유는 인생 역시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겨울로 설정을 한 게 아닌가 싶다. 작품 속에서 할머니 역을 맡으신 배우분이 계셨는데 사실 두 달 여 전에 돌아가신 친할머니가 많이 생각났다. '우리 할머니도 더 좋은 세상에 가시기 전에 이런 곳을 거치셨을까'하며. 남녀노소 상관없이 연령대가 다양한 배우분들이 나온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수 있는 각자의 인생 속에서 딱 한 가지의 행복한 기억만 가지고 갈 수 있는데 나는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나의 행복을 평생 느끼기 위해선 어떤 기억을 갖고 가야 할까' 하며 계속 고민했었다. 그런데 자꾸만 바뀌는 것 같다. 곱씹어볼수록 다른 기억들도 생각나며 동시에 기존의 기억들도 버리기 싫은 마음이 들었는데 극단적인 걸 선호하지 않는 사람인 데다 (예를 들어 무인도에 가져갈 수 있는 딱 한 가지의 물건을 선택해야 하거나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신다는 사람들처럼) 평소 결정하는데 애를 먹는 나한텐 꽤 큰 잔인성(?)이 느껴졌다.
어쩌다 보니 취향 아카이빙 중 약 두 달 동안 본 영화를 큐레이션 형식으로 기록했다. 공개적인 공간이니 다른 분들에게 공감과 동시에 정보를 줄 수만 있다면 기록의 형식은 딱히 중요한 것 같진 않다. 의미부여를 한 영화를 감상한 뒤 여운이 남는 명작들은 꼭 그 시간이나 계절이 돌아오면 다시 보겠다고 다짐하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그때마다 생각이 날 작품이 생겼다는 행복감에 마음이 물들게 된다. 물론 OTT 서비스를 정말 좋아하는 구독자 중 한 명으로써 복잡하게 마음 재지 않고 요즘 뜨고 있는 작품들 중 단순하게 당기는 것들도 많이 본다. 뒤쳐지는 걸 싫어하는 사람에다 전공 상 뒤쳐지면 안 되는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흐름에 올라타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들도 머릿속이 복잡할 때 킬링타임용으로 보면서도 가끔은 공감과 위로를 받고 싶을 때 의미 부여할 작품들을 물색할 뿐이다. 날씨가 점점 풀리면서 기온이 오른다고 한다. 근 두 달 동안 추위와 상황을 견디는 게 많이 힘들었는데 날이 점점 풀리고 봄이 오는 것처럼 내 미래도 따뜻하게 맞이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