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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이유.

사랑의 결실로써의 결혼을 기대하지 않는다.

by 키수킴

“너는 나중에 커서 누구랑 결혼할 거야?”


어린 시절, 어른들은 큰 기대 없이 이런 질문들을 물어왔는데,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정도의 질문으로 어느 정도 친밀감을 형성한 어른들이 주로 그런 질문을 물어왔다.

나는 여느 아이와 같이, 엄마 같은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내 삶에서 최초로 결혼과 접점이 생겼을 때는 바로 저 순간이었다.


남녀의 만남과 인연을 소재로 한 소설, 드라마 그리고 영화의 해피 엔딩은 결혼이었다.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들을 사랑의 힘으로 극복한 남녀의 사랑은 결혼을 잇는 다리였고,

그런 류의 소설, 드라마, 영화에 노출되며 자란 나에게 결혼은 자연히 사랑의 결실로 자리매김했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을 약속하는 것.

내 어머니 아버지의 결혼도,

삼촌과 작은 엄마의 결혼도 이 개념 위에서 이해됐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기 때문에 결혼을 한 것이라 이해했었다.


연애라는 걸 하면서, 결혼을 흉내 내기도 했었다.

배우자에게 쓸 법한 호칭들을 쓰며 애정을 과시했었다.

그녀와 꼭 결혼을 해야겠다는 거창한 다짐 따위가 있었다고 보긴 어렵지만,

그녀에 대한 나의 감정이 결혼으로 이어질 수 있는 연장선 어딘가에 서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결혼을 흉내 낸다는 것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감정이 커지고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면 자연히 결혼을 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 결혼을 생각하고 누군가는 실제로 결혼을 하는 나이가 되면서, 결혼은 사랑의 결실과 동의어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대학 친구 중 누군가가, “나는 서울에 아파트 한 채는 해 올 수 있는 남자랑 결혼할 거야.”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녀가 ‘서울에 있는 아파트를 사는 일’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촌놈과 3년간 연애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와의 연애를 여기저기 자랑하던 그녀에게, 아이러니하게도 결혼은 그와 함께 그리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비단 그녀만의 일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키워왔던 결혼에 대한 관점과 달리, 결혼은 더 다채로운 관점에서 언급되고 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결혼을 논하는 데, 사랑은 전혀 언급되지 않기도 했었다.



결혼은 바라보는 이에 따라 여러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결혼이란 신분의 상승이었고,

누군가에게 결혼이란 새로운 밥줄이자 안전한 미래였다.

누군가에게 결혼은 의도치 않게 뱃속에 생긴 아이의 결과였고,

누군가에게 결혼은 부모가 점찍어 준 상대와의 접점이었고,

누군가에게 결혼은 상대의 매력이 아닌 상대 부모가 가진 매력(?)으로 가능한 것이었고,

누군가에게 결혼은 오랜 시간을 함께한 연인과 맺어야만 하는 의무이자 의리였다.


결혼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념에 따라 그들이 선택하는 배우자의 모습과 특징은 각양각색이었고,

결혼의 다리라고 생각했던 사랑은 차후에 노력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었다.


결혼의 법적 정의는 하나이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개인들이 결혼에 부여하는 의미는 다양하다.

사람을 등급으로 나누어 상대를 찾아주는 결혼 업체들의 매출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지금,

나는 결혼 소식을 알리는 지인에게서, 사랑의 결실로써의 결혼을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명확했던 결혼을 하는 이유가 시간이 갈수록 희미해진다. 결혼을 떠받드는 것이 사랑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알게 되고, 그 사실이 사람들에게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어른이 되었다. 나는 어떤 결실로써의 결혼을 바라는가를 고민하는 어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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