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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파 Oct 23. 2024

정체성의 미로에서

김승제는 강남의 고급 아파트 창가에 서서 서울의 야경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새벽 4시, 도시는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이 시간에 그는 중요한 해외 화상 회의를 위해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달랐다. 구겨진 티셔츠와 편한 바지 차림의 그는 마치 길을 잃은 사람처럼 보였다.

58평 아파트의 넓은 거실을 가로질러 걸으며 승제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급 가구들과 예술 작품들로 가득한 이 공간이 이제는 그를 숨 막히게 했다. 한때 그의 성공을 상징하던 이 모든 것들이 이제는 그저 무거운 짐으로 느껴졌다.

승제의 시선이 책상 위에 놓인 서류 뭉치에 멈췄다. 은행 대출 서류, 주식 투자 손실 명세서, 그리고 몇몇 고가의 자산 매각 계획서들이었다. 그의 재정 상태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안정적이지 않았다. 대기업 임원으로서 받았던 고액 연봉의 상당 부분을 부동산과 주식에 투자했었고, 최근의 경제 불황으로 그 가치가 급격히 하락하고 있었다.

승제는 천천히 책상 앞에 앉았다. 노트북을 열어 이메일을 확인했지만, 그가 기대하던 답장은 없었다. 지난 몇 주간 그는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 새로운 직장을 알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부고발자'라는 꼬리표는 그의 재취업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 되어 있었다.

     

"아직 잠 안 자고 뭐 해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승제는 흠칫 놀랐다. 아내 윤희였다.

     

"그냥······. 잠이 안 와서."

      

승제는 애써 담담한 척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피로감이 가득했다.

윤희는 남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우리 아직 충분히 여유가 있잖아요."

      

승제는 쓴웃음을 지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의 삶은 여전히 풍족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이 생활이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고정 수입 없이 고액의 생활비를 감당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당신 먼저 자요. 나는 곧 들어갈게."

      

승제가 말했다.

윤희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남편을 바라보다 천천히 침실로 향했다.

홀로 남은 승제는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서랍에서 위스키병을 꺼냈다. 한 잔, 두 잔······. 독한 술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알코올이 혈관에 퍼지자 그제야 그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다음 날 아침, 승제는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다. 거실로 나오자 윤희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여보, 오늘 뭐 계획 있어요?"

      

윤희가 물었다.

     

"응, 고용지원센터에 가봐야 해."

      

승제는 대답했다.

윤희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고용지원센터라는 말에 그녀는 여전히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승제는 아내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금방 새 직장 구할 거야."

      

하지만 그의 말에 자신이 없었다. 50대 중반의 나이, '내부고발자'라는 오명, 그리고 급변하는 비즈니스 환경. 모든 것이 그의 재취업을 가로막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승제는 집을 나섰다. 그의 차는 여전히 고급 외제 차였지만, 언제까지 이 차를 유지할 수 있을지 그도 알 수 없었다.

고용지원센터로 향하는 길, 승제는 자신의 처지를 다시 한번 되새겼다. 불과 6개월 전만 해도 그는 대기업의 중역으로 수백 명의 직원을 관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실업자였다. 이 현실이 그에게는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센터에 도착하자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긴 의자에 앉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대부분 승제와 비슷한 연령대의 남성들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절망과 체념이 가득했다. 승제는 그들 사이에 섞여 앉았다. 이제 그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실업자' 중 하나였다.

     

"김승제 님,"

      

상담사의 호명에 승제는 천천히 일어났다. 상담실로 들어서자 젊은 여성 상담사가 그를 맞이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형식적인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지난달과 비교해 달라진 점이 있나요?"

      

상담사의 질문에 승제는 고개를 저었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상황은 더 나빠지고 있을 뿐이었다.

상담사는 승제에게 몇 가지 구직 프로그램을 추천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승제의 경력과는 동떨어진 것들이었다. 중소기업 임원 과정, 창업 지원 프로그램, 퇴직자 재취업 교육······. 승제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모욕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상담이 끝나고 센터를 나오면서 승제는 깊은 허탈감에 빠졌다. 이런 시스템이 과연 그에게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그는 문득 자신이 이 사회에서 완전히 버림받은 존재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시간, 승제는 근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평소 그가 즐겨 찾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메뉴를 선택하면서도 가격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식사하면서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부분 샐러리맨이었다. 그들은 모두 분주히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승제는 그들 사이에서 홀로 동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승제는 인근 공원으로 향했다. 벤치에 앉아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주변에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산책을 나온 회사원들이 보였다. 승제는 문득 자신도 얼마 전까지 저들과 다름없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오후가 되자 승제는 또다시 구직 활동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헤드헌터들과 연락을 취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결과는 늘 같았다.

      

"현재로서는 적합한 포지션이 없네요." 또는 "내부 고발 건으로 인해 기업들이 꺼리는 것 같습니다."

      

이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승제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해가 저물 무렵, 승제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그때 그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전 직장 동료였다. 승제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 동료는 승제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김 상무님······."

      

동료의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묻어났다. 승제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동료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럭저럭 지내고 있어요."

      

승제의 대답은 공허했다.

동료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안타까운 듯한 눈빛으로 승제를 바라볼 뿐이었다. 승제는 서둘러 그 자리를 피했다. 그 동료의 동정 어린 시선이 참을 수 없이 불편했다.

집에 도착한 승제는 소파에 몸을 던졌다.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를 되새겼다. 또다시 실패로 끝난 구직 활동, 무의미한 상담, 그리고 전 동료와의 어색한 만남. 모든 것이 그를 좌절시켰다.

저녁 식사 시간, 승제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학교 기숙사에 있는 딸 수아였다. 승제는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아빠, 잘 지내세요?"

      

수아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묻어 있었다.

     

"그래, 아빠는 잘 지내고 있어. 학교는 어떠니?"

      

승제는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를 내려 노력했다.

     

"저야 뭐······. 그냥 그래요. 아빠, 이번 주말에 집에 갈게요. 오랜만에 같이 식사해요."

     

승제는 순간 긴장했다. 수아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아버지로서의 위신을 완전히 잃은 지금, 그는 어떤 얼굴로 딸을 마주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 좋아. 보고 싶구나."

      

승제는 간신히 대답했다.

전화를 끊은 후 승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족과의 관계도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는 가족이 그의 삶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날 밤, 승제는 또다시 위스키별을 꺼냈다. 한 잔, 두 잔······. 술이 들어갈수록 그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끊임없이 되물었다. 성공을 위해 그토록 열심히 달려왔던 그의 인생이 이제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만 같았다.

새벽 3시, 승제는 술에 취해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그의 꿈속에서는 과거의 영광스러운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화려한 임원실, 해외 출장, 중요한 계약 체결의 순간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는 어둠 속에 홀로 남겨졌다.

     

다음 날 아침, 승제는 극심한 두통과 함께 눈을 떴다. 거실 시계가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며 그는 어젯밤의 기억을 더듬었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 그는 자신이 얼마나 초라해졌는지를 다시 한번 실감했다.

욕실 거울 앞에 선 승제는 한동안 거울 속 모습을 바라보았다. 충혈된 눈, 굵어진 주름, 그리고 점점 늘어가는 흰 머리카락.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알아볼 수 없었다.

      

"이게 정말 나인가?"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침 식사를 대신해 승제는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식탁에 앉아 그는 오늘의 일정을 생각했다.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구직 활동,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11시경, 승제는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이메일을 확인하고, 구인 구직 사이트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 적합한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임원급 자리는 그의 나이를 문제 삼았고, 그보다 낮은 직급은 그의 경력을 오히려 부담스러워했다.

오후 2시, 승제는 집을 나섰다. 그는 인근 대형 서점으로 향했다. 책장을 둘러보며 그는 자기계발서 코너에 멈춰 섰다. '50대의 새로운 시작', '은퇴 후 인생 설계', '중년의 위기 극복하기'. 이런 책들을 보며 승제는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이런 책들이 자신의 상황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서점을 나와 승제는 근처 카페로 향했다. 조용한 자리에 앉아 그는 노트북을 펼쳤다. 이력서를 다시 한번 검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의 화려했던 경력뿐이었다. 그 경력이 이제는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저녁이 되어갈 무렵, 승제는 집으로 향했다. 도로는 퇴근하는 차들로 붐볐다. 그는 문득 자신도 얼마 전까지 저 차 중 하나에 타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는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과의 시간을 소홀히 했었다. 이제 와 그 시간이 그립기만 했다.

집에 도착하자 윤희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승제는 아내의 얼굴을 보고 순간 죄책감이 들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저녁 식사 시간, 승제와 윤희는 조용히 마주 앉았다.

     

"오늘은 어땠어요?"

      

윤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별일 없었어. 그냥 평소와 같은 하루였어."

      

승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피로감이 배어 있었다.

윤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도 이 상황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떻게 남편을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식사를 마친 후 승제는 다시 서재로 향했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화면에는 그가 쓰고 있던 자서전의 원고가 떠 있었다. '성공한 비즈니스맨의 이야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그 제목은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밤이 깊어갔다. 승제는 여전히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 찼다. 자신의 현재 상황, 불투명한 미래, 그리고 점점 멀어져가는 가족관계. 모든 것이 그를 옥죄어왔다.

새벽 2시, 승제는 결국 다시 위스키병을 꺼냈다. 한 잔, 두 잔······. 차가운 술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알코올이 혈관에 퍼지자 그제야 그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내가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승제는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이자, 과거의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다음 날 아침, 승제는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다. 거실로 나오자 윤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보, 괜찮아요?"

      

윤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승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오늘은 뭔가 계획 있어요?"

      

윤희가 다시 물었다.

     

"응, 옛날 동료 한 명 만나기로 했어."

      

승제가 대답했다.

윤희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스쳤다. 그녀는 남편이 조금씩이라도 사회와 연결되기를 바랐다.

오후 2시, 승제는 강남의 한 카페에서 옛 동료를 만났다. 그 동료는 현재 다른 회사의 임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김 상무님, 오랜만입니다."

      

동료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승제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동료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냥 그렇게 지내고 있어요. 새로운 기회를 찾고 있죠."

      

승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동료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오늘 좋은 제안을 들고 왔습니다."

      

승제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는 기대감을 누르며 차분히 물었다.

      

"어떤 제안인가요?"

      

"우리 회사에서 새로운 해외 사업부를 만들려고 합니다. 상무님의 경험과 능력이 딱 맞을 것 같아서요."

      

승제는 순간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곧 현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내가 내부고발자라는 소문이······."

     

동료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문제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회사는 그런 정직성을 높이 삽니다."

      

승제는 잠시 말을 잊었다. 그동안의 좌절과 절망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의심도 들었다. 이 제안이 정말 진심일까?

     

"시간을 가지고 생각해보셔도 좋습니다. 가족과 상의해보시고 결정하세요."

      

동료가 말했다.

승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합니다. 신중히 생각해보겠습니다."

     

카페를 나서는 승제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그는 오랜만에 희망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감도 밀려왔다. 과연 자신이 다시 그 자리에 설 수 있을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승제는 윤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나 좋은 소식이 있어."

      

윤희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정말요? 어서 집에 와서 얘기해줘요."

      

집에 도착한 승제는 윤희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윤희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남편을 꼭 안아주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당신이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윤희가 말했다.

하지만 승제의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 잘 할 수 있을까?"

      

윤희는 남편의 손을 꼭 잡았다.

      

"당연하죠. 당신은 충분히 능력 있는 사람이에요."

      

그날 밤, 승제는 오랜만에 편안한 잠을 잤다. 꿈속에서 그는 다시 한번 성공한 비즈니스맨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승제는 일찍 일어나 운동을 나갔다.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그는 새로운 결심을 했다. 이번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집으로 돌아온 승제는 샤워하고 정장을 차려입었다. 오랜만에 입어보는 정장이었지만, 여전히 그에게 잘 어울렸다.

아침 식사 테이블에서 승제는 윤희와 향후 계획을 논의했다.

      

"이번 주말에 수아도 집에 올 거야. 가족회의를 해보는 게 어떨까?"

      

윤희는 동의했다.

      

"그래요. 수아도 분명 좋아할 거예요."

     

오전 10시, 승제는 동료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언제 정식으로 만날 수 있을까요?"

      

동료의 목소리에서 기쁨이 묻어났다.

      

"네, 좋습니다. 내일 오후 2시에 회사로 와주시겠습니까? 사장님과 직접 면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전화를 끊은 후 승제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정말 새로운 시작이구나, 그는 생각했다.

그날 온종일 승제는 새 직장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다. 회사의 내력, 주요 사업 분야, 최근 실적 등을 꼼꼼히 점검했다. 그는 면접을 준비하듯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하고 싶었다.

저녁이 되자 승제는 윤희와 함께 오랜만에 외식을 나갔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포도주를 마시며 그들은 미래를 이야기했다.

     

"이제 다시 시작이에요."

      

윤희가 말했다.

승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엔 꼭 성공할 거야."

      

하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과연 자신이 다시 그 자리에 설 자격이 있는 걸까? 그동안의 공백을 메울 수 있을까?

레스토랑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승제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이 그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한 후 승제는 서재로 향했다. 그는 책상 서랍에서 오래된 다이어리를 꺼냈다. 그 안에는 그의 꿈과 목표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승제는 새 페이지를 펼쳤다. 그리고 천천히 펜을 들어 새로운 목표를 적기 시작했다.

     

"새로운 시작, 더 나은 미래······."

      

펜을 놓으며 승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부터 그의 인생의 새로운 장이 시작될 것이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성공을 이룰 수 있기를,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가치관을 잃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날 밤, 승제는 오랜만에 편안한 잠을 잤다. 그의 꿈속에서는 밝은 미래가 펼쳐져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승제는 일찍 일어나 꼼꼼히 준비했다. 그는 거울 앞에 서서 넥타이를 매만지며 자신에게 말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이번에는 꼭······."      

윤희는 현관문 앞에서 남편을 배웅했다.

      

"잘 다녀오세요. 당신을 믿어요."

      

승제는 고개를 끄덕이고 집을 나섰다. 그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당당했다.

하지만 차에 오르며 승제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작은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과연 이번에는 모든 것이 잘 될까? 그는 핸들을 꽉 쥐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번에야말로······."

      

그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새로운 미래를 향해. 

승제는 새 회사 건물 앞에 도착했다. 그의 가슴은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뛰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그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인사팀 직원이 그를 맞이하여 회의실로 안내했다. 잠시 후, 사장과 몇몇 임원들이 들어왔다. 그들의 표정은 생각보다 굳어있었다.

사장이 입을 열었다.

      

"김 상무님, 먼저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상황이 좀 바뀌었습니다."

      

승제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무슨 말씀이신지······."

      

사장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어제 이사회에서 해외 사업부 설립을 보류하기로 했습니다. 세계 경제 상황이 급격히 나빠져서······."

     

승제의 귀에 더 이상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모든 희망, 기대, 계획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우리도 이런 상황이 될 줄 몰랐습니다."

      

사장의 말이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승제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회의실을 나오는 승제의 발걸음은 천근만근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는 거울에 비친 일그러진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희망을 되찾았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를 더 깊은 절망의 늪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주차장에 도착한 승제는 차 안에 앉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은 완전히 백지상태였다. 어떻게 이 사실을 윤희에게 말해야 할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결국 승제는 차를 출발시켰다. 하지만 그는 집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는 무작정 도로를 달렸다. 서울의 복잡한 도로를 지나, 한강 변을 따라, 그리고 도시 외곽으로. 그는 그저 달리고 싶었다.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해가 저물 무렵, 승제는 어느 한적한 해변에 도착했다. 그는 차에서 내려 모래사장을 걸었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승제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참아왔던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좌절감, 분노, 슬픔, 두려움······. 그는 모래사장에 주저앉아 오랫동안 울었다.

밤이 깊어갈 무렵, 승제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보았다.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와있었다. 대부분 윤희였다.

승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차로 향했다. 이제 현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집으로 향하는 길, 승제의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하지만 그는 결심했다.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기로. 그리고 가족과 함께 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기로.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 승제는 집 앞에 도착했다. 그는 잠시 차 안에 앉아 있다가 천천히 현관문을 열었다.

윤희가 거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걱정과 안도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보······."

      

윤희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승제는 아무 말 없이 아내를 껴안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눈물을 흘렸다.

그날 밤, 승제는 윤희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취업 실패, 자신의 좌절감, 그리고 앞으로의 두려움까지.

윤희는 묵묵히 남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우리 함께 이겨낼 수 있어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승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정말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무거운 짐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그날 밤, 승제는 잠들지 못하고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의 불빛들이 그의 공허한 마음을 더욱 선명하게 비추는 듯했다. 윤희의 따뜻한 위로의 말들이 오히려 그를 더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제 가족에게조차 짐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에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새벽녘, 승제는 조용히 일어나 서재로 향했다. 그는 서랍에서 오래된 앨범을 꺼내 들었다. 젊은 시절의 자신, 성공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던 그 시절의 모습들이 그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승제는 앨범을 덮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단순한 좌절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무능함, 세상의 냉혹함, 그리고 앞으로 닥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공포의 눈물이었다.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승제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어두운 밤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이제 그동안의 삶이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족의 사랑과 지지가 있다고 해도, 그가 마주한 현실의 벽은 너무나 높고 단단했다.

승제는 천천히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의 세계는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이 사회에서, 그리고 어쩌면 가족 안에서조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쓰라린 현실을 직시해야만 했다.

그의 앞에는 여전히 긴 하루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하루는 더 이상 희망이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또 다른 절망과 좌절의 연속일 뿐이었다. 승제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새로운 하루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이제 어떤 빛도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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