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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깬 아이

by 은파

오늘의 나는, 조금 다르다.

입꼬리가 내려가 있었고, 턱선이 달라졌다.

나는 거울 앞에서 웃는 법을 다시 배운다.

그런데 거울 속 나는 웃지 않았다.


# 1.

채연은 열일곱 살 생일이 지나고 일주일째 되는 아침, 거울 앞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어제까지 익숙하던 얼굴이 미묘하게 달라 보이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잠에서 덜 깬 탓이거나 조명 탓일 것으로 생각했지만, 찬물로 세수하고 다시 보아도 그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왼쪽 눈꺼풀이 평소보다 조금 더 처져 있는 것 같았고, 오른쪽 입술 끝이 미세하게 아래쪽으로 향해 있었다. 코끝도 어제보다 살짝 더 뾰족해진 듯했다. 누군가 밤사이 아주 정교한 조각칼로 그녀의 얼굴을 다듬어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전체적인 윤곽은 분명히 채연의 것이었지만, 세부적인 부분들에서 차이가 느껴졌다. 마치 같은 얼굴의 조금 다른 버전을 보는 것 같았다. 채연은 거울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혹시나 자신이 잘못 본 건 아닐까, 단순한 착각이었기를 바라면서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하지만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히 변화가 있었고, 그 변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뚜렷해졌다. 채연은 침실 책상에서 공책을 꺼내서 날짜와 함께 변화된 부분을 적기 시작했다. 혹시나 해서 기록해 두면 패턴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3월 2일 - 왼쪽 눈썹 끝이 평소보다 올라가 있어서 전체적으로 어두운 인상.

3월 3일 - 아랫입술이 평소보다 도톰해져 있었고, 광대뼈가 조금 더 도드라져 보였다. 입술 색깔도 평소보다 진했다.

며칠이 지나자, 채연은 이것이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녀의 얼굴이 정말로 매일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변화는 너무 미세해서 다른 사람들은 쉽게 알아채지 못했지만, 매일 거울을 보는 채연에게는 분명했다.

어머니는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을 차려주었고, 같은 표정으로 학교에 잘 다녀오라고 말했다. 하지만 가끔 채연을 바라볼 때 미묘한 혼란이 스치곤 했다. 뭔가 다르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어 하는 표정이었다. 마치 낯익은 듯하면서도 낯선 사람을 보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학교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복도를 걸을 때나 교실에서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채연을 채연으로 인식했지만, 대화 중에 잠깐씩 머뭇거리거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곤 했다. 마치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위화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점심시간에 민지가 채연에게 다가와서 요즘 뭔가 달라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뭐가 다른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그냥 느낌이 다르다고만 했다. 채연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웃어넘겼다. 민지의 눈에 스치는 당혹감을 놓치지 않았지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채연 자신도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거울을 볼 때마다 낯선 감정이 밀려왔다. 이 얼굴이 정말 자신의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표정을 지을 때도 어색했다. 웃음이 부자연스럽고, 찡그림도 억지스러웠다. 마치 다른 사람의 얼굴을 임시로 빌려 쓰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변화는 더욱 뚜렷해졌다. 이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채연은 공책을 들여다보며 자신이 기록한 변화를 되짚어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변화의 방향이 일정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어떤 날은 더 어려 보였고, 어떤 날은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어떤 날은 강인해 보였고, 어떤 날은 연약해 보였다. 마치 여러 사람의 얼굴이 번갈아 나타나는 것 같았다.

채연은 궁금해서 어머니를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얼굴, 표정, 몸짓을 유심히 보았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자신의 변화 중 일부가 어머니와 닮아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을 때가 그랬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늦은 귀가를 기다리며 거실 창밖을 바라볼 때의 그 표정, 입술을 꾹 다물고 미간을 살짝 찌푸린 그 모습을 채연은 며칠 전 거울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똑같은 주름의 패턴, 똑같은 눈빛이었다.

2주째가 되자 채연은 확신하게 되었다. 자기 얼굴이 단순히 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누군가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얼굴들은 모두 과거 어느 시점에서 자신과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이라는 것도 느꼈다.

채연은 어머니 방 오래된 서랍에서 낡은 사진들을 꺼내 보았다. 할머니의 젊은 시절 모습들이었다. 사진 속 할머니의 얼굴에서 채연은 묘한 친숙함을 느꼈다. 며칠 전 거울에서 본 자신의 모습과 비슷했다. 특히 입매와 눈썹의 각도가 그랬다.

채연은 더 오래된 사진들도 찾아보았다. 증조할머니, 고조할머니의 사진들이었다. 색이 바랜 흑백사진 속에서도 유사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얼굴형, 눈의 모양, 코의 라인이 모두 채연과 어딘가 닮아있었다. 마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며 가족의 역사를 자신의 얼굴로 재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밤에 잠들기 전, 채연은 거울을 오래 바라보았다. 오늘의 얼굴은 증조할머니를 닮아있었다. 슬프고 체념한 표정이었다. 채연은 생각했다. 이 얼굴들이 모두 자신의 것이라면, 진짜 자신의 얼굴은 무엇일까. 아니면 이 모든 얼굴이 합쳐진 것이 진짜 자신일까.

그날 밤 채연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자신이 여러 개의 거울로 둘러싸인 방에 서 있는 꿈이었다. 각각의 거울마다 다른 여자가 비쳐 있었는데, 모두 자신과 닮았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어떤 거울의 여자는 울고 있었고, 어떤 거울의 여자는 웃고 있었다. 어떤 거울의 여자는 화가 나 있었고, 어떤 거울의 여자는 무표정했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 채연의 베개는 젖어 있었다. 언제 울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 2.

3주째가 되자 변화는 더 극적이었다. 이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얼굴이 달라졌다. 아침에는 어머니를 닮았다가, 점심에는 할머니를 닮았다가, 저녁에는 전혀 모르는 사람을 닮기도 했다. 변화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채연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채연은 거울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매번 변화를 확인하고 기록하느라 공책 한 권이 금세 채워졌다. 두 번째 공책을 사서 계속 기록했지만, 변화가 너무 빨라서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어느 날, 정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욕실 거울을 보고 있는데 거울 속 자신이 채연의 움직임과 다르게 움직이는 것이었다. 채연이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여도 거울 속 채연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착각이라고 생각했지만, 몇 번 확인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거울 속 채연은 마치 독립적인 존재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더 이상한 것은 거울 속 채연의 표정이었다. 실제 채연보다 더 슬퍼 보였고, 더 지쳐 보였다. 마치 채연이 느끼지 못하는 감정까지 대신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채연은 떨리는 손으로 거울에 손을 댔다. 유리는 차가웠다. 거울 속 채연도 손을 들었지만, 각도가 미묘하게 달랐다. 마치 거울이 아닌 창문 너머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채연은 뒤로 물러나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날 이후 거울 속 채연은 점점 더 독립적으로 보였다. 때로는 채연이 웃고 있는데 거울 속에서는 울고 있기도 했고, 때로는 채연이 가만히 있는데 거울 속에서는 입을 움직이고 있기도 했다. 채연은 무서웠지만 동시에 호기심도 생겼다. 거울 속 자신이 무엇을 말하려는 것 같았다.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전달하려는 것 같았다.

어느 날 밤, 채연은 침실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서 거울 속 자신을 오래 지켜보았다. 방 안은 스탠드 하나만 켜져 있어서 어둠침침했다. 거울 속 채연이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입술의 모양만으로도 그 말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도와줘."

채연은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의자가 삐걱거리며 소리를 냈다. 거울 속 자신이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채연은 심장이 빨리 뛰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환상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 이후로 채연은 거울 속 자신과 소통하려고 노력했다. 입 모양으로 대화를 시도했는데, 처음에는 어색하고 무서웠지만 점점 익숙해졌다. 거울 속 채연은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현실의 채연이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을 조용히 품고 있었고, 그것들은 말없이도 전해졌다. 그 눈빛과 표정에는 두려움과 분노, 외로움,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거울 속 채연은 그 감정들이 모두 실제 채연의 것이며, 오랫동안 외면해 온 마음의 일부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채연은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이며 거울 속 자신에게 물었다.

"내 진짜 얼굴이 뭐야?"

거울 속 채연은 천천히 대답했다. 진짜 얼굴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오며 보여준 모든 얼굴이 곧 진짜 얼굴이라고 했다.

채연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모든 얼굴이 진짜일 수 있는지, 그렇다면 진짜 '나'는 누구인지 혼란스러웠다. 그때 거울 속 채연이 천천히 설명을 이어갔다.

채연은 결코 혼자가 아니며, 그녀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그들의 얼굴이 상황마다 번갈아 드러나는 것이며, 그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말했다.

채연은 두려움을 느꼈다. 혹시 자신이 미쳐가고 있는 건 아닐까, 이 모든 감각과 변화가 정신의 균열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거울 속 채연은 고개를 저었다. 이것은 미쳐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깨어나는 과정이라고 했다.

"뭐에서 깨어나는 거야?"

채연이 입 모양으로 물었다. 거울 속 채연은 조용히 대답했다. 혼자라는 착각에서, 그리고 자신이 완전히 분리된 개별적인 존재라는 환상에서 깨어나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날 밤 채연은 오랫동안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거울 속 자신과 긴 대화를 나누었다. 소리 없는 대화였지만 그 어떤 대화보다 깊고 진실했다.

거울 속 채연은 채연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채연이 기억하지 못했던 장면들과, 스스로 느꼈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감정들이었다. 어머니가 혼자 울고 있던 순간, 할머니가 감내했던 삶의 고통, 증조할머니가 겪었던 절망, 고조할머니가 품고 살았던 공포까지.

그 모든 기억은 지나간 일이었지만, 여전히 채연의 몸속 어딘가에 남아 조용히 영향을 주고 있었다. 모든 것이 채연과 연결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채연의 일부였다. 채연은 그것을 보면서 울었다. 자신의 눈물인지 그들의 눈물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거울 속 채연도 울고 있었다. 그 눈물은 단순한 슬픔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말하지 못한 마음이 드디어 닿았다는, 이해받았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였다.

그것은 홀로 남겨졌다고 느꼈던 시간을 지나, 마침내 연결되었다는 감각에서 비롯된 울음이었다. 채연은 처음으로 자신이 진정으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 3.

한 달이 지나자, 변화는 얼굴을 넘어섰다. 이제는 기억까지 바뀌기 시작했다. 채연은 자신이 경험한 적 없는 일들을 선명하게 기억하게 되었다.

1980년대의 어느 여름날, 좁은 부엌에서 설거지하다가 그릇을 떨어뜨려 깨뜨렸던 일을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했다. 그때의 두려움, 혼날 것에 대한 걱정, 조심스럽게 조각을 치우면서 느꼈던 절망감까지 생생했다. 손가락 끝에 찔린 도자기 조각의 날카로운 감촉도 여전히 남아있었다.

1960년대의 어느 겨울밤,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자장가를 불렀던 기억도 있었다. 아이의 체온, 작은 숨소리, 그리고 그 순간 느꼈던 깊은 사랑과 동시에 밀려온 불안감까지 모든 것이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또렷했다. 아이가 잠들지 않을까 봐 숨죽이며 불렀던 자장가의 가락도 귓가에 맴돌았다.

1940년대의 어느 봄날, 처음으로 남편에게 맞았던 기억도 떠올랐다. 뺨을 맞는 순간 따끔한 통증, 귀를 때리는 둔탁한 울림, 그리고 육체보다 더 깊이 아려온 마음의 상처가 남아있었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그 모든 일을 어디에도 말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이상하고 생생한 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깨어있는 동안에도 그 기억들은 불쑥불쑥 떠올랐다. 수업을 듣다가, 밥을 먹다가,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평범한 순간에도 예고 없이 밀려왔다.

기억은 감정과 함께 찾아왔다. 두려움, 슬픔, 절망, 체념 같은 감정들이었고, 그것은 채연이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깊고 낯선 감정들이었다. 열일곱 살 채연에게는 감당하기 벅찬 무게였다. 채연은 벅찬 기억을 정리하려고 노력했다. 언제 적 일인지, 누구의 기억인지 파악하려고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기억들은 마치 물감이 번지듯 서로 섞여 있었고, 시간의 순서도 뒤죽박죽이었다.

어떤 기억에서는 채연이 어린아이였다. 서너 살 정도의 아이가 되어 큰 어른들 사이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어떤 기억에서는 스무 살 정도의 젊은 여자가 되어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어떤 기억에서는 중년의 어머니가 되어 자식 걱정에 잠 못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 채연이었다. 다른 시대, 다른 상황, 다른 나이의 채연이었다.

기억 중에는 폭력적인 것들이 많았다. 신체적 폭력, 정서적 폭력, 언어적 폭력들이었다. 채연은 그런 기억을 경험할 때마다 움츠러들었다. 왜 자신이 이런 기억을 가져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점차 패턴을 파악하게 되었다. 기억들은 모두 여성들의 것이었고, 모두 채연과 혈연관계에 있는 여성들의 것이었다. 어머니, 할머니, 증조할머니, 고조할머니,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더 먼 조상들까지.

그때 채연은 자신이 그들의 기억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품고 있었던 기억들이 이제야 깨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기억들은 새롭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그녀의 일부였다.

기억 중에는 행복한 것들도 있었다. 첫사랑의 설렘, 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기쁨, 가족이 함께 웃었던 순간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억들은 매우 적었고, 오래 가지 않았다. 곧 슬픔이나 두려움에 덮여버렸다.

어느 날 밤, 채연은 특별히 선명한 기억을 경험했다. 1950년대의 어느 가을날이었는데, 채연은 스무 살 정도의 젊은 여자가 되어 있었다. 중매로 만난 신랑감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 여자는 기대에 차 있었다. 새로운 삶, 새로운 가족, 새로운 시작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채연은 그 기대가 곧 실망으로,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래를 아는 자의 슬픔이 가슴을 무겁게 눌렀다.

기억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결혼식과 신혼생활,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드러난 현실이 있었다. 처음에는 모든 게 괜찮아 보였다. 남편도 무던한 사람이었고, 시댁 식구들도 크게 문제없이 받아주는 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는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던 관계들이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했고, 그 안에 숨겨진 균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시어머니의 구박도 시작되었다. 집안일을 제대로 못 한다는 잔소리, 아들 뒷바라지를 제대로 못 한다는 꾸중이었다.

남편은 처음에는 아내를 감쌌지만, 점점 어머니 편을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첫 번째 폭력이 일어났다. 시어머니 앞에서 실수했을 때였다. 남편의 손바닥이 그 여자의 뺨을 쳤다. 처음에는 실수라고 생각했다. 남편도 미안해했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가 이어졌다. 점점 이유도 사소해졌다. 반찬이 짜다고, 빨래가 제대로 안 되었다고, 심지어는 표정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그 여자는 참았다.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친정은 멀었고, 부모님께는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채연은 그 모든 것을 직접 경험했다. 몸의 아픔, 마음의 상처, 어디에도 말할 수 없는 절망감을 너무 생생하게 느꼈다. 기억이 끝났을 때 채연은 울고 있었다. 그 여자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그날 이후 채연은 더 많은 기억을 경험했다. 각각 다른 시대, 다른 상황이었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고통, 부당함, 불합리함이었다.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시간, 참을 수밖에 없었던 순간들, 그리고 자신을 지킬 힘이 없어 무너져갔던 경험이었다.

채연은 점차 자신이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이전 세대 여성들의 기억을 잇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들의 삶을 품고 있었고, 기억은 그녀를 통해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무엇을 남길 것인가. 이 고통을 그대로 반복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건넬 것인가. 채연은 자신에게 물었다.

채연은 더 이상 고통만을 남기지 않기로 했다. 자신의 세대에서 그 흐름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진정한 위로이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 4.

변화가 시작된 지 두 달째, 채연에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어머니가 갑자기 방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채연이 화장대 거울 앞에서 입을 움직이며 무언가와 대화하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었다.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채연이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채연에게 다가와서 어깨에 손을 얹었다.

"채연아, 괜찮니?"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머니가 거울을 보더니 갑자기 몸을 떨었다. 거울 속에서 자신의 어머니, 즉 채연의 할머니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한 걸음 물러서며 떠듬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거울 속에 할머니가······"

채연은 놀랐다. 어머니 역시 그것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때부터 이상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집 안의 다른 거울들에서도 조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화장실 거울에서는 증조할머니가, 현관 거울에서는 고조할머니가 보였다. 더 이상한 것은 그들이 모두 채연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았다.

그날 밤, 채연은 집 안을 돌아다니며 모든 거울을 찾아다녔다. 어머니도 조심스럽게 따라왔다. 각각의 거울마다 다른 조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첫 번째로 나타난 이는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입술을 움직이며 채연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자신과 과거의 여성들을 기억해 준 것에 대한 감사였고, 이제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할 때라고 조용히 일렀다.

두 번째는 증조할머니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깊은 슬픔이 어려 있었다. 고통만을 딸과 손녀에게 물려준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고리를 끊고 다른 흐름을 만들어야 할 시점이라고 전했다.

세 번째로 마주한 고조할머니는 가장 오래된 시간의 기억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과거에는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의 채연은 다르며,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했다.

채연은 그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자신을 통해 계속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방이었다. 자신들의 상처와 기억이 더 이상 후손들에게 이어지지 않기를, 이제는 멈추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채연은 두려웠다. 그들을 보내버리면 자신은 정말 혼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 자신만의 정체성이 있을까. 그 두려움은 마음 깊숙이 자리 잡았다.

그날 밤, 어머니와 채연은 처음으로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다. 거실에 둘만 앉아 있는 조용한 시간이었다.

"엄마도 그런 적 있어요? 할머니처럼 느껴지는 때가?"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사람들이 자신이 할머니를 닮았다고 말해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채연에게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가끔은 할머니의 기억이 불쑥 떠오른다고, 직접 겪은 적 없는 장면들이 자기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고 말했다.

채연은 그제야 모든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들, 조상들과 나눈 대화, 그들의 기억이 몸에 새겨졌던 과정까지 조용히 전했다. 어머니는 점차 그 말들의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느꼈던 낯선 감정들과도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조용히 말했다.

"어쩌면 이것은 여성들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능력일지도 모르겠다. 생명을 낳고 기르는 존재로서,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에 전하는 역할이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일 수도 있어."

그러면서도 한 가지를 덧붙였다.

"하지만 그 역할이 짐이 되어서는 안 돼. 과거의 고통이 현재를 얽매게 해서도 안 되고. 기억은 이어지되, 그것이 삶의 무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어머니의 말에 채연은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 찾던 답이었다.

그날 밤늦게, 채연은 집 안의 모든 거울을 다시 찾아갔다. 하나하나 마주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제는 자신이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겠다고 전했다. 그들의 삶과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앞으로의 시간을 다르게 살아가겠다고 약속했다. 조상들이 하나씩 미소를 지으며 사라져 갔다. 마치 오래된 짐을 내려놓는 것 같았다. 마치 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 5.

조상들과의 마지막 대화를 마친 다음 날, 채연은 결심했다. 이제는 거울들도 떠나보내기로 했다. 진정한 자유는 더 이상 거울에 기대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과거를 기억하되,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채연은 특별한 방법을 택했다. 망치를 사용하는 대신, 자신의 목소리를 사용하기로 한 것이었다.

채연은 첫 번째 거울 앞에 서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만의 진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높고 맑은 목소리였는데, 마치 새가 지저귀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거울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채연의 목소리가 유리를 울렸고, 마침내 거울이 스스로 깨어졌다. 하지만 일반적인 깨짐과는 달랐다. 거울이 마치 꽃잎처럼 아름답게 흩어졌다.

두 번째 거울 앞에서 채연은 다른 노래를 불렀다. 이번에는 더 깊고 풍성한 목소리였다. 어머니가 자장가를 불러주던 그 따뜻함이 담긴 목소리였다. 거울이 또다시 아름답게 깨어졌다. 마치 은빛 나비들이 날아가는 것 같았다.

세 번째, 네 번째 거울들도 같은 방식으로 깨어졌다. 채연의 목소리가 담긴 노래에 반응하여 스스로 해체되어 갔다.

어머니가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놀라지 않았다. 어젯밤 채연과의 대화를 통해 어느 정도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어머니는 채연의 목소리에 감동했다. 그 목소리에는 고통도 있었지만, 동시에 희망도 있었다. 절망도 있었지만, 동시에 기쁨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거울은 채연의 방에 있었다. 채연은 그 앞에 조용히 서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거울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채연의 얼굴만이 또렷하게 비쳐 있었다. 과거의 그림자도, 타인의 흔적도 없었다. 거기에는 채연이라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채연은 그 얼굴과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다. 이제는 입 모양이 아닌, 자신의 목소리로 또렷이 말을 걸었다.

"이제 정말 안녕이야."

거울 속 채연이 답했다. 역시 진짜 목소리로.

"안녕. 그리고 고마워. 나를 찾게 해줘서."

"나야말로 고마워. 나를 자유롭게 해줘서."

채연은 마지막으로 노래를 불렀다. 이번에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였다. 태어나서 처음 부르는, 오직 자신만을 위한 노래였다. 거울이 천천히 깨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소리도 없이, 아름답게 빛나면서 사라져갔다.

모든 거울이 사라진 후, 채연은 집 안을 돌아다녔다. 거울이 있던 자리마다 작은 꽃이 피어 있었다. 분명히 어제까지는 없던 꽃들이었다. 어머니도 신기해했다. 하지만 채연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것이 사라진 자리에는 더 아름다운 것이 생기는 법이니까.

그날 저녁, 채연과 어머니는 함께 정원에 나가서 별을 보았다. 하늘에는 평소보다 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엄마, 나 예뻐?"

채연이 물었다. 거울 없이 묻는 첫 번째 질문이었다.

어머니가 채연을 바라보며 답했다.

"세상에서 가장 예뻐. 특히 지금이."

"왜 지금이?"

"지금이 진짜 네 모습이니까."

채연은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거울을 보지 않아도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는 감각, 볼 안쪽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며칠 후 채연은 학교에 갔다. 친구들이 놀라워했다. 채연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채연아, 너 정말 달라 보인다. 뭔가 빛이 나는 것 같아."

민지가 말했다.

"그래? 나는 그냥 나인데."

채연이 답했다.

집에 돌아와서 채연은 일기를 썼다.

오늘부터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거울도 없고, 조상들의 얼굴도 없다. 오직 나만 있다. 처음에는 무서울 줄 알았는데, 전혀 무섭지 않다. 오히려 자유롭다.

나는 이제 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생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다.

조상들이 물려준 것은 고통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강인함도, 그들의 지혜도, 그들의 사랑도 내 안에 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되, 내 방식으로 살아갈 것이다.

나는 나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채연은 일기를 덮고 창문을 열었다. 밤공기가 들어왔다. 시원하고 상쾌했다. 창문 유리에 자신의 모습이 희미하게 비쳤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창밖의 별들을 보았다.

3년 후의 어느 날, 채연은 대학 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제목은 '거울 없는 얼굴들'이었다. 모든 그림이 거울을 보지 않고 그린 자화상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신기해했다. 어떻게 거울 없이 자화상을 그릴 수 있냐고 물었다.

"거울은 외모만 보여줘요. 하지만 진짜 얼굴은 마음에 있어요."

채연은 답했다.

전시회 마지막 날, 한 젊은 여성이 채연에게 다가왔다.

"제게도 이런 경험이 있었어요."

그 여성이 말했다.

"어떤 경험이요?"

"거울에서 다른 사람이 보이는 경험. 제 경우에는 아버지 쪽 조상들이었지만."

채연은 놀랐다.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또 있다는 사실에.

"그런 분이 더 계실까요?"

채연이 물었다.

"아마도요. 저희가 특별한 건 아닐 거예요. 다만 대부분은 그것을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숨기거나 무시하려고 하죠."

그 여성의 말에 채연은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자신이 겪은 일이 그리 드문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지만, 그것을 말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집에 돌아온 채연은 오랜만에 일기를 썼다.

오늘 깨달은 것이 있다. 내가 거울을 깬 것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을 수 있다.

나처럼 거울에 갇혀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있다면, 그들도 언젠가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거울을 깰 수 있을까?

아니면 어쩌면 거울을 깨지 않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거울 속 조상들과 함께 사는 것이 더 편할 수도 있으니까.

나는 내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옳은 선택일까?

채연은 펜을 멈췄다. 그리고 창문을 열었다.

밤하늘에는 여전히 수많은 별이 빛나고 있었다. 그 별 중에 자신이 깬 거울의 조각들이 있을까? 아니면 그것들은 이미 다른 형태로 변해 있을까?

문득 채연은 의문이 들었다. 과연 자신이 정말로 거울을 깬 것일까, 아니면 거울이 스스로 자신을 떠나간 것일까?

그리고 지금도, 어딘가에서 누군가 처음으로 거울 속에서 낯선 얼굴을 발견하고 있을까?

채연은 일기장을 덮었다. 답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어떤 질문들은 답보다 질문 자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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