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은정은 아침마다 욕실 거울 앞에서 자신을 확인한다. 검은 머리카락, 갈색 눈동자, 작은 점 하나가 찍힌 왼쪽 볼까지, 모든 것이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그 익숙한 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무언가 빠져나간 듯한 공허함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연희구 한복판의 원룸에서 혼자 살기 시작한 지 벌써 이년이 넘었다. 스물아홉 살이 된 지금까지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점점 흐릿해졌다. 어제 무엇을 했는지, 지난주에 누구를 만났는지, 그런 사소한 것들부터 기억에서 미끄러져 나갔다. 마치 누군가 조용히 자신의 머릿속에서 기억을 하나씩 지워가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냥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회사에서의 야근, 끝없는 프로젝트, 상사의 차가운 시선들이 뇌를 마비시키는 것이라고 자신을 위로했다. 하지만 기억의 구멍은 점점 커져만 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수첩에 적어둔 약속을 살펴보았지만, 이 글씨가 자신의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분명히 자신이 쓴 것 같은데, 언제 적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온 시간을 훔쳐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낯선 감정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출근길에 오르면서, 은정은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연희구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낮은 아파트들과 좁은 골목들, 어린이 공원과 작은 상가들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분명히 매일 보는 광경일 텐데, 마치 처음 보는 곳처럼 느껴졌다. 차창에 비친 그녀의 모습도 어딘지 어색했다.
회사에 도착하니 동료들이 반갑게 인사했다. 그들의 얼굴은 어렴풋이 떠올랐지만, 함께 나눈 대화나 추억들은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다. 점심시간에 함께 먹었던 음식의 맛도, 회식에서 들었던 농담도, 모든 것이 하얀 벽 너머로 밀려난 느낌이었다. 동료들과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조차 어색하게 느껴졌다.
은정은 책상 서랍에서 오래된 다이어리를 꺼냈다. 자신의 글씨로 빼곡히 채워진 페이지들이지만, 마치 낯선 사람의 일기를 읽는 듯했다. 거기에는 행복했던 순간들, 슬펐던 일들, 화났던 감정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감정도 지금의 자신에게는 울림이 없었다. 과거의 자신이 느꼈던 감정들이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여겨졌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 편의점에서 마주친 아르바이트생이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분명히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언제부터 알고 지낸 건지 기억나지 않았다. 은정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우유와 빵을 샀다. 그 순간에도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불안감이 스쳤다.
집에 도착해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똑같은 우유가 이미 세 개나 들어있었다. 언제 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유통기한을 확인해 보니 모두 다른 날짜였다. 어제, 그제, 그리고 사흘 전까지. 자신이 매일 같은 물건을 사고 있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이런 일이 얼마나 더 반복되고 있었을까 하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 2.
기억 상실을 처음 의식적으로 느낀 것은 한 달 전이었다. 그날도 평소와 다르지 않게 아침을 맞았지만, 어머니에게서 온 문자메시지를 보고 당황했다. 아버지의 기일이 다가온다는 내용이었다. 은정은 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셨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스마트폰을 뒤져 예전 문자들을 찾아보니, 작년에도 같은 내용의 메시지가 있었다. 그리고 재작년에도 그랬다. 매년 이맘때면 어머니가 보내는 같은 문자가 있었다. 하지만 은정에게는 모든 것이 처음인 듯 느껴졌다.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또렷하지 않았다. 어떤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는지, 어떤 걸음걸이였는지, 함께 나눈 마지막 대화가 무엇이었는지, 모든 것이 안개 속에 묻혀 있었다. 마치 중요한 퍼즐 조각들이 하나씩 사라진 것 같았다.
그날 밤, 은정은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오랜만에 듣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여전히 따뜻했지만, 어딘가 서운함이 묻어났다.
"요즘 왜 이렇게 연락이 없니?"
어머니의 말에 은정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지만 잊은 것이 아니라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들을 다시 들려주었다. 병원에서의 마지막 한 달,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말, 장례식에서 은정이 얼마나 울었는지까지. 하지만 모든 것이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 같았다. 어머니의 생생한 기억과 달리, 은정에게는 그 어떤 장면도 떠오르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나서 은정은 옷장 깊숙한 곳에서 아버지의 사진을 찾았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 은정을 안고 있는 사진, 가족여행에서 찍은 것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사진 속 아버지의 얼굴은 분명했지만, 그와 함께한 순간들은 감정이 없는 정보처럼만 느껴졌다. 마치 남의 가족 앨범을 보는 것 같았다.
그날 밤부터 은정은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무언가가 자신의 머릿속을 뒤지고 있었다. 서랍을 여닫듯이, 기억을 하나씩 꺼내 어딘가로 가져가는 존재가 느껴졌다. 그 존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이었다. 마치 엄마가 아이의 물건을 정리해 주듯 조심스럽고 사랑스러웠다.
꿈에서 깨어나니 많은 것들이 사라진 상태였다. 중학교 때 좋아했던 선생님의 이름, 고등학교 때 가장 친했던 친구와 나눈 비밀, 대학교 졸업식에서 느꼈던 벅찬 감정까지 하나씩 조용히 사라져갔다. 그 공허함이 점점 더 커졌다.
처음에는 그 상실이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가벼웠다.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해방감마저 들었다. 괴로웠던 기억들, 후회스러운 순간들, 창피했던 일들이 모두 희미해지면서 마음이 평온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좋았던 기억들도 함께 사라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첫사랑의 설렘, 친구와의 즐거운 시간, 성취감을 느꼈던 순간들이 아픔과 함께 희미해져 갔다. 기억은 선별적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모두 함께 흘러가고 있었다.
# 3.
일주일 전, 은정은 우연히 초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연희구 근처 카페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낯익은 얼굴의 여자가 다가와 반갑게 인사했다. 그 여자는 민서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은정아, 정말 오랜만이다!"
민서의 목소리는 밝고 반가웠다. 초등학교 6년 내내 같은 반이었고, 중학교까지 같이 다녔다고 했다. 은정의 생일파티에도 매년 왔고, 함께 수학여행도 갔다고 했다. 심지어 은정이 이사 가기 직전까지 바로 옆집에 살았다고도 했다.
은정은 민서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어렴풋이 익숙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마치 꿈에서 본 듯한,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 속 인물 같았다.
민서는 추억을 쏟아냈다. 함께 키웠던 강아지 이야기, 몰래 사 먹었던 아이스크림, 선생님께 혼났던 장난들······ 모든 이야기에 은정이 주인공으로 등장했지만, 은정에게는 아무런 기억이 없었다.
"기억나? 우리가 그때 몰래 옥상에 올라갔다가 걸린 거 말이야."
"아, 그래······"
은정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솔직히 털어놓을 수 없었다. 대신 애매하게 미소를 지으며 민서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속으로는 점점 불안해졌다. 이렇게 가까웠던 친구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정상적인 일일까?
그날 밤, 은정은 어릴 적 사진첩을 뒤져보았다.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붙여 넣은 사진들 사이사이에 민서의 모습이 보였다. 함께 웃고 있는 사진, 손을 잡고 어딘가로 가는 사진, 케이크 앞에서 찍은 생일 사진들이었다. 분명히 가까운 사이였던 것 같은데, 그 어떤 순간도 생생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더 이상한 것은 사진 속 자신의 모습조차 낯설다는 점이었다. 분명히 은정의 얼굴이고, 자신이 입었던 옷들인데, 마치 다른 아이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 아이가 무엇을 생각하며 웃고 있었는지, 어떤 기분이었는지 전혀 감정이 전해지지 않았다. 과거의 자신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사진첩을 넘기면서 은정은 자신의 기억 상실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추적해 보려 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어느 정도 기억이 있었다. 대학교 입학 무렵부터 조금씩 흐릿해지기 시작했고, 사회에 나온 후로는 급격히 빨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정확한 시점을 집어낼 수는 없었다. 기억 상실은 서서히, 조용히 진행되었다. 마치 오래된 책의 글자가 바래듯이, 아니면 겨울 창문에 성에가 끼듯이, 어느 순간 보니 대부분의 기억이 사라져 버렸다. 그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언제부터인지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날 밤 꿈에서 은정은 다시 그 존재를 만났다. 여전히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더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부드러운 손길로 은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아무 걱정 하지 말아. 아픈 것들을 모두 가져가 줄게."
그 목소리는 마치 어머니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자신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따뜻하고 안전한 느낌이었다. 은정은 꿈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픈 기억들은 모두 가져가. 힘들었던 순간들, 창피했던 일들, 후회스러운 선택들까지 모든 것을 치워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민서와의 추억들도 함께 사라진 것을 보면,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의 구분은 없는 것 같았다.
# 4.
이틀 전, 은정은 자신의 스마트폰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통화 기록을 확인해 보니 심리상담센터라는 곳에 여러 번 전화를 건 기록이 있었다. 가장 최근 통화는 한 달 전이었고, 그전에도 몇 차례 더 있었다.
은정은 그런 곳에 전화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자신이 심리상담을 받았다는 것도, 받으려고 했다는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혹시 잘못 눌렀을 가능성을 생각해 봤지만, 통화 시간이 각각 30분에서 1시간씩이나 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시간이 공백으로만 느껴졌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상냥한 목소리의 상담사가 받았다. 은정이라는 이름을 말하자, 상담사는 반갑게 대답했다. 오랜만이라고, 어떻게 지냈냐고, 지난번 이야기를 계속해 보자고 했다.
은정은 당황했다. 지난번에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그 순간만 누군가 지워놓은 것처럼, 머릿속이 텅 비어 있었다.
상담사는 은정이 기억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고 했다. 어릴 적 트라우마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고, 그래서 기억을 지우고 싶어 한다고 말했었다는 것이다. 상담사는 계속해서 이전 상담 내용을 언급했다. 은정이 말했던 어릴 적 사건, 그것이 얼마나 그녀를 괴롭혔는지, 그래서 모든 것을 지우고 싶다고 했던 것들까지. 하지만 은정에게는 그 어떤 내용도 기억나지 않았다.
더 충격적인 것은 상담사가 말하는 트라우마 자체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어릴 적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그것이 트라우마가 되었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상담사는 기억 상실 자체가 트라우마에 대한 방어기제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너무 아픈 기억은 무의식이 저절로 억압한다고, 그래서 기억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억압은 건강하지 않으며, 언젠가는 다시 마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은정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에게 그런 트라우마가 있었다는 것도, 그것 때문에 상담을 받았다는 것도 모두 새로운 사실이었다. 마치 자신에 대한 비밀 파일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과연 자신이 잊고 싶어 했던 그 기억은 무엇이었을까?
그날 저녁, 은정은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어릴 적에 특별히 힘들었던 일이 있었는지, 트라우마가 될 만한 사건이 있었는지. 어머니는 잠시 침묵하더니,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왜 하냐고 되물었다.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 평소보다 조심스럽고,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톤이었다. 은정이 계속 묻자, 어머니는 옛날 일은 굳이 다시 떠올릴 필요 없다고 했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두라고, 지금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 반응이 오히려 은정의 의심을 키웠다. 정말로 무언가 있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어머니는 더 이상 말하려 하지 않았고, 은정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의 침묵이 더욱 무겁게 다가왔다.
그날 밤 꿈에서 만난 존재는 전보다 더 선명했다. 여전히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들렸다.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로 은정을 달랬다. 아픈 것들은 모두 자신이 가져갔다고, 이제 편안해도 된다고 속삭였다.
은정은 꿈속에서 그 존재에게 물었다. 자신이 잊은 것이 무엇인지, 왜 모든 것을 가져갔는지······ 하지만 그 존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더 많은 것들을 가져가겠다고, 결국에는 모든 아픔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 목소리는 점점 더 자신의 목소리와 닮아가고 있었다.
# 5.
어제, 은정은 자신의 방에서 이상한 일기장을 발견했다. 책상 서랍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것으로, 겉표지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었다. 펼쳐 보니 자신의 글씨로 빼곡히 적혀 있었지만, 그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다른 사람이 자신의 필체를 흉내 내어 쓴 것처럼 낯설었다.
일기는 약 2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처음 몇 페이지는 일상적인 내용들이었다. 회사 일, 친구들과의 만남, 주말에 본 영화 이야기 등. 하지만 점차 내용이 어두워졌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들, 악몽에 시달리는 일상, 그리고 자꾸만 떠오르는 어떤 기억에 대한 고통이 가득했다.
일기 속의 은정은 괴로워하고 있었다. 어릴 적 어떤 사건이 자신을 계속 괴롭힌다고 적혀 있었다. 그 사건을 구체적으로 서술한 부분은 없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큰 상처였는지는 행간에서 느껴졌다. 매일 밤 악몽을 꾸고, 낮에도 불안에 시달린다고 적혀 있었다. 글씨체도 평소보다 흐트러져 있어서, 당시의 혼란스러운 감정이 그대로 전해졌다.
일기 중반부부터는 '기억을 잊고 싶다'라는 내용이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그 아픈 기억만 지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것을 초기화하고 새로 시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절망적인 바람들이 적혀 있었다. 어떤 페이지에는 '잊고 싶다'라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되어 적혀 있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일기의 톤이 바뀌었다. '그것'을 만났다는 내용이 나타났다. 꿈에서 만난 존재인데, 자신의 아픈 기억을 가져가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의심했지만, 점차 그 존재를 신뢰하게 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그 부분의 글씨는 이상하게도 평소보다 더 정갈하고 차분해 보였다.
일기의 마지막 부분에는 놀라운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존재가 실제로 기억을 가져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가장 아픈 기억부터 시작해서, 점차 다른 기억들도 함께 사라지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처음에는 두려웠지만, 점차 편안해졌다고, 모든 짐을 내려놓은 것 같다고 쓰여 있었다.
마지막 일기는 한 달 전 날짜였다. 그날의 일기에는 단 한 줄만 적혀 있었다. "이제 거의 모든 것을 잊었다. 고맙다." 그 뒤로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 마지막 문장의 글씨는 이상하게도 떨리고 있었다.
일기를 읽고 나서 은정은 소름이 돋았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읽은 것 같았지만, 분명히 자신의 글씨였다. 자신이 그런 고통을 겪었고,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현재 자신의 상황을 보면 일기의 내용이 모두 사실인 것 같았다.
은정은 일기장을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혹시 그 트라우마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적힌 부분이 있을까 찾아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정확한 내용은 나와 있지 않았다. 마치 일부러 모호하게 적은 것 같았다.
다만 몇 가지 단서가 있었다. '그날 밤',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던 일', '어른들의 침묵' 같은 표현들이 중간중간 나타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무슨 일이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그 단서들이 더 큰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날 밤, 은정은 꿈에서 다시 그 존재를 만났다.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이 있는 것 같았다. 은정은 꿈속에서 그 존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가 잊은 그 기억이 정말 그렇게 아픈 것이었는지,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는지에 대해서.
그 존재는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은정이 너무 아파했기에 도와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거의 끝나가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완전히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약속하듯 조용히 덧붙였다.
은정은 꿈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미묘한 불안이 스며들었다. 정말로 이것이 옳은 선택이었을까. 아픈 기억과 함께 소중한 것들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 의문이 점점 더 커졌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길인 것 같았다.
# 6.
오늘 아침, 은정은 집에서 나가려다가 현관 옆 신발장에서 낡은 운동화 한 켤레를 발견했다. 분명히 자신의 것 같은데 언제 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신발 안쪽에는 작은 글씨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 '김은정' 자신의 이름이었지만, 글씨체가 지금의 자신과는 달랐다. 더 어렸을 때의 글씨 같았다.
운동화를 자세히 살펴보니 이상한 점이 하나 더 있었다. 한쪽 신발 끈에는 작은 알파벳 글자들이 매달려 있었다. 'S', 'A', 'F', 'E'. SAFE. 안전하다는 뜻이었다. 누가 이런 장식을 달았을까. 자신이 했던 걸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해준 걸까. 그 글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약간 색이 바랬지만, 여전히 선명했다.
운동화를 신어보니 발에 딱 맞았다. 분명히 자신이 신었던 신발이 맞았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신었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다른 사람의 물건을 우연히 가지게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신발 밑창을 보니 여러 곳이 닳아 있었다. 상당히 많이 사용했다는 증거였다.
회사에 가서도 그 운동화가 계속 신경 쓰였다. 점심시간에 동료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혹시 이런 신발을 신고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동료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은정이 예전에 운동을 좋아했던 것 같다고, 주말마다 어딘가로 운동하러 다녔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은정은 의외였다. 지금의 자신은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주말이면 집에서 뒹굴뒹굴하며 TV를 보거나 잠을 자는 것을 선호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변했을까. 아니면 원래 이런 성격이었는데 일시적으로 운동을 좋아했던 시기가 있었던 걸까. 과거의 자신이 점점 더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퇴근길에 은정은 집 근처 공원에 들렀다. 혹시 운동했던 기억이 떠오를까 싶어서였다. 공원에는 달리기 트랙이 있었고, 몇몇 사람들이 저녁 운동을 하고 있었다. 은정은 벤치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공원의 풍경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특히 트랙의 한 구간, 큰 나무 아래를 지나는 부분에서 특히 그랬다. 마치 여러 번 뛰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희미한 기시감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벤치에 앉아 있는데, 옆을 지나가던 중년 남성이 은정을 알아보았다. 반갑게 인사하며 요즘 왜 운동을 안 나오냐고 물었다. 예전에는 매일 아침 나와서 열심히 뛰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모습을 보이지 않더라고 했다.
은정은 당황했지만 대충 바빠서 그랬다고 얼버무렸다. 그 남성은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운동은 몸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좋다고, 특히 은정 같은 경우에는 더욱 필요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무슨 뜻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 남성은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 그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집에 돌아와서 은정은 그 운동화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SAFE라는 글자가 계속 눈에 들어왔다. 왜 안전하다는 글자를 신발 끈에 매달았을까. 무엇으로부터 안전하다는 뜻일까. 아니면 안전하고 싶다는 바람이었을까. 그 작은 글자들 속에 어떤 절실함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거울 앞에서 운동화를 신고 서 있으니, 조금 다른 은정의 모습이 보였다. 평소보다 더 활동적이고, 더 건강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마치 잊어버린 자신의 다른 면을 발견한 것 같았다. 과연 그 은정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무엇을 생각하며 매일 아침 달렸을까.
그날 밤 꿈에서 은정은 달리고 있었다. 공원의 트랙을 따라 달리는데, 발걸음이 가볍고 자연스러웠다. 마치 수없이 뛰어본 익숙한 길인 것처럼 그랬다. 그리고 꿈속에서 누군가가 함께 뛰고 있었다. 누구인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친근한 느낌의 존재였다. 함께 뛰는 발걸음 소리가 리듬감 있게 울려 퍼졌다.
꿈에서 깨어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달리는 꿈을 꾼 적이 거의 없는데, 이상하게도 그 꿈은 생생했다. 기억인지 꿈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 순간만큼은 과거의 자신과 연결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7.
며칠 전부터 은정은 밤마다 이상한 소음을 듣고 있었다. 처음에는 위층에서 나는 소리인 줄 알았지만, 자세히 들어보니 자신의 방 안에서 나는 것 같았다. 뭔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서랍을 여닫는 듯한 소리,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누군가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어젯밤에는 그 소리가 특히 컸다. 마치 누군가 방 안을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은정은 눈을 크게 뜨고 조심스럽게 방을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리는 계속 들렸다.
소리를 따라가다 보니 책상 근처에서 나는 것 같았다. 은정은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다가갔다. 발걸음을 최대한 조용히 하려 했지만, 바닥이 삐걱거렸다. 그 순간 소리가 멈췄다. 마치 자신이 깨어있다는 것을 알고 숨어버린 것처럼.
책상 위에는 평소와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며칠 전에 발견했던 일기장이 열려있었다. 분명히 서랍에 넣어두었는데 언제 꺼내놓았을까. 더 이상한 것은 일기장의 페이지가 뒤쪽으로 넘어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 페이지들에는 새로운 글이 적혀 있었다. 분명히 자신의 글씨였지만, 언제 적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오늘도 그것이 왔다. 점점 더 많은 것을 가져간다. 이제 어릴 적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부모님의 얼굴도 희미해지고, 친구들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무섭지 않다. 오히려 편안하다."
다음 페이지에는 더 충격적인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것이 말했다. 곧 모든 것이 끝날 거라고. 마지막으로 가져갈 기억이 하나 남았다고. 그 기억만 가져가면 완전히 자유로워질 거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기억도 가져가. 모든 것을 가져가서 나를 텅 빈 사람으로 만들어줘. 하지만 조금 무섭기도 하다. 그 기억이 사라지면 나는 무엇이 될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과연 나일까. 그래도 상관없다. 그 기억이 있는 한 나는 계속 아플 테니까."
글을 읽으면서 은정은 자신이 언제 이런 일기를 썼는지 궁금했다. 분명히 최근에 쓴 것 같은데,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잠든 사이에 다른 인격이 나타나 쓴 것 같았다. 글씨체도 평소보다 흐트러져 있었다.
더 무서운 것은 일기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그 마지막 기억이 무엇인지 적혀 있었다.
"열두 살 여름, 사촌 오빠의 방. 아무도 없는 집. 오빠가 나에게 한 일들.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일들. 어른들이 믿어주지 않았던 일들. 그것이 내 인생을 망쳐놓은 시작이었다."
은정은 일기장을 떨어뜨렸다. 자신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어딘가에서 작은 기억의 파편들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았다. 두려움, 수치심,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비밀의 무게가 가슴을 짓눌렀다.
그 순간 방 안에서 다시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더 선명했다. 마치 누군가 은정 바로 옆에 서서 무언가를 만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은정은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공기 중에서 무언가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 꿈에서만 들었던 그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이제 마지막이야. 그 기억만 가져가면 모든 게 끝나."
은정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로 그게 끝일까? 그 기억이 사라지면 정말 편해질까?"
목소리는 확신에 차서 대답했다.
"물론이야. 그 기억이 너를 괴롭혔던 모든 것의 시작이었어. 그것만 없으면 넌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어."
은정은 잠시 망설였다. 정말로 그 기억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자신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아픈 기억까지 포함해서 지금의 자신이 된 것이 아닐까.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그것은 자신의 일부였다.
"잠깐."
은정이 말했다.
"그 기억을 지우고 나면 나는 무엇이 되는 거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빈 껍데기가 되는 건 아닐까?"
목소리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조금 다른 톤으로 대답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더 이상 아프지 않다는 거야."
그 대답에서 은정은 미묘한 변화를 감지했다. 처음으로 그 존재가 확신 없는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목소리에 어딘지 당황스러운 기색이 섞여 있었다.
그 순간 은정은 깨달았다. 이 존재는 자신을 돕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지우려 하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과 함께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없애려 하고 있었다는 것을. 과연 그것이 정말 구원일까,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파멸일까.
# 8.
그날 밤 이후로 은정은 그 존재와 대화하기를 거부했다. 꿈에서 찾아와도 일부러 깨어나려 노력했고, 목소리가 들려도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억 상실은 계속되었다. 오히려 더 빨라진 것 같았다. 마치 그 존재가 화가 난 것처럼 더욱 거세게 기억을 가져갔다.
이제는 자신의 이름조차 헷갈렸다. 거울을 보며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확신 있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김은정이라는 이름이 맞나? 이 얼굴이 내 얼굴이 맞나?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거울 속 얼굴은 점점 더 낯선 타인의 것처럼 느껴졌다.
회사에서도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컴퓨터 비밀번호를 기억하지 못해 몇 번이나 초기화해야 했고, 동료들의 이름도 헷갈렸다. 심지어 자신이 어떤 부서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상사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점심시간에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니, 얼굴이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그 얼굴을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남의 얼굴을 보는 것 같은 낯선 느낌이 들었다. 손으로 볼을 만져봐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날 오후, 은정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더 이상 기억을 잃어버릴 수는 없다고. 비록 아픈 기억이라 해도, 그것이 자신을 만든 일부라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그래서 심리상담센터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상담사는 반가워했다. 지난번 이후로 어떻게 지냈냐고 물었다. 은정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기억을 계속 잃고 있다고, 이제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겠다고. 그리고 그 트라우마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싶다고 했다.
상담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로 알고 싶은 것이냐고, 아픈 기억을 다시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고. 은정은 확신을 가지고 대답했다. 알고 싶다고, 그래야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상담사는 천천히 은정이 열두 살 때 겪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촌 오빠에게 당했던 성폭력을, 그것을 어른들에게 말했지만 믿어주지 않았던 일을, 그리고 그 이후로 은정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를.
이야기를 들으면서 은정의 머릿속에서 잊혔던 기억들이 조금씩 떠올랐다. 흐릿했지만 분명히 있었던 일들이었다. 그 여름날의 더위, 빈집의 적막, 사촌 오빠의 무거운 숨소리, 그리고 그 후의 긴 침묵까지.
하지만 이상했다. 그 기억들이 돌아와도 예상만큼 아프지 않았다. 물론 불쾌하고 슬픈 감정이 들었지만, 견딜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거리감이 있었다. 어린 시절의 상처가 시간의 층에 묻혀 둔탁해진 느낌이었다.
상담사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설명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처는 아물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성인이 된 지금의 은정에게는 그 기억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은정은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그 기억이 생각보다 견딜 만하다는 것이 오히려 혼란스러웠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모든 기억을 잃어가면서까지 피하려 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토록 두려웠던 걸까.
그날 밤, 은정은 오랜만에 그 존재의 목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더 간절하고, 조금 불안한 톤이었다.
"왜 그 기억을 되찾으려 해? 나는 네가 편해지길 바랐을 뿐이야."
은정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고마워. 하지만 이제 괜찮아. 그 기억도 나의 일부야. 아픈 것도, 좋은 것도 모두 지금의 나를 만든 거야."
"하지만 넌 그때 너무 아파했어. 매일 밤 울었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어. 나는 그런 너를 보고 있을 수 없었어."
은정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물었다.
"도대체 너는 누구야? 정말로 나를 돕고 싶었던 거야?"
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조금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더 어리고, 두려움에 떠는 목소리였다.
"나는······ 나는 그때의 너야. 열두 살 때의 너. 너무 아파서 사라지고 싶었던 그 아이야."
# 9.
은정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자신 앞에 나타난 그 존재가 다름 아닌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것은 깊은 트라우마로 인해 분리되어 나온 자아의 일부였고, 오랜 시간 동안 '보호'라는 이름 아래 모든 기억을 지워온 존재였다. 어린 시절의 그 자아는 상처받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고통스러운 기억을 봉인하며 살아왔던 것이었다.
"너는 왜 그렇게 했어? 왜 모든 기억을 가져갔어?"
어린 목소리가 떨리며 대답했다.
"아파서······ 너무 아파서······ 그 기억만 지우려고 했는데, 다른 것들도 함께 얽혀 있어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은정은 마음이 아팠다. 그 어린 자신이 얼마나 무서웠을지, 얼마나 외로웠을지 상상이 되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던 그 아이가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려 했던 것이었다. 십몇 년 동안 그 아이가 혼자 견뎌온 시간이 얼마나 길었을까.
"이제 됐어. 이제는 괜찮아. 우리 함께 견뎌보자."
"정말로? 정말로 괜찮을까?"
"그래. 아플 수도 있고, 힘들 수도 있어. 하지만 그것도 우리의 일부야. 도망치지 말고 함께 살아가자."
그 순간 은정은 끈적한 감각을 느꼈다. 마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무언가가 다시 합쳐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차갑고 텅 빈 가슴에 따뜻한 것이 채워지는 것 같았다. 분리되었던 자신의 조각들이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
다음 날 아침, 은정은 이전과 다른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여전히 많은 기억이 사라진 상태였지만,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니, 예전보다 더 온전한 사람 같았다. 상처도 있고 결핍도 있지만, 그것까지 포함해서 자신이었다.
점심시간에 민서에게서 문자가 왔다. 다음 주에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은정은 예전처럼 회피하지 않고 만나자고 답장했다. 비록 함께했던 추억들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퇴근 후에는 집 근처 공원에 갔다. 그 낡은 운동화를 신고 트랙을 천천히 걸어보았다. 뛰지는 않았지만, 걷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SAFE라는 글자가 달린 신발 끈이 보일 때마다, 이제는 정말로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벤치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은정은 생각했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죽음과 같은 것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새로운 시작일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중요한 건 무엇을 잃었느냐가 아니라, 지금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날 밤부터 은정은 새로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으려 하지 않고, 대신 오늘 하루를 기록하기로 했다. 작은 행복들, 새로운 발견들, 때로는 여전한 공허함까지도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적어나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옛 기억들이 돌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집착하지 않았다. 돌아오면 반갑게 맞아주고, 돌아오지 않아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니라 현재였다.
심리상담을 정기적으로 받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트라우마에 대한 치료가 아니라, 현재의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한 상담이었다. 상담사는 은정의 변화에 놀라워했다. 예전보다 훨씬 안정되고 평화로워 보인다고 했다.
어느 날 꿈에서 은정은 다시 그 어린 자신을 만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서워하지 않았다. 대신 그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말해주었다.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고, 함께 살아갈 것이라고.
꿈에서 깨어난 은정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온전한, 상처가 있지만 치유되어 가는 그런 미소였다.
연희구의 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해 스며들었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은정은 침대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거기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얼굴이 있었다.
은정은 새로운 수첩을 펼쳤다. 그리고 첫 페이지에 또박또박 적었다.
"나는 김은정이다. 완전하지 않지만 온전한 사람이다."
잠시 펜을 멈춘 은정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거리에는 출근하는 사람들이 분주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 중에도 혹시 자신과 같은 사람이 있을까. 기억을 잃고, 찾고,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사람이.
은정은 다시 수첩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쓴 문장 아래에 무언가를 더 적고 싶었지만, 무엇을 써야 할지 몰랐다. 대신 펜을 놓고 수첩을 덮었다. 오늘 하루 살아보고 나서 저녁에 다시 쓰면 될 일이었다. 어제와 다른 오늘을, 오늘과 다를 내일을. 그렇게 하루하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