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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통(無痛)

by 은파

실험 참여자의 일상,

심장이 뛰지 않았다.

그건 말 그대로였다.

숫자는 정상인데,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다.


#1.

윤서는 서울대학교 병원 통증 연구소 3층 실험실에서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시간을 보냈다. 벌써 6개월째였다. 선천적 무통증이라는 희귀한 조건을 가진 그는 의학계에서 귀중한 연구 대상이었다. 하얀색 형광등이 내뿜는 차가운 빛 아래에서 윤서의 하루가 또 시작되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각종 센서가 윤서의 몸에 부착되었다. 심전도 전극, 체온 센서, 혈압 측정기, 최신형 통증 측정 장비까지 빠짐없이 연결되었다. 그의 몸은 더 이상 단순한 신체가 아니었다. 이제 윤서는 살아 있는 하나의 정밀한 자료를 수집하는 장치가 되어 있었다.

담당 의사인 박지훈이 클립보드를 들고 들어왔다. 서른다섯 살의 젊은 의사로, 통증 의학 분야에서 떠오르는 연구자였다. 그는 항상 정중했지만, 윤서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과학자의 호기심이 숨어 있었다. 마치 희귀한 표본을 관찰하는 것처럼.

"윤서 씨, 오늘 컨디션은 어떠세요?"

박지훈이 물었다.

"평상시와 같습니다."

윤서가 대답했다. 평상시와 같다는 것은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기쁨도, 슬픔도, 그리고 무엇보다 그 어떤 고통도. 감정의 부재가 일상이 된 지 오래였다.

박지훈이 차트를 확인했다. 윤서의 기본 생체신호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심박수 : 68bpm (정상 범위)

혈압 : 118/76mmHg (정상)

체온 : 36.4°C (정상)

통증 반응 : 0/10 (무반응)

"오늘은 열 자극 실험을 해보겠습니다."

박지훈이 설명했다. 윤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6개월 동안 그는 수백 가지의 자극 실험을 경험했다. 바늘로 찌르기, 전기 자극, 냉온 자극, 압박 자극까지. 모든 것이 그에게는 단순한 물리적 접촉일 뿐이었다.

간호사 김민지가 열 패드를 준비했다. 스물여덟 살의 그녀는 통증 연구소에서 3년째 근무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윤서의 상태를 신기해했지만, 이제는 안타까워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45도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열 패드가 윤서의 팔에 닿았다. 온도계는 45도를 가리켰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뜨겁다고 느끼기 시작하는 온도였다. 하지만 윤서에게는 그저 무언가 물체가 닿았다는 물리적 접촉만 있을 뿐이었다.

"느낌이 어떠세요?"

"잘 모르겠습니다. 뭔가 닿아있다는 것 정도만······"

윤서가 답했다. 그것조차 추론일 뿐이었다. 그는 온도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추측'하고 있었다.

"50도로 올려보겠습니다."

50도는 일반인이라면 불쾌한 열감을 느낄 온도였다. 윤서의 피부가 약간 붉어졌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55도······ 60도······ 65도입니다."

온도가 계속 올라갔다. 윤서의 피부가 점점 더 붉어졌다. 65도는 저온화상을 입을 수 있는 온도였다. 박지훈과 김민지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윤서는 평온했다. 그의 심박수는 여전히 68bpm을 유지했고, 혈압도 변화가 없었다.

뇌파 측정기는 그의 뇌에서 어떤 통증 신호도 감지하지 못했다. 선천적 무통증 환자들도 보통은 극심한 자극에는 어느 정도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윤서는 달랐다. 완전한 무감각의 영역에 있었다.

실험이 끝난 후, 윤서는 회복실에서 쉬었다. 화상 부위에 연고를 발랐지만, 그는 그것을 치료가 아닌 단순한 처치로만 인식했다. 차가운 연고의 감촉도, 시원한 느낌도 전혀 없었다.

그때 옆 침대에서 신음이 들렸다.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인 환자였다. 60대 남성으로, 디스크 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아······ 아파요······"

환자가 신음했다. 윤서는 그 소리를 들으며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정확히는 '감각'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뭔가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윤서는 그 환자를 바라보았다. 환자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고, 호흡은 거칠었다. 주먹을 꽉 쥔 손, 경직된 어깨, 미세하게 떨리는 다리까지. 윤서는 그 모든 것을 정확히 읽을 수 있었다.

이상했다. 자신의 고통은 전혀 느낄 수 없으면서, 타인의 고통은 마치 자신의 것처럼 생생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환자의 통증 지수가 8 정도가 되리라는 것을 윤서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간호사님!"

윤서가 김민지를 불렀다.

"저분이 많이 아파하시는 것 같습니다."

김민지가 환자를 확인했다. 정말로 환자는 심한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녀는 즉시 진통제를 투여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김민지가 윤서에게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냥······ 보이더라고요."

윤서가 애매하게 답했다. 실제로는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더 정확히는 '느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자신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으면서, 타인의 아픔만은 마치 자신의 신경을 타고 흘러오는 것 같았다.

그날 저녁, 윤서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생각했다. 왜 자신의 고통은 느낄 수 없으면서 타인의 고통은 느낄 수 있는 걸까. 그리고 그것이 정말 '느끼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관찰하고 추측하는 것일까.

윤서의 집은 병원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원룸이었다. 연구 참여 수당으로 받는 돈으로는 이 정도가 한계였다. 하지만 윤서에게는 집의 크기나 위치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편안함이나 불편함을 느낄 수 없었으니까.

밤에 잠들기 전, 윤서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침대가 딱딱한지 부드러운지 알 수 없었다. 베개가 높은지 낮은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저 누워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 회복실에서 경험한 일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환자의 고통을 '느꼈던' 순간이 윤서가 6개월 동안 경험한 가장 생생한 감각이었다. 역설적으로 자신의 것이 아닌 타인의 고통을 통해서.

# 2.

다음 날 아침, 윤서는 평소보다 일찍 병원에 도착했다. 연구소는 아직 조용했다. 복도에 간호사들의 발걸음 소리만 희미하게 들릴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실험 기록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어제의 경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박지훈이 9시에 출근했을 때, 윤서는 이미 실험실 한구석에 앉아 있었다.

"어제 회복실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윤서가 말했다. 박지훈이 의자에 앉으며 관심을 보였다.

"어떤 일이요?"

"옆 침대 환자분의 통증을 제가 감지했던 일 말입니다."

박지훈의 눈이 빛났다. 그는 윤서의 이런 현상에 대해 이미 관심이 있었다. 지난 6개월간의 관찰을 통해 윤서에게서 일반적인 무통증 환자와는 다른 패턴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윤서는 어제 겪은 일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환자의 신음을 들었을 때 느껴진 낯선 감각, 그리고 그 고통의 강도를 정확히 짚어낼 수 있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무엇보다 이상했던 건, 그 통증이 마치 자신의 몸에서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는 점이었다.

박지훈이 메모하며 들었다.

"흥미롭군요. 사실 이런 현상에 관한 연구가 있었습니다. 공감각적 통증 인식이라고 하는데······"

"공감각적 통증 인식?"

"자신의 통증은 느끼지 못하지만, 타인의 통증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현상입니다. 매우 드문 경우인데, 윤서 씨에게 나타나는 것 같네요."

박지훈이 컴퓨터를 켰다. 윤서의 지난 6개월간 실험 데이터가 화면에 나타났다.

"보세요. 윤서 씨의 통증 반응은 모든 실험에서 0점이었습니다. 하지만······"

박지훈이 다른 파일을 열었다.

"이것은 윤서 씨가 다른 환자들과 같은 공간에 있었을 때의 뇌파 데이터입니다."

화면에는 복잡한 뇌파 그래프가 나타났다. 놀랍게도 다른 환자들이 고통을 호소할 때마다 윤서의 뇌파에 미세한 변화가 있었다. 특히 전두엽과 측두엽 부위에서 특이한 활동이 감지되었다.

"이게 뭘 의미하는 건가요?"

윤서가 물었다.

"윤서 씨의 뇌는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고통은 처리하지 못하지만, 타인의 고통은 인식할 수 있는 거죠."

박지훈이 설명하면서 흥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제가 어제 느꼈던 것이 진짜였다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윤서 씨는 일종의 인간 통증 감지기인 셈이죠."

박지훈의 말을 들으며 윤서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고통은 느낄 수 없으면서 타인의 고통만 느낄 수 있다니. 그것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알 수 없었다.

"오늘부터 새로운 실험을 해보겠습니다."

박지훈이 말했다.

"윤서 씨가 다른 환자들의 통증을 얼마나 정확히 감지할 수 있는지 측정해 보는 거죠."

오전 10시, 실험이 시작되었다. 윤서는 관찰실에 앉았고, 유리창 너머로 다른 실험실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자원봉사자들이 있었다.

첫 번째 자원봉사자는 20대 여성이었다. 그녀에게 약한 전기 자극이 가해졌다. 윤서는 즉시 느꼈다. 가벼운 따끔함이 마치 자신의 피부를 스치는 것 같았다.

"2점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윤서가 말했다. 실제 측정 결과도 2점이었다.

두 번째는 30대 남성이었다. 압박 자극이 가해졌다. 윤서는 그의 불편함을 느꼈다. 묵직하고 답답한 감각이었다.

"4점입니다."

실험은 계속되었다. 윤서는 모든 경우에 정확히 통증 정도를 맞췄다. 박지훈과 연구팀은 놀라워했다.

"믿을 수 없군요. 100% 정확도입니다."

하지만 윤서에게는 기쁨보다 피로감이 밀려왔다. 타인의 고통을 계속 감지하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었다. 마치 자신이 여러 번 고통받는 것 같았다. 각각의 통증이 겹겹이 쌓이면서 정신적 부담이 가중되었다.

점심시간에 윤서는 김민지와 함께 병원 지하 식당에서 식사했다. 형광등 불빛이 차가웠고, 식판이 부딪치는 소리가 복잡하게 울렸다.

"힘들어 보이세요."

김민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좀 피곤하네요."

"당연하죠.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계속 느끼면 힘들 수밖에 없어요."

김민지의 말에 윤서는 생각했다. 정말로 자신이 그들의 고통을 '느끼고' 있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관찰하고 추측하는 것일까.

"민지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가 정말 그들의 고통을 느끼는 것 같나요?"

김민지가 잠시 생각하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저는 그렇다고 봐요. 실험할 때 윤서 씨 표정을 봤는데, 정말 아파하는 것 같았거든요. 특히 강한 자극이 가해질 때는 윤서 씨도 움찔하시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제 고통은 전혀 느끼지 못해요."

"그게 더 신기한 거죠. 자신의 고통은 차단되어 있으면서 타인의 고통에는 열려있다니."

오후 실험이 재개되었다. 이번에는 더 강한 자극들이었다. 윤서는 점점 더 힘들어졌다. 타인의 고통이 누적되어 가고 있었다.

다섯 번째 자원봉사자였던 40대 남성에게 강한 열 자극이 가해졌을 때, 윤서는 거의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 남성의 고통이 너무 생생하게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마치 자신의 피부가 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8점······ 아니 9점입니다."

윤서가 힘들게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실험을 중단하겠습니다."

박지훈이 말했다. 윤서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괜찮습니다. 계속해도 돼요."

윤서가 말했지만, 박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무리하면 안 됩니다."

실험이 끝난 후, 윤서는 다시 회복실에서 쉬었다. 그는 이상한 피로감을 느꼈다. 신체적 고통은 없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지쳐있었다.

그때 어제와 같은 침대에 새로운 환자가 누워있었다. 30대 남성으로, 갑상샘 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윤서는 그 환자에게서 어떤 고통도 감지할 수 없었다. 윤서는 더 집중해서 그 환자를 관찰했다. 환자는 조용히 누워있었다. 표정도 평온했다. 호흡도 규칙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평온한 것인지, 아니면 진통제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저분은 아프지 않으신가 봐요."

윤서가 김민지에게 말했다.

"아뇨, 수술한 지 2시간밖에 안 됐는데 아플 수밖에 없어요. 아마 진통제가 잘 듣고 있는 거겠죠."

하지만 윤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진통제를 맞은 환자들의 고통도 어느 정도는 감지할 수 있었는데, 이 환자는 달랐다. 마치 고통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윤서는 그 환자를 계속 관찰했다. 뭔가 자신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이 환자도 자신처럼 무통증을 가진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 3.

일주일 후, 윤서는 박지훈으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윤서 씨의 과거 의료 기록을 조사해 봤는데,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박지훈이 컴퓨터 화면을 가리켰다. 윤서의 의료 기록이 표시되어 있었다. 낡은 병원 기록들이 스캔 되어 디지털화된 것들이었다.

"여기 보세요. 윤서 씨는 5살 때까지는 정상적으로 고통을 느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윤서가 놀라며 화면을 자세히 보았다. 정말로 5세 이전의 기록에는 '정상적인 통증 반응', '일반적 감각 발달' 등의 표기가 있었다.

"그럼, 제가 원래는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는 뜻인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가 문제예요."

박지훈이 다른 부분을 가리켰다. 기록의 톤이 확연히 달라지는 지점이 있었다.

"5살 생일 다음 날부터 갑자기 통증 반응이 사라졌다고 되어 있어요. 하지만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습니다."

윤서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실제로는 5살까지는 정상이었다는 것이다.

"저는 기억이 안 나요. 5살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것도 이상한 점입니다. 보통 5살 정도면 기억이 약간이라도 남아있어야 하는데······ 특히 그렇게 큰 변화가 있었다면 더욱 그렇죠."

박지훈이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혹시 윤서 씨 부모님께 연락해 볼 수 있을까요?"

윤서는 고개를 저었다.

"부모님은 제가 10살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그 이후로는 보육원에서 자랐고요."

"그럼, 그때 일을 아는 사람이 없겠네요."

박지훈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날 저녁 윤서는 집에 돌아가서 자신의 옛날 물건들을 뒤져봤다. 보육원에서 나올 때 가져온 몇 안 되는 것들이었다. 작은 상자 속에 어린 시절 사진 몇 장이 있었다. 사진을 보니 정말로 5살 이전의 사진들에서는 평범한 아이의 모습이었다. 웃고 있는 사진도 있었고, 울고 있는 사진도 있었다. 감정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5살 생일 이후의 사진들을 보니 확실히 달랐다. 표정이 무표정하고, 감정이 없어 보였다. 마치 다른 아이가 된 것처럼.

분명히 5살 때 무언가 변화가 일어났음이 틀림없었다.

다음 날, 윤서는 박지훈에게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확실히 변화가 있었네요. 5살 이후로는 표정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박지훈이 사진들을 자세히 관찰했다.

"혹시 그 시기에 큰 충격이나 트라우마가 있었을 수 있어요. 심리적 충격으로 인한 통증 차단 기제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제 무통증이 선천적이 아니라 후천적이라는 뜻인가요?"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뇌의 통증 처리 영역이 심리적 보호 기제로 인해 차단되었을 수도 있어요."

윤서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선천적 무통증 환자라고 생각해 왔는데, 실제로는 5살 때 잃어버린 능력이었다는 것이다.

그날 오후, 윤서는 회복실에서 또 그 수술 환자를 만났다. 갑상샘 수술을 받은 30대 남성이었다.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그에게서는 어떤 고통도 감지되지 않았다.

윤서는 그 환자에게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봤다.

"안녕하세요. 저는 윤서라고 합니다."

환자가 고개를 돌려 윤서를 보았다. 그의 눈은 차갑고 무표정했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환자가 답했다. 목소리도 감정이 없었다.

"수술 부위는 괜찮으세요? 아프지 않으신가요?"

"아픔이 뭔지 잘 모르겠어요."

환자의 대답에 윤서는 깜짝 놀랐다. 마치 자신의 말을 듣는 것 같았다.

"혹시······ 고통을 느끼지 못하시는 건가요?"

환자가 윤서를 자세히 보았다. 처음으로 그의 눈에 미세한 관심이 스쳤다.

"당신도 그런가요?"

윤서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니, 정확히는 두근거림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뭔가 변화가 있었다.

"네, 저도 고통을 느끼지 못해요."

"신기하네요. 저와 같은 사람을 만날 줄은 몰랐어요."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윤서는 그 남자에게서 묘한 친밀감을 느꼈다.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실례지만, 언제부터 그러셨나요?"

윤서가 물었다.

"글쎄요····· 기억이 나지 않아요. 아주 어릴 때부터였던 것 같은데."

남자의 대답이 모호했다. 그의 눈빛이 어딘가 멀리 있는 것 같았다. 윤서는 더 구체적으로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때 김민지가 와서 환자를 다른 병실로 옮겨야 한다고 했다.

"다음에 또 뵐 수 있을까요?"

윤서가 물었다.

"아마도요."

남자가 애매하게 답하며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그날 밤, 윤서는 잠들 수 없었다. 그 남자에 관한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뭔가 중요한 단서가 있는 것 같았지만,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윤서는 자신의 5살 이전 기억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그 시기의 기억이 완전히 지워진 것 같았다. 아니, 지워진 것이 아니라 봉인된 것 같았다.

다음 날, 윤서는 박지훈에게 어제 만난 환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흥미롭네요. 그 환자분의 의료 기록을 확인해 볼까요?"

박지훈이 컴퓨터를 검색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환자의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이상하네요. 어제 분명히 갑상샘 수술을 받은 환자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런 환자의 기록이 없어요."

"그래요? 뭔가 잘못된 것 아닌가요?"

"컴퓨터 시스템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고······ 참 이상한 일이네요."

박지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윤서는 확신했다. 분명히 그 남자를 봤고, 대화도 나눴다. 그리고 그에게서 자신과 같은 무언가를 느꼈다. 그 만남이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5살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왜 자신의 통증 감각이 사라졌는지에 대한 단서가 그 남자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 4.

며칠 후, 윤서는 다시 그 남자를 만났다. 이번에는 병원 1층 로비에서였다. 대리석 바닥이 차갑게 빛나는 넓은 공간에서 그 남자가 혼자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윤서가 먼저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남자가 답했다. 하지만 처음 보는 사람처럼 무덤덤한 반응이었다.

"지난번에 뵈었는데, 기억나시나요?"

윤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잘 기억이 안 나네요."

남자의 대답에 윤서는 당황했다. 분명히 기억할 만한 대화를 나눴는데,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갑상샘 수술 받으셨다고 하셨잖아요."

"갑상샘 수술이요? 저는 그런 수술을 받은 적이 없는데요."

윤서는 혼란스러웠다. 분명히 며칠 전에 만난 사람이 맞는데,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행동했다.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저는······ 저는······"

그 남자가 말을 멈췄다. 마치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기억이 안 나네요. 이상하게도."

그 순간 윤서는 소름이 돋았다. 그 남자의 상황은 윤서 자신의 상태와 놀라울 만큼 닮아있었다.

"혹시 어릴 때 기억이 나나요?"

윤서가 물었다.

"아니요. 5살 이후로는 기억이 없어요."

윤서의 심장이 뛰었다. 정확히 자신과 같은 상황이었다.

"저도 그래요. 5살 이후 기억이 없어요."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로비의 웅성거림 속에서도 이상한 정적이 그들을 둘러쌌다. 그 순간, 윤서의 마음속에 설명할 수 없는 확신이 스며들었다. 눈앞의 이 남자는 우연히 마주친 낯선 존재가 아니었다.

"제가 의사 선생님께 물어볼 게 있어요. 같이 가실래요?"

윤서가 제안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3층 통증 연구소에 도착해서 박지훈을 만났다.

"이분이 제가 말씀드린 그 환자분입니다."

윤서가 소개했다. 박지훈이 남자를 자세히 보았다.

"안녕하세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기억이······ 나지 않아요."

남자가 답했다.

"그러면 언제부터 여기 계셨나요?"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박지훈이 윤서를 따로 불러서 말했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이분의 기록이 병원 어디에도 없어요. 입원 기록도, 외래 기록도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병원에 계신 거죠?"

"그것도 알 수 없어요. 마치 갑자기 나타난 것 같아요."

윤서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동시에 그 남자와 자신 사이의 연결고리를 느꼈다.

"선생님, 혹시 이분도 검사를 받아볼 수 있을까요?"

박지훈이 동의했다. 남자도 거부하지 않았다.

검사 결과는 놀라웠다. 그 남자의 모든 수치는 윤서와 거의 일치했다. 통증에 대한 반응은 0점으로 측정되었고, 생체신호는 이상 없이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높은 민감성을 보였다.

"믿을 수 없네요. 두 분이 거의 동일한 패턴을 보여요."

박지훈이 말했다.

"더 신기한 것은 뇌파 패턴도 비슷하다는 점입니다."

윤서와 그 남자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혹시 형제분이신가요?"

박지훈이 물었다.

"아니요, 저는 외동아들이에요."

윤서가 답했다.

"저도 그런 것 같아요."

그 남자도 말했다.

그날 오후, 윤서는 그 남자와 함께 병원 옥상에 올라갔다.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곳이었다. 늦은 오후 햇살이 건물들 사이로 기울어져 들어왔다.

"이상해요."

남자가 말했다.

"뭐가요?"

"당신을 보고 있으면 마치 저 자신을 보는 것 같아요."

윤서도 같은 느낌이었다.

"저도 그래요. 처음 봤는데 낯설지 않아요."

두 사람은 침묵했다. 바람이 불어왔지만, 둘 다 그 시원함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서로의 존재만큼은 생생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혹시 우리가 같은 사람은 아닐까요?"

남자가 갑자기 말했다.

"무슨 뜻이에요?"

"잘 모르겠어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드네요."

윤서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 사실 자신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윤서가 말을 시작했지만 끝맺지 못했다. 너무 비현실적인 생각이었다. 그때 윤서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박지훈에게서 온 문자였다.

"긴급히 내려오세요. 중요한 발견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서둘러 연구소로 내려갔다. 박지훈이 흥분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윤서 씨, 그리고······ 음, 이름을 뭐라고 부를까요?"

박지훈이 남자에게 물었다.

"그냥······ 제2의 윤서라고 부르시죠."

남자가 답했다.

"좋습니다. 제2의 윤서 씨. 두 분의 DNA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박지훈이 말을 멈추고 심호흡했다.

"두 분은 유전적으로 동일한 사람입니다."

실험실이 조용해졌다. 윤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말 그대로입니다. 두 분의 DNA는 완전히 일치해요. 쌍둥이도 이 정도로 일치하지는 않아요."

윤서는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보았다. 그 남자도 윤서를 보고 있었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윤서는 뭔가 깨닫기 시작했다. 이 남자는 단순히 비슷한 환자가 아니었다. 뭔가 더 근본적인 연결이 있었다.


# 5.

검사지 위의 숫자들은 감추지 않고 진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박지훈의 손가락이 떨리며 화면을 따라 움직였다. 뇌파 패턴은 99.97% 일치했고, DNA는 완벽하게 동일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정보가 있었다. 윤서에게는 다섯 살 이후의 기억이 형성되지 않은 채, 시간이 멈춘 상태로 남아있었다. 윤서는 그 결과를 바라보며, 자신이라는 존재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들렸다고 믿었다’. 그 소리는 무너짐이 아니라, 잊힌 감정이 다시 깨어나는 듯한 조용한 진동에 가까웠다.

같은 키, 같은 얼굴, 같은 무표정을 한 제2의 윤서가 거기 서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 속에는 윤서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이 담겨 있었다—끝없는 고통의 심연이었다. 그것은 공허가 아니었다. 너무 많은 것으로 가득 찬,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충만함이었다. 마치 27년간의 모든 아픔이 한 사람의 몸에 응축된 것 같았다.

실험실의 형광등이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측정기의 수치들은 변함없이 정상을 가리켰다. 심박수 68, 혈압 118/76, 체온 36.4도. 하지만 숫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윤서의 가슴 깊은 곳, 27년 동안 얼어붙어 있던 무언가가 천천히 녹기 시작했다. 그것은 고통이었다. 아니, 고통보다 더 근본적인 것—감정 그 자체였다.

제2의 윤서가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게에 짓눌린 것처럼 바닥에 주저앉으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 소리는 단순한 고통의 표현이 아니었다. 그것은 27년간 억압된 모든 울음의 집약체였다. 유년의 공포, 사춘기의 외로움, 청춘의 절망,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된 공허함의 총합이었다.

그 순간 윤서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터졌다. 기억이 아니었다. 기억을 넘어선 것, 세포 하나하나에 새겨진 원초적 경험이 되살아났다. 5살 생일 다음 날 밤, 아버지의 큰 손이 공중에서 멈춰 서 있었다. 그 손은 너무 커 보였고, 너무 무서웠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설거지하고 있었다.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아이의 울음을 덮고 있었다.

윤서와 제2의 윤서가 동시에 말하기 시작했다. 같은 기억을, 나누어진 목소리로. "아파요." "너무 아파요." "엄마, 도와주세요." "제발 그만해 주세요." 두 목소리가 겹치고 엇갈리며 하나의 기억을 직조해 갔다. 그것은 대화가 아니었다. 한 영혼이 두 조각으로 찢어져서 각자의 고통을 토해내는 과정이었다.

그때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다섯 살 아이는 차라리 아픔을 느끼지 않기로 결심했다. 정확히는 아픔을 느끼는 부분을 자신에게서 떼어내기로 했다.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그 조각을 숨겨두고, 다시는 꺼내지 않기로 했다. 그 조각이 바로 눈앞에 서 있는 제2의 윤서였다. 그는 윤서가 버린 감정의 보관함이었고, 27년 동안 혼자서 모든 고통을 숨겨온 그림자였다.

실험실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측정기들은 여전히 0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윤서는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감지하기 시작했다. 가슴 한가운데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것은 물리적 열기가 아니었다. 더 근본적인 것, 생명 그 자체의 온도였다. 27년간 꺼져 있던 감정의 불꽃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제2의 윤서의 몸이 점점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존재 의미가 다했음을 알고 있었다. 27년간 숨겨왔던 감정이 이제 본래 주인에게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윤서가 한 번도 지어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해방의 미소였다.

그때 윤서의 몸에 폭발이 일어났다. 물리적 폭발이 아니라 감정의 빅뱅이었다. 27년간 억눌려 있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 부모를 잃었을 때의 절망, 보육원에서의 외로움, 첫사랑의 설렘, 이별의 아픔, 성공의 기쁨, 실패의 좌절감까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5살 때 느꼈던 그 원초적 공포와 고통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윤서에게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비명도 울음도 아니었다. 그것은 탄생의 소리였다. 진정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의 울부짖음이었다. 측정기는 여전히 0을 가리켰지만, 윤서는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터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아픔을 넘어서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숫자로서의 68bpm이 아니라, 진짜 심장의 고동이었다. 뜨겁고 붉은 피가 혈관을 따라 흐르는 것을 느꼈다. 산소가 폐로 들어오고, 이산화탄소가 나가는 것을 인식했다. 체온이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을, 근육이 수축하고 이완하는 것을, 신경이 신호를 전달하는 것을 모두 느꼈다. 그는 비로소 자기 몸의 주인이 되었다.

제2의 윤서가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27년간 미뤄둔 숙제를 해치워야 해요. 아프겠지만, 그것이 살아있다는 증거예요." 그의 목소리는 바람처럼 희미했지만, 윤서의 가슴 깊이 울려 퍼졌다.

윤서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울었다. 눈물이 뜨겁고 짰다. 그 맛이 삶의 맛이었다. 박지훈과 김민지가 다가왔지만, 그들의 존재는 멀고 흐릿했다. 윤서는 오직 내면에서 일어나는 혁명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미지의 대륙을 탐험하는 것 같았다.

고통과 기쁨이 한 덩어리가 되어 그의 몸을 관통했다. 슬픔과 환희가 구별되지 않았다. 절망과 희망이 하나의 뿌리에서 자라난 쌍둥이 나무 같았다. 윤서는 깨달았다. 인간의 감정은 각각 떨어져 있는 조각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하나의 거대한 스펙트럼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스펙트럼 중 일부를 차단하면, 결국 전체 감각이 흐려지고 무뎌진다는 것도 이해하게 되었다. 슬픔을 막으면 기쁨도 흐려지고, 고통을 억누르면 온기마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처음으로 받아들였다.

천천히 일어서자,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실험실의 형광등이 여전히 차가웠지만, 이제 그 차가움마저 하나의 의미였다. 측정기의 숫자들이 여전히 0을 가리켰지만, 그 0은 이제 무(無)가 아니라 무한(∞)의 다른 표현이었다. 측정할 수 없는 것들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역설을 깨달았다.

연구소를 나서며 윤서는 뒤돌아보았다. 6개월간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만 보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감사했다. 이곳에서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았으니까. 자동문이 열리고 바깥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윤서는 그 바람의 온도를, 습도를, 방향을 느꼈다. 바람 속에 섞인 꽃향기와 자동차 매연까지도 하나의 정보로 받아들였다.

집으로 향하는 길은 이전과 전혀 달랐다. 발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아스팔트의 거친 질감, 신발 밑창이 바닥과 맞부딪힐 때 나는 미세한 마찰음, 가로등 불빛 아래 움직이는 그림자의 규칙 없는 흐름까지—모든 것이 하나의 감각으로 엮여 몸을 통과했고, 윤서는 그 순간 세상이 소리 없이 연주하는 교향곡을 처음으로 들을 수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각자의 기쁨과 슬픔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예전의 기계적 관찰이 아니라 진정한 공감이었다.

그날 밤, 윤서는 침대에 누우며 천천히 침구의 감촉을 느꼈다. 시트의 부드러운 결이 피부를 따라 흐르고, 베개는 머리를 단단히 받쳐주었으며, 이불은 적당한 무게로 몸을 감쌌다. 그 모든 감각이 낯설 만큼 생생하게 다가왔고, 그는 처음으로 잠드는 순간조차도 자신이 살아 있음을 실감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것은 고독의 감촉이었다. 혼자라는 것이 더 이상 공허함이 아니라 온전함으로 느껴졌다.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이 편안하고 자연스러웠다.

천장을 바라보며 윤서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고통과 즐거움은 단순히 반대편에 놓인 감정이 아니라, 같은 금속에서 태어난 하나의 실체라는 것을 떠올렸다. 빛과 그림자가 서로를 정의하듯, 아픔과 기쁨도 서로 없이는 온전히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속에 또렷이 자리했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 모순된 감정들을 동시에 품고 살아가는, 복잡하면서도 완전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가을이 깊어진 어느 날, 윤서는 다시 병원을 찾았다. 이번에는 치료를 받기 위한 환자가 아니라, 누군가를 바라보는 방문자로서였다. 회복실 한쪽에는 새로운 환자가 조용히 누워 있었다. 척추 수술을 막 마친 중년 남성이었고, 그의 입가에서는 작고 끊긴 신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소리는 고통이라기보다, 존재를 증명하려는 미약한 숨결처럼 들렸다. 윤서는 그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윤서는 그의 곁에 앉았다. 예전이었다면 그의 고통을 정확한 수치로 측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의 아픔을 자신의 가슴으로 받아들였다. 공감이라는 이름의 다리를 건너 그의 마음에 닿았다. 측정이 아닌 나눔이었다.

환자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생명이 흐르고 있었다. 윤서의 손도 따뜻했다. 두 온기가 만나 더 큰 따뜻함이 되었다. 환자의 얼굴이 조금 편안해졌다. 고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창밖으로 가을 하늘이 보였다. 구름이 천천히 움직이고,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렸다. 낙엽이 하나씩 떨어지는 것도 보였다. 윤서는 미소 지었다. 진짜 미소였다. 입꼬리만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미소였다. 아프고 불완전한 세상이 그래서 더 아름다웠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완전한 세상이었다.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윤서는 병원을 나서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노을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 붉은빛이 가슴에 닿았다. 따뜻하고 아름다웠다. 내일도 해는 어김없이 떠오를 것이다. 윤서 역시 그 빛과 함께 또 하나의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어느 장치로도 측정할 수 없는 행복을 안고, 숫자로는 환산할 수 없는 완전함을 품은 채로.

심박수 : 72bpm (정상)

혈압 : 120/80mmHg (정상)

체온 : 36.6도 (정상)

통증 지수 : 무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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