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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by 은파

# 1.

그 모든 일의 시작은 하나의 벚꽃잎이었다. 4월의 어느 화요일 오후, 태민이 사무실 12층 창가에서 점심을 먹으며 바라본 그 한 장의 꽃잎 말이다.

사무실 공기는 무겁고 답답했다. 에어컨은 아직 가동되지 않았고, 형광등이 내뿜는 희멀건 빛이 사무용품들을 창백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태민은 편의점에서 산 삼각김밥을 씹으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12층에서 내려다보이는 거리는 개미집처럼 복잡했다. 사람들이 성급하게 걸어가고, 택시들이 클랙슨을 울려대며 끼어들려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 분홍빛 꽃잎 하나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벚나무 가지에서 막 떨어져 나온 그 꽃잎이 나뭇가지에서 아스팔트에 닿기까지, 그 짧은 순간이 마치 영원의 시간처럼 길게 늘어나는 것을 느꼈다. 중력의 법칙을 거슬러 공중에서 춤을 추듯 천천히, 너무나 천천히 떨어지는 꽃잎을 바라보며 태민은 자신의 심장박동이 비정상적으로 느려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평소보다 훨씬 긴 간격으로 심장이 뛰는 것 같았다.

그때 시계를 보았다. 사무실 벽에 걸린 시계의 빨간 숫자들이 뚜렷하게 보였다. 오후 1시 23분 15초, 초침이 16초를 가리키는 순간까지 지켜본 후 다시 창밖을 돌아보니 꽃잎은 이미 땅에 떨어져 있었다. 고작 1초 만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태민에게는 마치 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시간 감각에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야근이 잦아지면서 피로가 누적된 탓이겠거니 하며 넘어갔다. 지난 한 달간 거의 매일 밤 10시까지 사무실에 있었고, 주말에도 한 번은 나왔었다. 몸이 지쳐서 감각이 둔해진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상한 현상은 그날 오후 내내 계속되었다.

동료 민수와 나눈 대화가 그 첫 번째 징후였다. 민수가 다가와서 프로젝트에 관해 이야기했다.

"태민아, 어제 회의에서 나온 그 아이디어 말인데."

민수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느리게 들렸다. 마치 녹음테이프를 저속으로 재생하는 것 같았다. 태민은 민수의 입 모양을 보며 집중했다.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고, 말과 말 사이의 간격이 길었다.

"어떤······ 아이디어?"

태민도 자신의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너무 빨리 말하는 것 같았다.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그 디자인 콘셉트 말이야."

민수와의 대화는 5분간 계속되었다. 하지만 태민에게는 마치 30분처럼 느껴졌다. 민수가 말할 때마다 그의 입술이 느린 동작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고, 자신이 대답할 때는 말이 총알처럼 빨리 나가는 느낌이었다.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났다. 복도를 걸어가면서 마음속으로 세어본 시간은 분명히 2분 정도였다. 하지만 자리에 돌아와서 컴퓨터 화면을 보니 고작 2초밖에 지나지 않았었다. 컴퓨터 화면 속 시계를 자꾸만 확인하게 되었지만, 그때마다 자신이 예상한 시간과 실제 시간 사이의 괴리만 확인할 뿐이었다.

오후 내내 태민은 마음이 불안했다.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떨렸고, 목구멍이 계속 말라갔다. 물을 마셔도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동료들의 대화 소리가 멀게 들렸다 가깝게 들리기를 반복했다.

퇴근 후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도 이상한 감각은 계속되었다. 2호선 강남역에서 집까지는 평소 25분이 걸리는 거리였다. 태민은 항상 이 시간을 이용해서 문고본 소설을 읽곤 했다. 하지만 그날은 좌석에 앉아 책을 펼쳤을 때부터 뭔가 달랐다.

지하철의 덜컹거리는 소리가 평소보다 희미하게 들렸다. 주변 승객들의 웅성거림도 마치 물속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태민은 소설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다. 글자들이 선명하게 보였지만, 문장들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두 페이지를 읽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종점이었다.

분명히 한두 페이지밖에 읽지 않았는데 25분이 지나간 것이었다. 태민은 당황해서 지하철 안의 전광판을 확인했다. 7시 42분. 하지만 그에게는 기껏해야 5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책을 다시 보니 7페이지나 넘겨져 있었다. 언제 이렇게 많이 읽었을까?

집에 도착한 후 태민은 손을 씻으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평소보다 창백해 보였다. 눈 밑에는 검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인터넷에서 '시간 감각 이상'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모니터의 파란 빛이 어둠 속에서 유독 밝게 느껴졌다.

우울증, 불안장애, 주의력결핍장애 등과 관련된 증상이라는 설명들이 나왔지만, 자신의 경우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찾을 수 없었다. 대부분은 시간이 느리게 가거나 빠르게 가는 증상에 대한 것이었는데, 태민의 경우는 상황에 따라 시간이 늘어났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하는 양 방향적인 혼란이었다. 마치 고장이 난 시계처럼 불규칙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면서 태민은 혹시 내일 아침이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깊게 숨을 쉬었다. 아파트 밖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 위층에서 걸어 다니는 발걸음 소리, 옆집에서 새어 나오는 TV 소리가 평소보다 또렷하게 들렸다.

하지만 이튿날 아침 알람 시계가 울렸을 때, 그 소리가 마치 느린 영화의 배경음악처럼 늘어져서 들렸다. 평소 같으면 '띠리리리링' 하고 명쾌하게 들리던 알람 소리가 '띠이이이이리이이이이리리리이이이링' 하고 기괴하게 변형되어 들렸다. 태민은 벌떡 일어나 알람을 껐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양치하는 동안에도 이상한 일들이 계속 일어났다. 칫솔질을 시작하면서 마음속으로 세어본 시간으로는 30초 정도 지났을 것 같았다. 하지만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13분이 지나 있었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태민은 공포를 느꼈다. 거울 속의 자신이 낯설어 보였다. 이것은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히 무언가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태민은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지하철이 한 역을 지날 때마다 자신이 예상하는 시간과 실제 시간을 비교해 보는 것이었다. 핸드폰의 스톱워치 기능을 켜고 시간을 재어보기로 했다.

첫 번째 구간에서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2분 정도 걸렸는데 실제로는 7분이 걸렸다. 두 번째 구간에서는 10분 정도 걸렸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3분이었다. 규칙성을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이 마치 고장이 난 엘리베이터처럼 예측할 수 없이 빨라졌다가 느려지기를 반복했다.

사무실에 도착한 태민은 평소보다 30분 늦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평소보다 30분 일찍 온 것 같았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집중되었다. 시계를 보고 또 보고 또 보았지만,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오후 9시 30분…… 분명히 9시 출근이었는데 30분이나 늦은 것이었다. 부장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김 부장은 평소에도 지각에 대해 엄격했는데, 오늘은 특히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태민 씨, 무슨 일 있어요?"

"죄송합니다. 지하철이 조금……"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시간 감각에 이상이 생겼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말을 했다가는 정신과 상담을 권유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하루 종일 태민은 시계와 씨름했다. 5분마다 시계를 확인하면서 자신의 시간 감각을 교정하려고 노력했다. 컴퓨터 화면 오른쪽 아래 시계, 핸드폰 시계, 벽에 걸린 시계를 번갈아 확인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혼란만 가중되었다. 시계를 보는 행위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었고, 스트레스가 쌓일수록 시간 감각은 더욱 왜곡되었다. 악순환이었다.

점심시간에는 동료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지만, 대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몇 분이 지났을까? 몇 시에 들어가야 할까? 늦지 않으려면 언제 일어나야 할까?

동료들의 목소리가 마치 라디오 주파수가 맞지 않을 때처럼 웅성웅성하게 들렸다. 민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고, 대답해야 할 때는 이미 화제가 다른 곳으로 넘어가 있었다.

저녁에 집에 돌아온 태민은 하루의 시간 기록을 노트에 정리해 보았다. 자신이 예상한 시간과 실제 시간의 차이를 그래프로 그려보니 기괴한 모양이 나왔다. 위아래로 격렬하게 진동하는 파형 같았다. 어떤 순간은 실제 시간의 5배로 느리게 흘렀고, 어떤 순간은 실제 시간의 10분의 1로 빠르게 흘렀다. 패턴을 찾으려고 애써봤지만 무의미했다. 시간은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멋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불안감은 커졌다. 내일도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어떻게 될까? 회사에서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사람들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아파트 밖에서 들려오는 소음들이 평소보다 크게 들렸다. 자동차 소리, 강아지 짖는 소리, 누군가 문을 여닫는 소리까지 모든 것이 신경에 거슬렸다.

태민은 처음으로 자신이 정신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른 모든 것은 정상이었다. 기억력도 멀쩡하고, 판단력도 흐려지지 않았고, 환각이나 망상도 없었다. 오직 시간 감각만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마치 자신만의 시간 속에 갇힌 것 같았다.

# 2.

다음날부터 태민은 체계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기로 했다. 공학도 출신인 그는 모든 문제에는 해결책이 있다고 믿었다. 시간 감각 장애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생각했다. 올바른 방법론만 찾으면 분명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었다.

첫 번째 시도는 정확한 자료수집이었다. 태민은 스마트폰에 '시간 기록' 앱을 설치하고, 하루 종일 자신의 시간 추정 능력을 측정하기로 했다. 30분마다 알람이 울리면 "지금까지 몇 분이 지났다고 생각하는지" 기록하고, 실제 시간과 비교하는 방식이었다. 일주일간의 데이터를 모으면 패턴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첫날부터 문제가 되었다. 30분마다 울리는 알람이 오히려 시간에 대한 강박을 키웠다. 알람이 울릴 때마다 "아, 또 틀렸구나" 하는 좌절감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알람을 기다리는 동안에는 시간에만 신경이 쓰여서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3일 만에 이 방법을 포기했다.

두 번째 시도는 외부 신호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시계를 믿을 수 없다면 다른 시간 신호들을 활용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태민은 라디오를 켜두고 정시 뉴스를 시간 확인용으로 사용했다. 또한 지하철역의 전광판, 버스정류장의 도착 시간 안내, 건물 엘리베이터의 시간 표시 등을 수시로 확인하며 자신의 시간 감각을 교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방법도 곧 한계를 드러냈다. 외부 시간 신호들이 오히려 혼란을 불러왔다. 각각의 시계가 조금씩 다른 시간을 보여줄 때가 있었고, 태민은 어느 것이 정확한지 알 수 없어 더욱 불안해했다. 게다가 하루 종일 시간만 신경 쓰며 살다 보니 일상생활의 질이 현저히 떨어졌다. 동료들과의 대화도, 업무에 대한 집중도 모두 시간 확인에 밀려났다.

세 번째 시도는 생체 리듬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태민은 의학 서적을 뒤져가며 인간의 자연스러운 시간 감각에 관해 연구했다. 심장박동, 호흡, 체온 변화, 혈압 변동 등의 생체신호는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있으니, 이것들을 시간 측정의 기준으로 삼아보자는 아이디어였다.

몇 주간 자신의 생체 리듬을 관찰한 결과, 태민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심장박동이 빨라지면서 시간이 느리게 느껴졌고, 편안한 상태일 때는 심장박동이 느려지면서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즉, 그의 시간 감각은 감정 상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 발견에 고무된 태민은 스트레스 관리와 감정 조절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명상, 요가, 심호흡 등을 배워서 정신적 평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실제로 이런 방법들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마음이 평온할 때는 시간 감각의 왜곡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현실은 항상 평온할 수만은 없었다. 직장에서의 업무 스트레스, 인간관계의 갈등,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문제들이 그의 정신적 평정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시간 감각은 다시 엉망이 되었다. 시간 감각 장애는 단순히 기술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존재 방식 전체와 관련된 문제였다.

네 번째 시도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었다. 태민은 용기를 내어 신경과를 찾아갔다. 의사는 그의 증상을 듣고 여러 가지 검사를 권했다. 뇌 MRI, 뇌파 검사, 혈액 검사, 심리 검사 등을 받았지만 특별한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검사 결과상으로는 정상입니다. 시간 감각 장애는 매우 드문 증상이라서 명확한 원인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요. 스트레스나 우울증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고, 뇌의 미세한 기능 장애일 수도 있습니다."

의사는 항불안제와 가벼운 안정제를 처방해 주었다. 약을 먹기 시작한 지 일주일 후, 태민은 약간 개선되었음을 느꼈다. 시간 감각의 극단적인 왜곡은 조금 줄어들었다. 하지만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여전히 시간은 들쭉날쭉하게 흘렀다.

약물 치료와 함께 태민은 인지행동치료도 받기 시작했다. 치료사는 그에게 시간에 대한 강박적 사고를 줄이고, 현재 순간에 집중하는 법을 가르쳤다. 명상, 점진적 근육 이완법, 인지 재구성 기법 등을 배웠다.

이런 치료들은 분명히 도움이 되었다. 시간에 대한 불안감은 줄어들었고, 일상생활의 기능도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태민의 시간은 여전히 세상의 시간과 달랐다. 치료를 통해 그는 이 차이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을 뿐, 차이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몇 달간의 치료 과정에서 태민은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시간 감각 장애를 '고쳐야 할 병'으로 보는 관점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것이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이라면? 남들과는 다른 시간을 사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들이 있었다. 직장 생활을 완전히 정상적으로 할 수는 없었고, 사람들과의 약속을 지키기도 여전히 어려웠다. 사회는 표준화된 시간을 기준으로 돌아갔고, 그 안에서 태민은 계속해서 부적응자였다. 무언가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 변화가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 3.

문제가 절정에 달한 것은 그해 여름이었다. 태민이 맡고 있던 중요한 프로젝트의 최종 발표일이었다. 6개월간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일이었고, 회사 전체가 주목하는 프레젠테이션이었다. 태민은 이번만큼은 절대 실수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발표는 오후 2시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태민은 만약을 위해 오전 10시부터 회의실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4시간의 여유를 두면 아무리 시간 감각이 엉망이라고 해도 놓칠 리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오전 10시, 태민은 회의실에 들어가 노트북을 준비하고 발표 자료를 점검했다. 슬라이드를 하나하나 확인하고, 발표 원고를 소리 내어 읽어보고,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도 준비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시간도 여유로웠다.

하지만 그때부터 이상한 일이 시작되었다. 시간이 마치 끈적한 타르 속에 갇힌 것처럼 느려지기 시작했다. 태민이 시계를 보니 10시 15분이었다. 분명히 한 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고작 15분밖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당황한 태민은 다시 발표 연습을 시작했다. 하지만 자신의 목소리마저 느려진 것처럼 들렸다.

11시가 되어서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졌다.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졌다. 초침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태민에게는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흘러가는 것 같았다. 그는 회의실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했다. 커피를 마시며 동료들과 대화도 나누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슬로우모션 영화를 보는 것만 같았다.

정오가 되었을 때, 태민은 거의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런 속도로는 2시까지 기다리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남은 2시간이 20시간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그는 건물 밖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로 했다.

점심시간이라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태민은 근처 공원에서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이 그의 긴장을 어느 정도 풀어주었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공원에 있는 동안 시간 감각이 조금 나아진 것 같았다. 자연의 리듬에 몸을 맡기니 인위적인 시간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태민은 20분 정도 공원에서 시간을 보낸 후 회사로 돌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회사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태민의 세상이 무너졌다. 로비의 대형 전광판이 오후 3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발표 시간을 1시간 30분이나 넘긴 것이었다. 태민은 믿을 수 없어서 여러 시계를 확인해 봤다. 엘리베이터 안의 시계, 복도의 벽시계, 자신의 핸드폰 시계까지 모든 시계가 같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급하게 회의실로 뛰어갔지만, 발표는 끝났고 참석자들은 모두 떠난 후였다. 회의실에는 부장 혼자 남아있었다. 그의 표정은 차가웠다.

"태민 씨, 어디 있었습니까? 6개월간 준비한 중요한 발표를 완전히 망쳐버렸잖아요."

태민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20분 정도 공원에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3시간이 지났을까? 그는 시간 속에서 완전히 길을 잃었다.

"죄송합니다. 몸이 갑자기 아파서……"

변명은 초라했다. 부장은 더 이상 듣고 싶어 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그날 밤 태민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6개월간의 노력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었다. 더 심각한 것은 이제 회사에서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는 것이었다. 동료들은 그를 무책임한 사람으로 볼 것이고, 상사들은 그의 업무 능력을 의심할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태민은 부장과의 면담에서 사실을 털어놓기로 했다. 더 이상 숨길 수도 없고, 숨긴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제 시간 감각에 문제가 있습니다. 병원에도 다니고 있어요. 어제는 20분 정도 밖에 나가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3시간이 지나 있었어요."

부장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간 감각에 문제가 있다고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태민은 자신의 증상을 자세히 설명했다. 의사의 진단서도 보여주었다. 하지만 부장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졌다.

"태민 씨, 어떤 이유든 업무에 지장을 주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특히 어제 같은 일은 회사에 큰 손실을 끼쳤어요. 치료를 받으면서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요?"

태민은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일단 휴직하시는 게 어떨까요? 치료에 전념하시고, 완전히 회복되면 그때 복직을 논의해 봅시다."

태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이 회사에서 일을 계속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사무용품을 정리하며 태민은 6년간의 직장 생활을 되돌아봤다.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직원이라는 평가를 받아왔었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이 무너졌다. 시간 감각 하나 때문에.

그를 바라보는 동료들의 시선이 복잡했다. 동정과 의아함이 섞인 표정들이었다. 누군가 "시간 감각 장애라는 게 정말 있나?"하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집에 돌아온 태민은 처음으로 절망감을 느꼈다. 시간 감각 장애는 단순한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회적 존재로서 그의 기반을 흔드는 문제였다. 시간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사회에서, 시간 감각을 잃은 그는 더 이상 정상적인 구성원이 될 수 없었다.

# 4.

직장을 떠난 후 한동안 태민은 방에 틀어박혀 지냈다. 어디를 가든 시계가 있었고, 시계를 볼 때마다 자신의 무능함을 확인하게 되었다. 차라리 시계가 없는 곳에서 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집 안의 모든 시계를 치워버렸다. 벽시계, 탁상시계, 알람 시계, 심지어 전자레인지와 냉장고의 시계 표시도 테이프로 가렸다.

시계가 없으니, 시간에 대한 스트레스는 줄어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언제 밥을 먹어야 할지, 언제 잠을 자야 할지, 언제 일어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처음 며칠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점차 몸의 신호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었다. 졸리면 잠을 잤다. 눈이 떠지면 일어났다. 처음에는 이런 생활 방식이 엉망이었다. 새벽 3시에 배가 고파서 라면을 끓여 먹기도 하고, 오후 2시에 갑자기 졸려서 4시간을 자기도 했다. 하지만 일주일 정도 지나자, 몸이 어느 정도 리듬을 찾아갔다.

신기한 것은 시계 없이 살면서 오히려 시간 감각이 조금씩 안정되어 간다는 것이었다. 시계의 숫자에 얽매이지 않으니, 자신만의 시간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아침 햇살의 각도로 시간을 짐작하고, 새들의 지저귐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저녁노을의 색깔로 하루의 끝을 감지했다.

어느 날 태민은 용기를 내어 근처 병원을 찾아갔다. 이번에는 신경과가 아닌 정신건강의학과였다. 젊은 여의사가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었다.

"시간 감각 장애는 정말 어려운 증상이에요. 완전한 치료는 힘들지만, 적응하는 방법을 찾을 수는 있어요. 중요한 것은 시계의 시간에 맞추려고 애쓰지 말고, 자신만의 리듬을 찾는 거예요."

의사의 말은 태민이 이미 경험하고 있는 것과 일치했다.

"몸의 신호에 주의를 기울여보세요. 배고픔, 졸음, 피로감, 활력 등 몸이 보내는 메시지들이 시계보다 더 정확한 시간을 알려줄 수 있어요."

집에 돌아온 태민은 '몸의 시계'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몸의 변화를 관찰하고 기록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의 피로도, 첫 번째 배고픔을 느끼는 시점, 집중력이 떨어지는 시간, 졸음이 몰려오는 순간 등을 세세하게 적었다.

일주일 후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뜬 후 대략 2~3시간 뒤에 첫 번째 배고픔을 느꼈다. 그로부터 4~5시간 후에 강한 식곤증이 왔다. 오후에는 2~3시간 주기로 생체 리듬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저녁에는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활동량이 줄어들었다.

이런 패턴을 파악한 후, 태민은 몸의 리듬에 맞춰 하루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오전-집중-점심-휴식-오후-활동-저녁-마무리-밤-휴식'과 같은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었다. 시계의 숫자가 아닌 몸의 감각으로 하루를 나누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이런 방식으로 생활하니 시간에 대한 불안감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더 이상 '지금이 몇 시인지' 궁금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 몸이 무엇을 원하는지'였다. 피곤하면 쉬고, 배고프면 먹고, 활력이 넘치면 활동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하지만 여전히 사회생활은 어려웠다. 사람들과의 약속을 잡을 때마다 시간을 정해야 했고, 그럴 때마다 불안해졌다. 태민은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정확한 시간 대신 시간대를 약속하는 것이었다. "오전 중에", "점심쯤에", "해 질 무렵에" 같은 식으로.

처음에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태민이 자신의 상황을 솔직하게 설명하자 대부분 이해해 주었다. 특히 오랜 친구들은 오히려 이런 방식을 흥미롭게 받아들였다.

"너랑 약속하면 시간에 쫓기지 않아서 좋다. 조금은 여유로워져서 좋아."

친구 민수의 말이었다. 그와 함께 산책하며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시계로 재지 않았지만,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몇 달 후, 태민은 새로운 일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반적인 '9 to 6' 직장은 불가능했다.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일, 자신의 리듬에 맞춰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프리랜서 번역, 온라인 강의, 야간 아르바이트 등을 알아봤다.

그러던 중 우연히 24시간 제과점에서 야간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았다. 밤 10시부터 아침 6시까지, 빵을 굽는 일이었다. 태민은 이 일에 관심이 생겼다. 밤에 일하면 다른 사람들의 시간대와 겹치지 않아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것 같았다. 게다가 빵 굽기는 시계가 아닌 빵의 상태로 타이밍을 맞추는 일이었다.

면접에서 태민은 자신의 상황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시간 감각에 문제가 있어서 일반적인 시간 약속을 지키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제과점 사장은 의외로 태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빵 굽기는 시계보다 감각이 중요해요. 반죽의 상태, 발효의 정도, 오븐의 온도와 시간을 몸으로 느끼는 거죠. 오히려 시계에만 의존하는 사람보다 더 좋은 빵을 만들 수도 있어요."

# 5.

첫 출근 날, 제과점의 뒷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태민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낮 동안 빵을 판매하던 매장의 밝고 분주한 분위기와는 달리, 밤의 매장은 고요하고 평온한 공간이었다. 큰 오븐들이 낮은 소리로 윙윙거리고, 반죽기들이 규칙적인 리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사장인 김 씨는 60대 중반의 베테랑 제빵사였다. 그는 태민에게 기본적인 작업 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여기서는 시계보다 감각이 중요해요. 반죽이 언제 완성되는지, 발효가 언제 끝나는지, 빵이 언제 다 구워지는지는 눈과 코와 손으로 판단하는 거예요."

첫 번째 작업은 반죽 만들기였다. 밀가루, 물, 이스트, 소금을 정확한 비율로 넣고 반죽기를 돌렸다. 김 사장은 반죽의 상태를 손으로 만져보며 설명했다.

"이렇게 탄력이 생기고 표면이 매끈해지면 반죽이 완성된 거예요. 대략 15분 정도 걸리지만, 날씨나 습도에 따라 달라져요. 시계보다는 이 감촉을 믿어야 해요."

태민은 반죽의 변화를 손끝으로 느꼈다. 처음에는 거칠고 덩어리진 상태였던 것이 점차 부드럽고 균일해졌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변화하는 반죽을 만지며, 그는 새로운 종류의 시간을 경험했다. 그것은 기계적이고 절대적인 시계의 시간이 아닌, 유기적이고 상대적인 생명의 시간이었다.

두 번째 작업은 발효였다. 반죽을 둥글게 만들어 발효실에 넣고 기다리는 과정이었다. 김 사장은 발효실 앞에서 설명했다.

"1차 발효는 보통 1시간 정도 걸려요. 하지만 반죽이 2배로 부풀어 오르면 끝난 거예요. 손가락으로 살짝 눌러봤을 때 천천히 올라오면 적당하고, 금방 올라오면 덜된 거고, 아예 안 올라오면 과발효된 거예요."

태민은 발효실 앞에서 기다리며 반죽의 변화를 관찰했다. 처음에는 작고 단단했던 반죽이 점차 크고 부드러워졌다. 마치 숨을 쉬는 것 같았다. 시계로는 1시간이 지났지만, 태민에게는 시간의 흐름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반죽과 함께 호흡하며 기다리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세 번째 작업은 성형이었다. 발효가 끝난 반죽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드는 과정이었다. 식빵, 바게트, 단팥빵 등 각각의 빵마다 다른 기법이 필요했다. 김 사장의 손동작을 보며 따라 하는 동안, 태민은 자신의 손이 점차 반죽의 언어를 이해하게 되는 것을 느꼈다.

"빵 만들기는 대화예요. 반죽이 말을 걸면 대답해 주는 거죠. 너무 세게 주무르면 빵이 질겨지고, 너무 약하게 하면 모양이 잡히지 않아요. 딱 적당한 힘으로 다뤄줘야 해요."

네 번째 작업은 굽기였다. 성형이 끝난 빵들을 오븐에 넣고 굽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태민은 새로운 경험을 했다. 오븐 속에서 빵이 구워지는 소리, 냄새, 색깔의 변화를 통해 굽기 정도를 판단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수분이 증발하는 소리가 나요. 그다음에는 빵 표면이 노릇노릇해지면서 고소한 냄새가 나죠. 마지막에는 두드려봤을 때 속이 비어 있는 소리가 나면 다 구워진 거예요."

태민은 오븐 앞에서 집중해서 빵의 변화를 관찰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오직 빵의 상태에만 신경을 썼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렇게 집중할 때는 시간 감각의 혼란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첫 주간은 적응 기간이었다. 반죽이 덜 익어서 다시 치대거나, 발효를 너무 오래 시켜서 시큼해지거나, 빵을 태우는 실수를 반복했다. 하지만 김 사장은 인내심을 가지고 가르쳐주었다.

"빵 만들기는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에요. 매일매일 반죽과 대화하면서 익숙해지는 거죠."

두 번째 주부터는 점차 요령이 생겼다. 반죽의 상태를 보고 물의 양을 조절하고, 실내 온도에 따라 발효 시간을 늘리거나 줄이고, 오븐의 특성에 맞춰 굽기 시간을 조정하는 법을 배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빵과의 교감이었다. 빵이 말을 걸면 귀를 기울이고, 빵이 원하는 것을 느끼고, 빵의 리듬에 맞춰 작업하는 것이었다.

한 달 후, 태민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반죽을 더 오래 치대서 쫄깃한 식감을 만들어내거나, 발효를 조금 더 시켜서 깊은 맛을 내거나, 오븐 온도를 미세하게 조절해서 더 바삭한 껍질을 만들어내는 등의 비법을 개발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빵을 만들 때만큼은 시간에 대한 불안감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반죽을 치대고, 발효를 기다리고, 빵을 굽는 동안에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빵의 시간이 곧 태민의 시간이었다.

새벽 5시가 되면 첫 번째 빵들이 구워져 나왔다. 갓 구운 빵의 향기가 매장 전체를 가득 채웠다. 이때 태민은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을 느꼈다. 자기 손으로 만든 빵이 완성되는 순간, 모든 피로와 스트레스가 사라졌다.

6시가 되면 매장 직원들이 출근해서 빵들을 진열했다. 태민의 야간 근무는 끝났지만, 그는 종종 조금 더 머물러서 손님들이 자신이 만든 빵을 고르는 모습을 지켜봤다. 출근길 직장인들이 갓 구운 빵을 사 가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빵 굽는 일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태민은 새벽하늘을 바라봤다. 계절에 따라 조금씩 다른 색깔을 보여주는 새벽하늘은 그에게 시간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주었다. 시간은 숫자가 아니라 변화였다. 빵이 익어가는 변화, 계절이 바뀌는 변화, 자신이 성장하는 변화 그 자체였다.

몇 달 후, 김 사장은 태민에게 더 많은 책임을 맡겼다. 새로운 빵 레시피를 개발하고, 후배 직원들을 가르치고, 때로는 매장 운영에도 참여하면서, 태민은 자신이 제과점의 소중한 구성원이 되었음을 느꼈다.

"태민 씨는 빵과 대화하는 재능이 있어요. 시계를 보지 않고도 빵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요."

김 사장의 칭찬은 태민에게 큰 의미였다. 시간 감각 장애로 인해 무능하다고 여겨졌던 자신이, 오히려 그 특성 때문에 뛰어난 빵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1년 후, 태민은 자신만의 작은 베이커리를 열기 위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가게의 이름은 '시간의 빵집'이었다. 그는 그곳에 시계를 두지 않기로 했다. 하루의 시작과 끝은 오직 빵의 시간에 맞추어 흐르도록 만들고 싶었다. 빵이 구워지는 시간에 문을 열고, 모두 팔리면 조용히 닫는 가게. 사람들이 시침과 분침에 쫓기지 않고, 온전히 향과 온도와 속도로 시간을 느낄 수 있는 공간.

하지만 과연 그런 가게가 성공할 수 있을까? 시간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세상에서, 시계 없는 빵집이라는 아이디어는 너무 이상적인 것이 아닐까? 태민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 손님들이 언제 문을 여는지 모르는 가게를 찾아올까? 정확한 시간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런 공간을 받아들일까?

어느 날 밤, 반죽을 치대던 태민은 문득 생각에 잠겼다. 한때 그는 시간을 놓친 사람이었다. 쫓기듯 흘려보낸 날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던 흐름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 그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다. 시계의 숫자가 아닌, 반죽이 부풀어 오르는 속도와 오븐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가 하루의 흐름을 알려주었다.

그 시간은 조용하고 단단하게 그의 삶을 지탱하고 있었다. 새벽녘, 마지막 빵을 오븐에서 꺼내며 태민은 조용히 웃었다. 시계를 보지 않았지만, 하루가 끝났음을 알 수 있었다. 쫓기지 않아도 충분했고, 재촉받지 않아도 충만했다.

내일도 그는 같은 자리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만의 '시간의 빵집'을 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일지, 어떤 모습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마치 반죽이 언제 완성될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것처럼. 그저 매일 조금씩, 자신만의 속도로 익어가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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