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깨어났지만,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의 이름이 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숨을 쉬고 있다는 건, 아직 '누구'라는 존재로 남아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눈에 들어온 것은 하얀 천장이었다. 형광등 하나가 켜져 있었고, 그 빛은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시간이 흘러도 밝기의 변화가 없었기에,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천장을 응시하다가 자신이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침대였다. 딱딱한 매트리스 위에 얇은 시트 하나가 덮여 있었다.
목을 돌리자, 벽이 보였다. 벽에는 실금처럼 얇은 균열이 있었다. 천장에서 바닥까지 이어진 금이었다. 시선을 따라 균열을 쫓다가 문득 생각이 스쳤다. 저 금은 언제 생긴 걸까. 자신이 깨어나기 전부터였을까, 아니면 방금 막 생긴 것일까.
손을 들어보았다. 손가락은 다섯 개였고, 팔은 손목에서 팔꿈치, 팔꿈치에서 어깨로 이어져 있었다. 가슴이 있었고, 배와 다리도 있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 몸이 정말 자신의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쩐지 빌려온 것처럼 느껴졌다.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낯설었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규칙적인 걸음이었다.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졌다. 누군가 이곳을 오가는 것 같았다. 그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발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 공간에 자신 외의 존재가 있다는 건 분명했다.
창문이 하나 있었다.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 바깥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커튼 너머로 스며드는 빛을 바라보며 상상했다. 바깥에는 해가 있을 것이고, 구름이나 나무, 건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다.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가고 싶었지만,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보이지 않는 어떤 경계가 느껴졌다.
문이 열렸다. 누군가 들어 왔다.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었고, 손에는 접시를 들고 있었다.
“오늘도 당신, 안녕하세요.”
여성의 목소리였다.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말의 의미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당신’이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라는 건 알겠는데, ‘오늘도’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어제도 ‘당신’이었고, 내일도 ‘당신’일 거라는 의미일까.
그녀는 접시를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놓았다. 평범한 병원식처럼 보였다. 밥과 국, 몇 가지 반찬이 담겨 있었다. 그는 그 음식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느꼈다. 그것이 배고픔인지, 아니면 단순한 결핍인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무언가가 필요하다’라는 감각은 분명히 있었다.
“천천히 드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는 접시를 바라보았다. 수저가 놓여 있었다. 스테인리스 재질의 차가운 감촉이 손에 익었다. 아마 예전에도 이런 수저를 사용해 본 적이 있었을 것이다.
밥을 한 숟갈 떠 입에 넣었다. 위로 내려가는 감각이 느껴졌다. 의식하지 않아도 몸이 알고 있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이 몸의 주인은 예전에도 밥을 먹은 적이 있다는 뜻이겠지.
국을 떠 마셨다. 짠맛이 났다. ‘맛’이라는 감각이 놀라웠다. 짜고, 쓰고, 달고, 맵고—이런 차이를 어떻게 아는 걸까. 누가 알려준 걸까.
그는 천천히 식사를 마쳤다. 배가 부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만족감 같은 감정이었다. 빈 접시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일도 누군가 음식을 가져다줄 것이다. 그리고 모레도, 그다음 날도. 벽에는 시계가 걸려 있었다. 바늘은 3시 17분을 가리킨 채 멈춰 있었다. 오후일까, 새벽일까. 그리고 몇 월 며칠의 3시 17분일까.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이었다.
# 2.
며칠이 지났다. 정확히 며칠인지는 알 수 없었다. 멈춰 선 시계 때문에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음식이 하루에 세 번 들어오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하루라는 단위는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는 그 규칙적인 리듬에 의존해 시간을 세기 시작했다. 아침, 점심, 저녁. 세 번이면 하루. 하지만 그 계산마저 불확실했다.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계속 왔다. 언제나 같은 사람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얼굴을 자세히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얼굴이 희미한 윤곽으로만 남아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비슷했다. 부드럽고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 사람은 매번 "오늘도 당신, 안녕하세요."라고 말했다. 그 말이 점차 익숙해졌다. 마치 자신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인사말 같았다.
어느 날, 그 사람이 평소와 다른 말을 했다.
"컨디션이 어떠세요?"
그는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목구멍이 말라왔다. 컨디션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몸의 상태를 묻는 것일까, 아니면 기분을 묻는 것일까. 그는 자신의 상태를 점검해 보았다. 아픈 곳은 없는 것 같았다. 숨 쉬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좋다'거나 '나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이 없었다. 기준이 될 만한 어제가 없었으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어떻게 들릴지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평범했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약간 쉰 듯했지만, 며칠 동안 사용하지 않았으니 당연할지도 모른다. 남성의 목소리 같았다. 그렇다면 자신은 남성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확신할 수는 없었다.
"괜찮아요. 천천히 회복하시면 됩니다."
회복이라는 단어가 귀에 걸렸다. 그 말이 공기 중에서 맴돌며 그의 의식을 건드렸다. 그렇다면 자신은 무언가로부터 회복 중인 상태인 것이다. 병이었을까, 사고였을까. 하지만 몸 어디에도 상처나 붕대는 보이지 않았다. 머리를 만져보았지만, 특별한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머리뼈 아래에서 뇌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회복해야 할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라면, 그것은 더욱 불안한 일이었다.
그 사람이 나간 후, 그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차가운 리놀륨 바닥이 발바닥에 닿았다. 발가락 끝이 오그라들었다. 무릎이 약간 떨렸지만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균형감각도 남아있었다.
창문으로 다가갔다. 각 걸음마다 바닥의 차가움이 발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커튼을 살짝 젖혔다. 밖이 보였다. 회색빛 하늘이었다.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멀리 건물들이 보였다. 높지 않은 건물들이었다. 아마 이곳은 도시의 외곽인 것 같았다. 창문 아래로는 작은 정원이 있었다. 나무 몇 그루와 녹슨 벤치가 있었다. 낙엽이 벤치 위에 쌓여 있는 걸 보니 가을인 것 같았다. 하지만 몇 월인지는 알 수 없었다.
거울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세면대 위에 작은 거울이 달려 있었다. 그는 거울로 다가갔다. 심장이 조금 빨라졌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눈, 코, 입이 있었다. 평범한 얼굴이었다. 나이는 삼십 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머리카락은 짧았고 약간 헝클어져 있었다. 수염은 며칠 자란 것 같았다. 턱선이 각져 있고, 눈 아래에 희미한 다크서클이 있었다.
이것이 자신의 얼굴인가. 확신할 수 없었다. 거울 속 사람이 자신인지 아닌지 판단할 기준이 없었다. 손을 들어보았다. 거울 속 사람도 손을 들었다. 웃어보았다. 거울 속 사람도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가 어색해 보였다. 마치 연기하는 것 같았다. 아마 자신일 것이다. 하지만 낯선 사람의 얼굴을 빌려 쓰고 있는 기분이었다.
복도에서 소리가 들렸다. 발걸음이 아니라 바퀴 소리였다. 휠체어나 침대를 옮기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목소리들이 들렸다. 여러 사람의 목소리였다. 의료진들의 대화 같았다. 그는 문 쪽으로 다가가서 귀를 기울였다. 문의 차가운 금속이 귀에 닿았다.
"······ 3호실 환자는 어때?"
"아직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어요."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가족들은 뭐라고 하나요?"
"연락이 안 돼요. 신원확인도 어려운 상황이고······"
대화가 점점 멀어졌다. 그는 문에서 물러났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3호실이 자신의 방일까. 그렇다면 자신은 기억을 잃은 환자인 것이다. 그리고 가족도 없거나 연락이 안 되는 상황인 것 같았다. 신원확인도 어렵다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세상에 홀로 떠 있는 존재라는 뜻이었다.
오후에 다른 사람이 왔다. 하얀 가운을 입었다. 청진기가 목에 걸려 있었다. 의사 같았다. 그는 차트를 들고 있었고, 안경 너머로 그를 관찰하는 눈빛이 날카로웠다.
"안녕하세요. 오늘 기분은 어떠세요?"
"잘 모르겠습니다."
"기억나는 게 있나요? 이름이라던가, 사는 곳이라던가."
그는 머릿속을 뒤져보았다. 마치 서랍을 하나씩 열어보는 것 같았지만, 모든 서랍이 비어 있었다. 이름도, 사는 곳도, 가족도, 직업도 모든 것이 공백이었다. 그 공백이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인위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괜찮아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기다려보세요. 기억은 언젠가 돌아올 거예요."
하지만 의사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마치 환자를 안심시키기 위한 상투적인 말 같았다. 그 말이 오히려 불안감을 키웠다. 언젠가는 얼마나 먼 언젠가 일까.
의사가 나간 후, 그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매트리스의 딱딱함이 등을 눌렀다.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자신은 기억을 잃은 사람이다. 이름도 없고, 과거도 없고, 가족도 없다. 하지만 살아있다. 숨 쉬고, 먹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존재한다는 것과 살아있다는 것이 같은 뜻일까.
저녁이 되었다. 음식이 들어왔다.
"오늘도 당신, 안녕하세요."
그는 그 말이 점점 자신의 이름처럼 느껴지고 있음을 느꼈다. '당신'—누구도 직접 부르지 않는 이름이지만, 매일 들려오는 익숙한 호칭이었다. 이름이 사라진 자리에서, 그는 그 말속에 자신을 조금씩 새겨넣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이라는 호칭은 너무 일반적이어서 개별성을 지우는 말이기도 했다. 누구든 될 수 있는 이름이면서, 동시에 아무도 아닌 이름이었다.
밤이 되었다. 형광등이 꺼지고 작은 야간 등만 켜져 있었다. 주황빛이 방 안을 희미하게 물들였다. 그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느꼈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피가 흐르고 있었다. 혈관을 타고 온몸을 순환하고 있었다. 살아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이름이 없어도, 기억이 없어도, 과거가 없어도, 심장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심장박동조차 누구의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 3.
일주일이 지났다. 아니면 더 지났을 수도 있었다. 시간을 정확히 세는 것은 포기했다. 대신 음식이 들어오는 횟수로 하루를 구분했다. 아침, 점심, 저녁. 그렇게 세 번의 식사가 하루를 만들었다. 때로는 한 번의 식사가 더 늦게 오기도 했고, 때로는 일찍 오기도 했지만, 그는 더 이상 시간에 연연하지 않았다.
의료진들이 자주 왔다. 간호사들과 의사들이었다. 그들은 그를 다양하게 불렀다. "환자분", "3 호실 분", "선생님". 하지만 누구도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이름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어색함이 섞여 있었다. 마치 호명할 수 없는 존재 앞에서 느끼는 불편함 같았다.
어느 날, 새로운 사람이 왔다. 짙은 회색 양복을 입은 중년 남성이었다. 경찰관이나 공무원 같아 보였다. 구두 소리가 복도에서부터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는 두꺼운 서류를 들고 있었고, 안경 너머로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혹시 이 중에 아는 이름이 있나요?"
서류에는 여러 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김철수, 박영호, 이민석, 정현우…… 수십 개의 이름들이 컴퓨터로 인쇄된 깔끔한 글씨체로 나열되어 있었다. 그는 하나하나 읽어보았다. 입안에서 그 이름들을 조용히 되뇌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익숙한 이름은 없었다. 어느 것도 자신의 것 같지 않았다. 마치 외국어를 읽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실종신고가 들어온 사람들 명단입니다. 혹시 이 중에 본인이 있을 수도 있어서요."
실종신고…… 그렇다면 어딘가에서 자신을 찾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다. 가족이거나 친구거나 동료거나. 누군가 그의 빈 자리를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슴 한편을 저몄다. 하지만 그 명단의 이름들은 모두 낯설었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세요. 급하지 않으니까요."
그 사람이 나간 후, 그는 다시 이름들을 떠올려보았다. 김철수, 이 이름이 자신일까. 거울을 보며 "김철수"라고 말해보았다. 어색했다. 입에 맞지 않았다. 혀가 그 음절들을 거부하는 것 같았다. 박영호, 이것도 마찬가지였다. 이민석, 정현우…… 모든 이름이 남의 것 같았다. 오히려 그 이름들을 발음할 때마다 자신에게서 무언가가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며칠 후, 간호사가 왔다. 평소와 다른 표정이었다. 뭔가 기대하는 듯한, 좋은 소식을 전하려는 표정이었다. 눈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 있었다.
"좋은 소식이 있어요. 가족이 찾아오실 것 같아요."
가족이라는 단어가 가슴을 강하게 쳤다.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누군가 자신을 찾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기대감과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기대감은 마침내 정체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고, 두려움은 그 정체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불안 때문이었다.
"언제 오시나요?"
"내일 오후에 오실 예정이에요."
그날 밤은 잠이 오지 않았다. 천장의 균열을 바라보며 뒤척였다. 내일 오는 사람들이 정말 자신의 가족일까. 만약 맞다면 자신의 이름을 알게 될 것이다. 과거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누구를 사랑했는지. 하지만 만약 아니라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맞다고 해도, 그 정체가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
다음 날 오후, 두 사람이 왔다. 중년 부부였다. 여자는 눈가가 빨갛게 부어있었고, 남자는 턱을 잔뜩 괴고 있었다.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병실의 공기가 긴장으로 가득 찼다. 그들은 그를 보자마자 얼굴에 스치는 희망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곧 그 빛이 사라졌다.
"이 사람이 아니에요."
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아들이 아니에요. 비슷하긴 하지만…… 아니에요."
남자도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찾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이 나간 후, 그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실망감과 동시에 안도감이었다. 실망스러운 것은 자신의 정체를 알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도감이 든 것은 왜일까. 마치 남의 이름을 강요받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느낌이었다.
며칠 후 또 다른 가족이 왔다. 이번에는 노인 부부였다.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오랜 기다림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보자마자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다음 주에는 젊은 여성이 왔다. 누군가의 누나나 아내인 것 같았다. 손에 작은 사진을 들고 있었다. 아마 찾고 있는 사람의 사진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도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나가면서 흘린 눈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었다. 그때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들었다. 김민수, 박태진, 이성호, 최준영…… 하지만 어떤 이름도 자신의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이름이 주어질 때마다 거부감이 들었다. 마치 남의 옷을 억지로 입는 것 같았다. 그 옷이 몸에 맞지 않았다.
한 달 정도가 지났을 때, 그는 깨달았다. 자신은 그 어떤 이름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군가 자신을 찾아와서 이름을 불러준다고 해도, 그것이 진짜 자신일지 의심스러웠다.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는 어떤 정체성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그런 확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의사가 와서 물었다. 평소보다 조심스러운 표정이었다.
"이름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없나요?"
"네. 하지만 괜찮습니다."
"괜찮다니요?"
"이름이 없어도 제가 존재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의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환자가 이런 말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차트를 든 손이 약간 떨렸다.
"하지만 이름은 정체성의 기본이잖아요."
"정체성이 꼭 이름에서 나오는 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는 문득 자신이 내뱉은 말에 스스로 놀랐다.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이름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 아니, 오히려 이름이 없어서 더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확신. 이름이라는 규정이 사라진 자리에, 처음으로 왜곡되지 않은 '자신'이 남아있음을 그는 깨달았다. 마치 액자에서 벗어난 그림처럼, 경계가 사라진 자유로움이 있었다.
의사가 난처한 표정으로 나간 후,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나뭇잎들에도 이름이 있을까. 있다고 해도 그것이 중요할까. 그들은 그냥 존재한다. 바람에 흔들리고, 햇살을 받고, 언젠가는 떨어진다. 이름 없이도 완전하게.
그날 저녁, 간호사가 평소처럼 음식을 가져왔다. 발걸음 소리가 복도에서부터 익숙하게 들려왔다.
"오늘도 당신, 안녕하세요."
그는 미소 지었다. 이 인사가 이제는 편안했다. '당신'이라는 호칭이 어떤 고유명사보다 자신에게 잘 맞는 것 같았다. 구체적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로웠다. 누구든 될 수 있고, 동시에 누구도 아닐 수 있었다. 그 애매함 속에서 그는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 4.
두 달이 지났다. 더 정확히는 약 180번의 식사가 지났다. 그는 이제 이 병실을 마치 자신의 몸처럼 알고 있었다. 벽의 균열이 일곱 개인 것, 천장의 누런 얼룩이 마치 섬의 모양을 닮아있는 것, 창밖 플라타너스의 잎이 노랗게 변해가는 과정까지. 매일 아침 깨어날 때마다 이 모든 것들이 그를 맞아주었다.
의료진들도 그에게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기억이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에 찬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지만, 이제는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그들도 그를 '당신'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고유명사 대신 대명사가 그의 이름이 되어버렸다. 어색했던 호칭이 이제는 자연스러워졌다.
새로운 일상이 만들어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찬물로 세면을 하고, 거울 속 낯익어진 얼굴에 인사를 건넸다. 아침 식사는 항상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했다. 오전에는 창밖을 보거나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고무창 신발이 바닥에 닿는 소리, 다른 환자들의 희미한 대화 소리, 간호사들의 발걸음이 만들어내는 병원의 리듬에 자신을 맡겼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책을 읽었다. 간호사가 가져다준 책들이었다. 저자의 이름은 기억하려 하지 않았지만, 내용은 흥미로웠다. 글자들이 만들어내는 세계에서 그는 이름 없는 독자로 존재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복도를 걷다가 다른 환자를 만났다. 휠체어를 탄 할아버지였다. 회색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남아있고, 손등에는 검은 반점들이 있었다. 그 할아버지가 먼저 말을 걸었다.
"젊은이, 이름이 뭔가?"
"이름이 없습니다."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할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진짜 궁금함이 섞여 있었다. 비난이나 동정이 아닌,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할아버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름진 손이 휠체어 바퀴를 만지작거렸다.
"그럼, 새로 만들면 되지 않나? 이름이란 게 원래 누군가 지어주는 것 아닌가."
새로 만든다. 흥미로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이름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름이 없는 상태가 편안했다. 정의되지 않는 것의 자유로움이 있었다. 마치 아직 그려지지 않은 캔버스 같은 가능성이 있었다.
"이름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호오, 특이한 젊은이구먼."
할아버지가 웃었다. 그 웃음에는 이해와 승인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휠체어를 천천히 밀고 사라졌다. 바퀴 소리가 복도 끝까지 울려 퍼지다가 사라졌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생각했다. 정말 이름 없이 살 수 있을까. 사회로 나가게 되면 신분증이 필요할 것이고, 이름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괜찮았다. 이 병실 안에서는 그가 누구든 상관없었다.
의사가 와서 퇴원에 관해 이야기했다. 차트를 넘기며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몸은 완전히 회복되었어요. 기억은 아직이지만, 일상생활에는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퇴원하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그게 문제죠. 신원이 확인되지 않아서…… 임시로 시설에 머물 수도 있고, 사회복지사와 상담해서 방법을 찾아야겠어요."
시설, 그것도 하나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병실에서 더 머물 수는 없을까. 이곳이 편안했다. 이름이 없어도 괜찮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도피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이곳에 조금 더 있을 수는 없나요?"
"의학적으로는 퇴원해야 해요. 하지만 갈 곳이 없다면…… 조금 더 알아봐야겠네요."
의사의 목소리에는 동정심과 함께 약간의 곤란함이 섞여 있었다. 환자를 내보내야 하지만, 받아줄 곳이 없는 딜레마였다.
며칠 후, 사회복지사가 왔다. 40대 중년 여성이었다. 검은 정장을 입고 두꺼운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말투는 친절했지만 업무적이었다.
"임시거주시설을 알아봤는데요, 몇 군데 자리가 있어요. 거기서 지내면서 천천히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면 될 것 같아요."
"이름이 없어도 괜찮나요?"
"일단은 가명을 사용하셔야 해요. 행정 처리를 위해서요."
가명도 결국 이름의 한 형태였다. 하지만 임시적인 것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체성을 고정하는 진짜 이름이 아니라, 그저 구분을 위한 기호에 불과하다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이제 이름은 본질이 아닌, 잠시 머무는 표식일 뿐이었다. 마치 호텔 객실 번호 같은 것이었다.
"어떤 이름을 원하세요?"
그는 생각해 보았다. 머릿속에서 여러 가능성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그냥 'ㄱ'이면 안 될까요?"
"ㄱ이요?"
사회복지사의 눈이 커졌다.
"네. 한글의 첫 번째 자음이니까요. 시작을 의미하는 것 같아서요."
사회복지사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펜을 든 손이 잠시 멈춰 있었다.
"그건…… 이름으로 쓰기엔 좀…… 다른 걸로 하시죠."
결국 임시로 '무명'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무명'이라는 이름이 아이러니했다. 이름이 없다는 뜻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적절했다. 자기 모순적이면서도 정확했다.
퇴원 날이 가까워지자, 그는 마지막으로 병실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오래된 벽에는 여전히 균열이 남아있었고, 시계는 여전히 3시 17분에서 멈춰 있었다. 창밖의 플라타너스는 조용히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공간은 처음과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그 사이 그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이름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정체성은 기억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을 살아가는 방식 속에 깃들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무엇이 부족하거나 모자라도, 존재는 여전히 온전하다는 것을 그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것은 두려운 깨달음이 아니라, 오히려 해방적인 것이었다.
간호사가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다. 그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발걸음 소리였다.
"오늘이 마지막이네요. 오늘도 당신…… 항상 행복하세요."
그는 웃었다. 처음으로 진심으로 웃는 것 같았다.
"네, 오늘도 '저'입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내일도, 모레도, 계속 '저'일 것 같아요."
간호사가 따뜻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가장 중요한 거죠. 누구든 자기 자신이 되는 것."
# 5.
임시거주시설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그는 창밖을 보았다. 처음 보는 거리였다. 아니, 처음이 아닐 수도 있었다. 기억이 없으니, 모든 것이 처음이면서 동시에 처음이 아닐 수도 있었다. 택시 미터기의 숫자가 계속 올라갔다. 운전사는 백미러로 그를 힐끔거렸지만 말을 걸지 않았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들—가로수, 간판, 사람들—은 모두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했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시설은 예상보다 쾌적했다. 회색 콘크리트 건물이지만 창문마다 화분이 놓여 있었고, 입구에는 작은 정원이 있었다. 작은 개인실이 주어졌다. 침대와 책상, 작은 옷장이 있었다. 병실보다는 넓었지만, 여전히 소박했다. 벽지는 연한 베이지색이었고, 작은 창문 하나가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충분했다.
시설의 다른 거주자들을 만났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있었다. 가족을 잃은 노인도 있었고, 사업 실패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중년 남성도 있었으며, 오랜 시간 정신적인 어려움과 싸우고 있는 젊은 여성도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조심스럽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름이 뭐예요?"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던 중년 여성이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호기심보다는 예의가 더 많이 섞여 있었다.
"무명입니다."
"무명이요? 특이한 이름이네요."
그는 더 이상 자신에 대해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사용하는 이름이 진짜가 아니라는 점도, 기억의 상당 부분이 비어 있다는 사실도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저 '무명'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조용히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이름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지금 어떤 삶을 선택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그는 시설 근처 작은 공원으로 나갔다. 벤치 페인트는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지만 앉기에는 괜찮았다. 그는 그곳에 앉아서 사람들을 관찰했다. 산책하는 노인들, 뛰어다니는 아이들,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삶을 살고 있었다. 각자의 이름과 역할 안에서.
한 아이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저 아저씨는 누구예요?"
아이가 그를 가리키고 있었다. 엄마가 아이의 손을 내리며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르는 분이니까 그런 식으로 바라보면 안 돼."
"모르는 분."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름도 없고, 과거도 없었다. 그러나 그 사실은 더 이상 슬픔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그 익명성 속에서 자유를 느꼈다. 어떤 기대도 짊어지지 않았고, 누구의 시선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그는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비워진 자리에서 비로소 살아 있다는 감각이 피어나고 있었다.
어느 날, 도서관에 갔다. 시설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작은 도서관이었다. 노란 벽돌로 지어진 2층 건물이었고, 입구에는 '시민 모두의 도서관'이라는 표지판이 걸려 있었다. 대출증을 만들려고 했는데 신분증이 필요했다. 임시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무명'이라는 이름이 깔끔한 폰트로 적혀 있었다.
사서가 특이한 표정을 지었다. 40대 중반쯤 보이는 여성이었고, 안경 너머로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무명이라는 이름이 독특하네요."
"부모님이 특별한 뜻으로 지어주셨나 봐요."
그는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 이름을 만든 사회복지사도 일종의 부모 역할을 했으니까.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았다. 조용했고, 책들이 많았다.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책장 사이사이를 비췄다. 그는 주로 철학책을 읽었다. 존재에 관한 이야기들이 흥미로웠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이 특히 와닿았다. 이름이 아니라 사유가 존재의 증거라는 것이었다.
한 달이 지났을 때, 시설 직원이 그에게 말했다. 30대 초반의 사회복지사였고, 항상 친절하지만, 업무적인 말투였다.
"일자리를 알아봤는데요, 관심 있으세요?"
"어떤 일인가요?"
"청소업체에서 사람을 구한다고 해요.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고, 성실하기만 하면 된대요."
일은 그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주는 도구가 될 수 있었다. 이름이 아닌 역할을 통해 자신을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졌다. 청소를 하는 사람, 매일 공간을 정돈하고 조용히 지나가는 사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작고 단순한 일이지만, 그는 그 안에서 자신을 다시 구성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해보겠습니다."
그는 그다음 주부터 일을 시작했다. 빌딩을 청소하는 일이었고, 새벽 5시에 시작해 오전 10시면 마무리되는 일정이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도 몇 명 있었다. 대부분 50대 이상의 사람들이었고, 조용하고 성실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그를 자연스럽게 '무명씨'라고 불렀다. 그는 그 이름 속에서 어떤 억지스러움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불러주는 목소리 속에서 묵직한 현실감을 느꼈다.
일은 단순했다. 쓰레기를 비우고, 바닥을 닦고, 화장실을 청소하는 것이었다. 반복적이었지만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명상 같았다. 생각 없이 몸을 움직이는 것이 편안했다. 걸레질할 때 팔의 움직임, 진공청소기의 일정한 소음, 유리창을 닦을 때의 반복적인 동작들이 그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어느 날, 청소하던 사무실에서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고생 많으세요."
20대 후반쯤 보이는 젊은 직장인이었다.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넥타이는 느슨하게 매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이 일 오래 하셨어요?"
"아니요, 얼마 안 됐어요."
"전에는 뭐 하셨어요?"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젊은 직장인의 눈에는 순수한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잘 기억이 안 나네요."
"아, 죄송해요. 괜한 질문을……"
"괜찮습니다."
직장인이 다시 일에 집중했다. 그는 청소를 계속했다. 과거를 묻는 말은 이제는 자연스럽게 처리될 수 있었다.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 사람들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것이 거짓말인지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덧 계절이 바뀌었다. 가을이 왔다. 공원의 나무들이 노랗고 빨갛게 물들었다. 그는 매일 같은 길을 걸으며 변화를 관찰했다. 각각의 나무들의 이름은 비록 몰랐지만, 그 아름다움은 변하지 않았다. 단풍나무일 수도 있고, 은행나무일 수도 있었지만, 이름을 모른다고 해서 아름다움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어느 날 밤, 그는 자신의 방에서 일기를 써보기로 했다. 종이에 펜을 들고 첫 줄을 썼다.
"오늘도 나는 존재했다."
그리고 멈췄다. '나'라는 말이 어색했다. 나는 누구인가. 무명인가, 아니면 다른 누구인가. 하지만 곧 깨달았다.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존재 자체라는 것을.
"오늘도 여기 있었다."
그는 표현을 바꾸었다. '나'라고 쓰지 않고, '여기'라고 적었다. 구체적인 주체 대신 상황과 장소를 중심에 놓았다. 그편이 더 솔직했고, 지금의 자신을 더 정확하게 드러낸다고 느꼈다. 존재를 말하기보다, 존재하는 자리를 가리키는 방식이었다. 이름이 아닌 공간, 정체가 아닌 위치로 그는 그렇게 자신을 다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한 권의 책을 발견했다. 『무명인의 철학』이라는 제목이었다. 파란색 표지에 흰색 글씨로 제목이 적혀 있었다. 흥미로워서 빌려 읽었다. 그것은 익명성에 관한 철학적 탐구였다. 저자는 이름이 반드시 존재를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존재를 제한하는 틀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름 속에는 타인의 기대, 사회가 부여한 역할, 규범의 무게가 함께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익명성 속에서 비로소 자유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무명은 비어 있음이 아니라, 고정되지 않은, 가능성의 상태라고 말하고 있었다.
"진정한 자유는 모든 정의로부터의 해방에서 온다."
책의 한 구절이었다. 그는 이 말에 깊이 공감했다. 자신은 모든 정의로부터 자유로웠다. 누구의 아들도, 누구의 친구도, 누구의 동료도 아니었다. 그냥 존재했다.
1년이 지났다. 시설에서 나와 작은 원룸을 얻었다. 보증금은 청소 일로 번 돈으로 마련했다. 방은 작았지만, 온전히 자신만의 공간이었다. 창문 하나, 작은 침대 하나, 책상 하나가 전부였지만 충분했다. 그곳에서 그는 진정한 고독을 경험했다. 외롭지 않은 고독이었다.
새해가 밝았다. 사람들은 각자의 계획을 세우고, 새로운 다짐을 마음에 새겼다. 그에게도 하나의 결심이 있었다. 앞으로도 이름 없이 살아가겠다는 것과 누군가 과거를 알려주려 하거나, 새 이름을 건네려 해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심지어 '무명'이라는 이름조차 언젠가는 내려놓을 생각이었다. 그는 이름이 아닌 존재 그 자체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어느 봄날, 공원에서 한 아이를 만났다. 7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그 아이가 천진하게 물었다.
"아저씨 이름이 뭐예요?"
그는 미소 지었다.
"이름이 없어."
"어떻게 이름이 없어요? 모든 사람은 이름이 있는데."
아이의 눈에는 순수한 의문이 담겨 있었다.
"그냥 없어. 하지만 괜찮아."
"이상해요. 엄마도 이름 있고, 아빠도 이름 있고, 강아지도 이름이 있는데."
"이상한 게 좋을 수도 있어."
아이는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고 뛰어갔다. 그는 그 자리에 앉아 하늘을 보았다.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구름에도 이름이 있을까. 있다면 누가 지어주었을까. 그리고 그것이 중요할까.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깨달았다. 자신은 더 이상 기억을 되찾고 싶지 않다는 것을. 과거의 이름을 알고 싶지 않다는 것을. 지금의 상태가 완전하다는 것을. 완전함은 결핍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결핍까지도 받아들이는 상태라는 것을.
그날 밤, 그는 서랍 깊숙한 곳에서 임시 신분증을 찾아냈다. 플라스틱 카드에는 '무명'이라는 이름이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그는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름이 주는 무게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시간을 함께 떠올렸다. 그리고 조용히, 조심스럽게 카드를 가위로 잘랐다. 더 이상 이름은 필요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그는 이제 이름 없이 존재할 수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겉모습은 1년 전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거울 속 사람은 분명 이전과는 다른 존재처럼 느껴졌다. 이제 그는 이름 없이도 존재했고, 과거 없이도 현재를 살아가고 있었다. 정의되지 않기에 고정되지 않았고, 고정되지 않았기에 자유로웠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삶 속에 서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안녕, 당신."
그리고 웃었다. 진심으로 웃었다. 이름 없는 사람의 이름 없는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이름을 가진 사람의 웃음보다 진실했다.
창밖으로 밤이 깊어졌다. 내일 해가 뜨면 그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이름도, 과거도 없지만 흔들림 없이 온전한 상태로. 그 사실만으로 삶은 충분했고, 오히려 완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