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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 아래의 여자

by 은파

처음엔 손등이었다.

흰빛 위에 빨간 점 하나.

며칠 후, 그건 말이 되었다.

말은 남의 것이었다.


# 1.

시윤은 손등을 들여다보았다. 어제까지 없던 붉은 점이 피어 있었다. 화장실 형광등 아래에서 그 점은 마치 살아있는 듯 맥박을 뛰는 것처럼 보였다. 모기에게 물린 것 같지만 가렵지는 않았다. 그저 따끔했다. 바늘로 찌른 듯한 예리함이 아니라, 무언가 안에서 밀어내는 듯한 둔탁한 감각이었다. 피부 아래 깊숙한 곳에서 누군가 작은 망치로 두드리고 있는 것 같았다.

화요일 아침이었다. 부엌에서 들려오는 커피 추출기 소리가 평소보다 날카롭게 들렸다. 시윤은 손등의 점을 엄지로 문질렀다. 점은 점점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 동시에 어깨 깊숙한 곳에서 묵직한 피로가 밀려왔다. 지난밤 제대로 잠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꿈에서 계속 누군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깨어났다.

"또 뭘 만졌어?"

준호가 부엌에서 나오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차갑게 들렸다. 아니, 차가운 게 아니라 지친 것 같았다. 최근 들어 그의 목소리에는 항상 어떤 날카로운 모서리가 있었다. 마치 유리 조각처럼 시윤의 신경을 긁어내는. 시윤은 재빨리 손을 등 뒤로 감췄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준호의 눈빛이 그녀의 손등에 머물렀다가, 천천히 그녀의 얼굴로 옮겨갔다.

"모르겠어."

거짓말이었다. 시윤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고, 준호 역시 그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어제 준호가 손을 잡았을 때부터 그 자리가 이상했다. 준호의 손바닥이 닿은 순간, 피부 아래로 무언가 스며든 것 같았다. 온도도 아니고 압력도 아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침투처럼 느껴졌다. 마치 다른 사람의 기억이 그녀의 피부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었다.

준호는 시윤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평소에 없던 무언가가 있었다. 의심? 아니면 두려움? 시윤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병원 가봐."

그의 목소리에는 명령하는 듯한 톤이 섞여 있었다. 시윤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정도로?"

"그냥 가봐."

준호는 가방을 거칠게 메고 현관으로 향했다. 그의 어깨에는 긴장이 가득했다. 마치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려는 사람의 몸짓이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그 소리가 사라진 후에도 한동안 공기 중에 진동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시윤은 혼자 남은 거실에서 손등을 다시 살펴보았다. 점이 조금 더 퍼진 것 같았다. 따끔함도 더 선명해졌다. 아니, 선명해진 게 아니라 깊어졌다. 피부 표면이 아니라 그 아래, 혈관 속을 흐르는 피까지 건드리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도 진정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피부과에 갔다. 병원까지 걸어가는 길에 시윤은 계속 자신의 그림자를 의식했다. 오늘따라 그림자가 평소보다 짙어 보였고, 마치 그림자 안에 또 다른 사람이 숨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손등이 계속 신경 쓰였다. 플라스틱 의자는 딱딱했고, 에어컨 바람이 목뒤로 차갑게 스며들었다. 다른 환자들의 시선이 자꾸 손등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들의 시선이 그녀 전체를 훑어 내려가는 것 같았다. 마치 그녀의 몸 어딘가에 숨겨진 비밀을 찾으려는 듯한. 시윤은 손을 가방 안에 넣었다. 가방 속 어둠이 손등의 열기를 조금 식혀주는 것 같았다.

"시윤 씨."

간호사가 불렀다. 목소리는 기계적이고 무감각했다. 진료실은 하얗고 차가웠다. 벽에 붙은 포스터들 - 각종 피부 질환 사진이 시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는 중년 남성으로, 친절하지도 불친절하지도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수많은 환자를 봐온 피로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어디가 불편하세요?"

시윤은 손등을 내밀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붉은 점이 더욱 선명해 보였다. 의사가 돋보기로 들여다보았다. 몇 초간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시윤은 자기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빠르고 불규칙했다.

"언제부터 이러셨어요?"

"어제부터요."

"가려워요?"

"아니요. 따끔해요."

의사는 시윤의 손등을 만졌다. 그 순간 시윤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의사의 손가락이 닿은 자리에서 또 다른 따끔함이 퍼져나갔다. 이번에는 더 깊었다. 피부 아래 몇 층까지 내려가는 것 같았다. 동시에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의사의 손끝을 통해 무언가가 전해지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의 감각, 다른 사람의 기억 파편들이 그녀의 몸속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아파요?"

의사가 물었다. 시윤은 고개를 저었다. 아픈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낯설었다. 남의 손길이 자신의 피부를 통과해 몸속 깊숙이 들어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자신의 몸이 더 이상 완전히 자신만의 것이 아닌 것처럼.

"접촉성 피부염 같은데요. 뭔가 알레르기 반응인 것 같아요."

의사는 연고와 항히스타민제 처방전을 써 주었다. 펜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시윤의 귀에는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시윤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왔다. 복도를 걸을 때 자신의 발소리가 평소와 다르게 들렸다. 마치 다른 사람이 걷는 것 같았다.

약국에서 약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오전과 똑같았지만, 어딘가 달랐다. 공기의 밀도가 변한 것 같았다. 시윤은 손등에 연고를 발랐다. 차가운 젤이 피부에 스며들었다. 따끔함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감각이 일어났다. 마치 피부 아래에서 무언가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녁에 준호가 돌아왔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시윤의 가슴이 조금 빨라졌다. 준호는 시윤의 손등을 힐끗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는 아침보다 더 날카로운 무언가가 있었다.

저녁을 먹으면서도 대화가 없었다. 숟가락과 젓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만 반복되었다. 시윤은 젓가락을 든 오른손을 자꾸 의식하게 되었다. 손등의 붉은 자리가 준호의 시야에 들어갈 때마다 그가 미묘하게 얼굴을 찡그리는 것 같았다. 아니, 찡그리는 게 아니라 움츠러드는 것 같았다. 마치 무언가 불쾌한 것을 보는 것처럼.

"오늘 병원 갔어."

시윤이 먼저 말을 꺼냈다. 자신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게 들렸다.

"뭐래?"

준호의 대답은 간결했다. 그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밥을 먹고 있었다.

"접촉성 피부염이래. 알레르기 반응."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 침묵이 시윤에게는 무겁게 느껴졌다.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세워진 것 같았다.

밤에 잠들기 전, 시윤은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손등의 붉은 자리가 형광등 불빛 아래서 더욱 선명해 보였다. 그녀는 손등을 비비듯 만져보았다. 피부가 약간 부어있는 것 같았다. 만지면 만질수록 따끔함이 퍼져나갔다.

아니, 따끔함이 아니었다. 무언가 다른 감각이었다. 마치 피부 아래에서 누군가 두드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시윤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인가 그 얼굴이 점점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특히 눈가가 그랬다. 가끔은 저 눈이 정말 자신의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눈이 엉뚱하게도 시윤의 얼굴에 붙어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거울 속에서 자신의 눈과 마주칠 때마다, 마치 다른 사람이 그녀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그날 밤, 시윤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손등에서 시작된 붉은색이 팔목으로, 팔꿈치로, 어깨로 번져나가는 꿈이었다. 붉은색이 번질 때마다 그녀의 몸은 조금씩 다른 사람의 것이 되어갔다. 동시에 어딘가에서 낯선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여자의 목소리, 남자의 목소리, 그리고 아이의 목소리까지—분명 자신의 것이 아닌, 익숙하지 않은 음성들이었다.

"여기가 아파."

"그만해."

"하지 마."

"싫어."

목소리들이 시윤의 몸 안에서 울려 퍼졌다. 각각의 목소리에는 서로 다른 고통이 실려 있었다. 그녀는 꿈속에서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손등의 따끔함이 더욱 강해졌다. 마치 누군가 그녀의 피부를 뚫고 나오려는 것처럼.

수요일 아침, 시윤은 손등을 확인했다. 붉은 자리가 확실히 더 커져 있었다. 연고를 발라도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선명해진 것 같았다. 준호는 출근 준비를 하면서 시윤의 손등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스쳐 가는 표정을 시윤은 놓치지 않았다. 혐오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더 심해진 것 같은데?"

그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마치 시윤이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응."

"다른 병원 가봐. 큰 병원으로."

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준호가 나간 후,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등을 들여다보았다. 붉은 자리 가운데에 작은 점들이 있었다. 마치 모공이 막힌 것처럼. 아니, 모공이 아니었다. 뭔가 다른 것들이었다. 작은 구멍들처럼 보였다.

시윤은 손톱으로 살짝 긁어보았다. 그 순간, 피부 아래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시윤은 깜짝 놀라 손을 뗐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환상이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피부 아래에 뭔가 있는 걸까.

시윤은 손등을 다시 만져보았다. 이번에는 더 조심스럽게. 피부 아래 깊은 곳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 안에서 문을 두드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 문을 두드리는 게 아니라 나오려고 하는 것 같았다.

수요일 오후, 시윤은 대학병원 피부과를 찾았다. 병원 로비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각자의 병을 안고 온 사람들의 얼굴에는 어떤 불안이 새겨져 있었다. 시윤 역시 그들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여의사였다. 나이는 시윤과 비슷해 보였다. 그녀의 눈에는 앞선 의사와는 다른 예리함이 있었다.

"언제부터 시작됐나요?"

"이틀 전부터요."

의사는 시윤의 손등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돋보기를 들고 천천히 훑은 뒤, 특수한 조명까지 비추어가며 세심하게 관찰했다. 그녀의 집중하는 모습을 보며 시윤은 자신의 손등이 정말 심각한 상태인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들었다.

"다른 부위에도 있나요?"

시윤은 고개를 저었다. 의사가 시윤의 팔과 다리를 확인했다. 다른 곳은 아무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의사의 손이 닿을 때마다 시윤은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마치 접촉한 부위에서 무언가 전해지는 것 같았다.

"혹시 최근에 새로운 화장품이나 세제를 사용하셨어요?"

"아니요."

"스트레스는 어떠세요?"

시윤은 잠시 생각했다. 특별히 스트레스받을 일은 없었다. 회사 생활도 평범하고, 준호와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최근 들어 뭔가 달라지고 있다는 느낌은 있었다. 준호가 자신을 보는 시선이 예전과 다르다거나, 몸이 예전과 다르게 느껴진다거나.

"보통이요."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뭔가 의심스러운 기색이 있었다.

"일단 스테로이드 연고를 처방해 드릴 게요. 일주일 발라보시고 안 나아지면 다시 오세요."

시윤은 처방전을 받고 나왔다. 복도를 걸으면서 손등을 다시 보았다. 의사의 손이 닿았던 자리에서 또 다른 감각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번에는 더 복잡했다. 따끔함과 간지러움이 섞인, 그리고 그 아래로 무언가 꿈틀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새로운 연고를 발랐다. 스테로이드 연고는 이전 것보다 끈적했다. 피부에 발라도 잘 흡수되지 않고 하얀 막을 만들었다. 시윤은 그 막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막 아래에서는 지금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까. 보이지 않는 그 이면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그날 저녁, 준호와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시윤은 물었다. 갑작스럽게 떠오른 질문이었다.

"준호씨, 어릴 때 다친 적 있어?"

"다친 적?"

준호가 젓가락을 든 손을 멈추고 그녀를 보았다. 그의 눈에 잠시 경계하는 기색이 스쳤다.

"응. 손에."

준호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왜?"

"그냥. 궁금해서."

준호는 잠시 생각하더니 왼손 손바닥을 보여주었다. 작은 흉터가 있었다. 시윤은 그제야 그 흉터를 제대로 본 것 같았다. 분명 전에도 봤을 텐데, 왜 기억나지 않았을까.

"초등학교 때 칼에 베였어. 사과 깎다가."

시윤은 그 흉터를 유심히 보았다. 희미하지만 선명한 선이 손바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 선을 보는 순간,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마치 자신도 똑같은 상처를 입은 적이 있는 것 같은.

"아팠어?"

"당연히 아팠지. 엄청 피가 났어."

준호의 목소리에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섞여 있었다. 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의 손등을 보았다. 붉은 자리가 준호의 흉터와 비슷한 모양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직선이 아니라 약간 구부러진, 마치 칼날을 피하려다 만들어진 것 같은 모양이었다.

"시윤아"

준호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에 없던 무게가 실려 있었다.

"응?"

시윤이 고개를 돌리자, 준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 안에서 시윤은 자신이 본 적 없는 준호의 모습을 발견했다.

"너 요즘 이상해."

그 말에 시윤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준호의 눈동자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걱정과 짜증이 겹쳐 있었고, 그 아래에는 마치 두려움에 가까운 무엇이 조용히 가라앉아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혐오가 있었다.

"이상하다는 게 무슨 뜻이야?"

시윤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마치 다른 사람의 목소리 같았다.

"자꾸 손등만 보고, 밤에도 계속 만지고, 그리고······"

준호는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그어진 듯, 공기가 묘하게 달라졌다. 마치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뭐?"

시윤이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더 강하게.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찍 자자."

그는 식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의 움직임이 평소보다 급했다. 마치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날 밤, 시윤은 또다시 이상한 꿈을 꾸었다.

이번에는 어린 시절의 자신이었다. 작은 손으로 사과를 깎고 있었고, 순간 칼날이 미끄러지며 손바닥을 스쳤다. 피가 흐르고 고통이 밀려왔지만, 그 고통이 정말 자신의 것인지 시윤은 확신할 수 없었다. 꿈속에서도 그 손은 자신의 손 같지 않았다. 더 크고, 더 거칠었다. 남자의 손 같았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 손등은 이상하리만큼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마치 꿈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손등에서는 전에 없던 새로운 감각이 일어나고 있었다.


# 2.

목요일 아침, 시윤은 손등의 변화를 확인했다. 붉은 자리가 이제 손가락 끝까지 번져있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색깔이 균일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어떤 부분은 진한 빨강이고, 어떤 부분은 연한 핑크였다. 마치 여러 겹의 상처가 겹친 것 같았다. 각각의 색깔마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했다.

시윤은 새로운 실험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길, 아침 햇살이 아스팔트 위에서 아지랑이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출근길 사람들의 발걸음은 여전히 바빴지만, 시윤의 걸음은 평소보다 느려져 있었다.

지하철 안에서 그녀는 일부러 손등이 드러나도록 앉았다. 차가운 금속 손잡이를 잡을 때마다 붉은 자리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가 그녀의 손을 힐끔 바라보더니 이내 조용히 자리를 옮겼다. 그는 자연스럽게 보이려 했지만, 시윤은 그 속에서 미묘한 거부감을 놓치지 않았다.

그 순간, 시윤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처음엔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그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바로 그것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 그녀를 덮쳐왔다. 그건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전혀 낯선 누군가의 감정 같았다. 어딘가에서 흘러들어온 체념과 외로움, 그리고 그 아래에 숨어있는 깊은 분노였다.

'사람들이 피하는 게 당연해. 나라도 저 사람들처럼 피했을 거야.'

그 생각이 시윤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그녀의 생각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회사에 도착해서 동료들과 마주쳤다. 사무실은 평소와 다름없이 복사기 소리와 전화벨 소리, 키보드 치는 소리로 가득했다. 하지만 시윤에게는 모든 소리가 평소보다 크게 들렸다. 마치 자신을 향한 시선들과 함께 증폭되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먼저 만난 사람은 인사팀의 혜진이었다. 혜진은 언제나 따뜻한 미소를 지은 채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타입이었다. 그녀의 책상 주변에는 항상 작은 화분들이 놓여 있었고, 달콤한 핸드크림 냄새가 은은하게 났다.

"어머, 시윤아, 손 어떻게 된 거야?"

혜진의 목소리에는 진짜 걱정이 섞여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서 시윤은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 호기심이나 불편함이 아닌, 순수한 걱정이었다.

시윤은 손등을 보여주었다.

"알레르기 반응인 것 같아."

혜진이 시윤의 손등을 자세히 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건드려보았다. 혜진의 손가락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손톱은 연한 핑크색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손가락 끝에는 시어버터 핸드크림의 은은한 향기가 묻어났다.

그 순간, 시윤의 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혜진의 손가락이 닿은 자리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이전의 따끔함과는 완전히 다른 감각이었다. 부드럽고 포근한, 마치 엄마의 손길 같았다. 피부 아래로 스며들어오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위로였다. 마치 혜진의 마음이 직접 전해지는 것 같았다.

"아파?"

혜진이 물었다. 시윤은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기분이었다. 피부 아래에서는 따뜻한 기운이 천천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의사는 뭐래?"

"스트레스나 접촉성 피부염이래."

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표정에는 판단이나 거부감이 전혀 없었다. 그저 안타까움과 걱정만이 있을 뿐이었다.

"요즘 일이 많긴 하지. 몸조심해."

혜진이 자리로 돌아간 후, 시윤은 손등을 다시 보았다. 혜진이 만진 부분의 색이 조금 옅어진 것 같았다. 신기했다. 어떤 사람의 손길은 상처를 치유하고, 어떤 사람의 손길은 상처를 더 깊게 만드는 것일까.

점심시간에 시윤은 회사 구내식당에서 직장 선배인 민수와 마주쳤다. 구내식당은 형광등 불빛과 스테인리스 스틸 테이블, 그리고 여러 음식 냄새가 뒤섞인 전형적인 직장 식당의 분위기였다. 민수는 40대 중반의 과장으로, 평소에도 시윤에게 관심을 보이곤 했다. 그의 관심은 늘 조금 과도했고,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구석이 있었다.

"손은 왜 그런 거야?"

민수가 물었다. 그는 시윤의 손등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는 걱정보다는 호기심이 더 강했다. 마치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시윤은 같은 대답을 했다. 민수가 시윤의 손을 보려고 다가왔다. 그의 몸에서는 담배 냄새와 진한 애프터셰이브 로션 냄새가 섞여서 났다.

"내가 한번 봐도 괜찮을까?"

민수의 손이 시윤의 손목을 잡았다. 그의 손은 큰 편이었고,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있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세게, 조금 더 오래 잡고 있었다.

그 순간 시윤은 몸이 경직되었다. 민수의 손길에서 전혀 다른 감각이 올라왔다. 끈적하고 무거웠으며, 어딘지 모르게 탐욕스러운 기운이 스며 있었다. 그의 손길은 치료나 위로가 아닌 다른 목적을 가진 것 같았다. 시윤의 손등에서 갑자기 가려움이 시작되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려웠다. 동시에 피부 아래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 생각보다 상태가 꽤 심각하네. 병원은 갔어?"

민수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시윤은 대답할 수 없었다. 가려움이 너무 심했다. 그리고 그 가려움 속에는 다른 감각들이 얽혀 있었다. 혐오감 가득한 기억들, 그러나 그것들은 시윤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어딘가로부터 흘러들어온, 낯선 타인의 기억들이었다. 누군가 원하지 않는 접촉을 당했을 때의 기억, 거부하고 싶었지만, 거부할 수 없었던 순간들의 기억이었다.

시윤은 재빨리 손을 빼냈다.

"죄송해요. 갑자기 가려워서."

민수는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여전히 뭔가 아쉬워하는 빛이 남아있었다.

"아, 미안. 내가 너무 세게 잡았나?"

시윤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로 돌아왔다. 손등을 보니 민수가 만진 부분이 더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마치 화상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부분에서는 여전히 불쾌한 감각이 맴돌고 있었다.

오후에 시윤은 회사 화장실에서 손등을 찬물에 식혔다. 화장실 거울은 형광등 불빛을 차갑게 반사하고 있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손등의 가려움은 여전했다. 찬물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일시적으로 진정되는 듯했지만, 곧 다시 돌아왔다.

그때 화장실 문이 열리고 경리팀의 수연이 들어왔다. 수연은 시윤보다 몇 살 어린 후배로, 평소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그녀는 늘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위축된 듯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언니, 괜찮으세요?"

수연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고 조심스러웠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최대한 작게 만들려고 하는 듯한 말투였다.

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한번 봐도 될까요?"

시윤은 손등을 보여주었다. 수연이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살펴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남다른 이해심이 담겨 있었다.

"만져봐도 돼요?"

수연이 물었다. 시윤은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연의 손가락이 시윤의 손등에 닿았다.

이번에는 또 다른 감각이었다. 차갑고 떨리는, 그리고 어딘가 슬픔이 묻어나는 감각이 스쳐 갔다. 수연의 손끝은 약간 거칠었고, 손톱은 너무 짧게 깎여 있었다. 그 손길에서는 오랫동안 참아온 고통의 흔적이 느껴졌다.

그 순간, 시윤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리움에 가까웠고, 동시에 누구 하나를 꼭 끌어안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다. 마치 수연의 오랜 외로움과 상처가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수연의 손가락이 시윤의 손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럴 때마다 시윤의 피부 아래에서는 낯선 기억들이 조용히 스며 나왔다. 누군가를 온전히 보호하고 싶었던 순간들, 그리고 그 사람의 아픔을 대신 짊어지고 싶었던 기억들이었다. 그 기억들은 분명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하면서도, 이상하게도 마음 깊은 곳에서 익숙한 울림으로 되살아났다.

"저도 어릴 때 이런 적 있었어요."

수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오래된 상처의 흔적이 배어 있었다.

"이런 적?"

"알레르기. 아니, 정확히는 알레르기가 아니었는데······ 스트레스받으면 몸에 붉은 자국이 생겼어요."

시윤은 수연을 바라보았다. 수연의 눈에 무언가 깊은 슬픔이 어려 있었다.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쌓여온,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슬픔이었다.

"지금은 괜찮아?"

"네. 지금은요. 그때는, 집에 문제가 있었거든요."

수연이 말을 멈췄다. 시윤은 더 묻지 않았다. 수연의 손길은 그저 스쳐 가는 접촉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어린 시절의 두려움과 집으로 돌아가기 싫었던 마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시윤은 그 감정들이 자신의 안으로 조용히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수연이 손을 뗐을 때, 시윤의 손등에서 가려움이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붉은 자리도 조금 옅어진 것 같았다. 마치 수연의 이해심과 공감이 상처를 치유한 것 같았다.

"고마워, 수연아."

시윤이 말했다. 수연은 작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서로를 이해하는 사람들만이 나눌 수 있는 특별한 따뜻함이 있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요. 저는 그냥······"

수연이 나간 후, 시윤은 혼자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손등을 보니 확실히 변화가 있었다. 혜진이 만진 부분은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고, 수연이 만진 부분도 많이 나아졌다. 하지만 민수가 만진 부분은 여전히 빨갛고 부어있었다.

시윤은 문득 깨달았다. 사람마다 자신의 피부가 저마다 다르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어떤 사람의 손길은 조용한 위로처럼 다가와 상처를 덮어주고, 어떤 손길은 되레 아물지 않은 곳을 다시 덧내며 상처로 남는다는 것을. 몸은 기억하고 있었고, 피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든 접촉 속에는 각각의 사람이 가진 감정과 의도가 그대로 스며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준호는 어떨까? 그의 손길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저녁 7시가 넘어서야 시윤은 집으로 향했다. 아파트 복도의 차가운 공기와 형광등 불빛이 피로를 더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 준호는 아직 오지 않았다. 시윤은 손등에 연고를 바르고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손등을 바라보자, 오늘 있었던 일들이 고스란히 그 위에 새겨져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혜진의 따뜻함, 민수의 끈적한 감각, 그리고 수연의 깊고 조용한 슬픔까지—그 모든 감정이 피부에 남아, 마치 지워지지 않는 흔적처럼 느껴졌다.

준호가 돌아온 것은 밤 9시였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는 피곤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정장 차림 그대로였지만 넥타이는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다.

"어서 와."

시윤이 반갑게 맞이했다. 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소파 옆에 내려놓았다. 평소보다 더 지쳐 보였다.

"손은 어때?"

"조금 나아진 것 같아."

준호가 시윤 옆에 앉았다. 그리고 시윤의 손등을 보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에는 관심보다는 의무감이 더 많이 담겨 있었다.

"정말 나아진 것 같네."

준호의 손이 시윤의 손등에 닿았다. 그 순간 시윤은 몸을 움찔했다. 준호의 손길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예전과 달라져 있었다. 차갑고 딱딱한, 그리고 어딘지 지쳐있는 감각이었다. 마치 의무감으로 만지는 것 같았다. 시윤의 손등에서 다시 따끔함이 시작되었다.

"아직 아파?"

준호가 물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정말로 걱정하는 마음이 들어있지 않았다. 시윤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팠다. 준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피부 아래에서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찔러오는 것 같았다.

"준호씨."

시윤이 말했다.

"응?"

"요즘 힘들어?"

준호는 잠시 시윤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왜?"

"그냥. 피곤해 보여서."

준호는 대답하지 않고 TV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화면에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그 소리조차 둘 사이의 침묵을 메우지 못했다. 시윤은 자신의 손등을 보았다. 준호가 만진 부분이 다시 빨갛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밤 11시, 시윤은 잠들기 전에 화장실에서 손등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하루 동안 만난 사람들의 흔적이 모두 거기에 있었다. 마치 감정의 지도 같았다. 시윤은 문득, 자기 피부가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흡수하는 스펀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뜻한 감정은 위로가 되어 마음을 감싸주고, 차갑고 날카로운 감정은 상처처럼 남아버렸다. 그렇다면, 그녀 자신의 감정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시윤은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는 오래전부터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한 얼굴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 아래, 손등의 붉게 물든 자국을 바라보았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모든 감정이, 혹시 전부 타인에게서 온 것은 아닐까? 자신만의 감정, 고유한 감정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긴 하는 걸까? 거울 속 얼굴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 밤, 시윤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여러 명의 '자신'을 마주했다. 혜진을 닮은 자신, 수연을 닮은 자신, 민수와 닮은 자신, 그리고 준호를 닮은 자신까지—각기 다른 표정과 분위기를 지닌 모습들이 그녀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다른 사람이기도 했고, 동시에 모두 시윤 자신이기도 했다. 다른 표정, 다른 눈빛, 다른 감정을 담고 있었지만, 그 얼굴은 분명 그녀 자신의 것이었다.

꿈속에서 시윤은 물었다. "진짜 나는 누구야?" 하지만 답은 들리지 않았다. 다만 여러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질 뿐이었다. 그리고 시윤은 깨달았다. 어쩌면 답을 찾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질문을 계속 던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 3.

금요일 아침, 욕실의 차가운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시윤은 이상한 변화를 발견했다. 손등의 붉은 자리에 작은 글씨 같은 것들이 나타나 있었다. 처음에는 혈관이 비쳐 보이는 줄 알았지만, 자세히 보니 글씨였다. 한글이 아닌, 영어도 아닌, 알 수 없는 문자들이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니 눈 아래 다크서클이 짙어져 있었다. 어젯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탓이었다. 시윤은 서랍에서 돋보기를 꺼내 손등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글씨는 너무 작아서 읽을 수 없었지만, 분명히 무언가 쓰여 있었다. 마치 피부 아래에서 누군가 펜으로 쓴 것 같았다.

"이상하네."

시윤은 손등을 만져보았다. 글씨가 있는 부분을 손끝으로 누르자, 아주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마치 그 글씨들이 살아 숨 쉬는 존재인 듯, 조용히 떨고 있는 것 같았다. 혈관 아래로 무언가가 흐르는 듯한 감각도 있었다.

지하철 2호선 아침 출근길. 평소보다 붐비는 차량에서 시윤은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 지현을 만났다. 지현은 시윤을 알아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시윤아! 진짜 오랜만이다."

지현은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화장도 진하게 했다. 회사원 특유의 예리함이 눈가에 서려 있었지만, 눈웃음만은 예전 그대로였다.

"지현아, 정말 오랜만이야."

시윤이 대답했다. 지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시윤의 손등으로 향했다. 그 순간 시윤은 본능적으로 손을 감추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어머, 손은 왜 그런 거야?"

"알레르기야. 별거 아니야."

지현이 시윤의 손을 가까이서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표정이 점차 진지해졌다.

"이상하다. 이거 뭔가 예전에 봤던 것 같은데."

"봤던 것 같다고?"

시윤의 목소리에 긴장이 묻어났다. 지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갑자기 손뼉을 쳤다.

"아, 맞다! 우리 고등학교 때 미술 시간에 선생님이 보여주신 책에서 봤어. 뭐더라······ 아, 피부에 나타나는 기억 현상?"

시윤의 심장이 빨라졌다. 지하철의 덜컹거리는 소음조차 멀게 들렸다.

"기억 현상?"

"응. 정확한 이름은 기억 안 나는데, 뭔가 심리적 트라우마가 피부에 글씨나 그림으로 투영되는 현상이래. 물론 의학적으로 증명된 건 아니고, 그냥 도시 전설 같은 거였지만."

지현의 말을 들으며 시윤은 자신의 손등을 다시 보았다. 작은 글씨들이 더 선명해진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의 시선을 받자 더욱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혹시 그 책 제목 기억나?"

"글쎄······ 뭐였지? '몸의 기억' 뭐 이런 거였나?"

지현은 생각에 잠겼다가 아쉬운 듯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어. 너무 오래됐어. 하지만 분명히 그런 내용이 있었어."

회사에 도착한 후, 시윤은 업무에 집중할 수 없었다. 손등의 글씨들이 계속 신경 쓰였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그녀는 인터넷에서 '피부 기억 현상'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몇 가지 자료가 나왔지만 대부분 미신이나 도시 전설로 분류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중 하나의 글이 시윤의 눈길을 끌었다. 어떤 심리학자가 쓴 논문의 초록이었다.

"피부는 몸의 가장 큰 기관이면서 동시에 외부와의 접촉면이다. 모든 물리적, 정서적 접촉이 피부를 통해 이루어지며, 때로는 이러한 접촉의 기억이 피부에 각인되기도 한다. 특히 강한 감정을 동반한 접촉의 경우 피부 세포에 일종의 '기억 흔적'을 남길 수 있다는 이론이 있다."


시윤은 글을 계속 읽었다.

"이러한 현상은 주로 감정적으로 민감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며, 다른 사람의 감정을 강하게 흡수하는 체질의 사람들에게서 더 자주 관찰된다. 피부에 나타나는 글씨나 그림은 대부분 무의식적인 기억의 발현으로 여겨진다."


시윤은 컴퓨터 화면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손등을 보았다. 글씨들이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더욱 진해지는 것 같았다.

점심시간, 시윤은 회사 근처 시립도서관으로 향했다. 오래된 건물 특유의 묵은 종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몸의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검색해서 몇 권의 책을 찾았다. 그중 하나가 지현이 말 한 책인 것 같았다.

조용한 열람실 구석에 앉아 책을 펼쳐 보니 실제로 피부에 나타나는 기억 현상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여러 사례와 함께 상세한 설명이 나와 있었다.

"사례 1 : 32세 여성, 어릴 적 성폭력 피해자. 팔뚝에 가해자의 이름이 붉은 글씨로 나타남."

"사례 2 : 28세 남성, 교통사고로 친구를 잃음. 가슴에 친구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나타남."

"사례 3 : 45세 여성, 어머니와의 갈등으로 인한 트라우마. 손등에 어머니의 손 글씨가 나타남."

시윤은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모든 사례가 강한 감정적 충격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다른 사람과의 접촉으로 인한 것이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피부에 나타나는 기억은 단순히 과거의 재현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 진행형의 감정적 상태를 반영한다. 즉, 그 사람이 현재 어떤 감정적 상태에 있는지, 어떤 기억들이 그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다."

시윤은 책을 덮고 자신의 손등을 보았다. 글씨들이 더욱 선명해져 있었다. 이제는 몇 글자 정도는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첫 번째 글자는 '엄'이었다. 두 번째는 '마'.

시윤은 눈을 크게 떴다. '엄마'라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시윤의 어머니는 10년 전에 돌아가셨다. 왜 지금 어머니와 관련된 글씨가 나타나는 걸까? 시윤은 기억을 더듬었다. 어머니와 함께한 마지막 며칠, 병원 침대 곁에서 손을 잡고 있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고, 손등 위로 따뜻한 감각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손길과 닮은 온기였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온도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시윤을 놀라게 했다.

"시윤 씨."

누군가 시윤을 불렀다. 시윤은 고개를 들었다. 도서관 사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괜찮으세요? 얼굴이 창백해 보이는데."

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하지만 실제로는 괜찮지 않았다. 손등 위로는 끊임없이 감각이 피어올랐다. 어머니의 목소리, 스치듯 남아있는 체취, 마지막으로 남긴 말 한마디까지—그 모든 것이 피부 아래에서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시윤아, 엄마가 없어도 혼자 잘 살아야 해."

그 말씀이 시윤의 귓가에 생생하게 들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미 10년 전에 돌아가셨다. 시윤은 급히 도서관을 나왔다. 밖의 찬 가을 공기가 얼굴에 닿았지만, 손등은 여전히 뜨거웠다. 어머니의 체온 같은 온기가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시윤은 손등을 다시 보았다. '엄마' 다음에 다른 글씨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사랑', '미안', '보고 싶어'. 모두 어머니와 관련된 말들이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자주 하시던 말씀들이 분명했다.

오후 내내 시윤은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손등에서는 여전히 어머니의 기억들이 끊임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걷던 골목길, 함께 웃고 울었던 따뜻한 순간들, 그리고 병실에서 어머니가 아파하던 시간까지—그 모든 기억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되살아났다.

그 기억들은 흐릿하지 않았다. 마치 바로 어제 일어난 일처럼 선명했고, 피부를 타고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다.

퇴근 시간이 되자 시윤은 집으로 가는 대신 어머니의 무덤이 있는 서울 시립 추모 공원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가는 길이었다. 마지막으로 간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려 공원 입구로 향하는 길,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공원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도시의 소음이 멀어지고, 대신 바람 소리와 나뭇잎 스치는 소리만 들렸다. 어머니의 묘비 앞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지고 있었다. 묘비에 새겨진 어머니의 이름을 보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시윤이 묘비 앞에 서자 손등의 글씨들이 더욱 선명해졌다. 이제는 문장으로 읽을 수 있었다.

"시윤아, 엄마를 용서해 줘."

시윤은 글씨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자주 되뇌던 말들이었다. 자신을 제대로 돌봐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더 좋은 엄마가 되어주지 못해 늘 마음에 걸린다고—그 마지막 목소리가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엄마······"

시윤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차가운 저녁 공기 속에서도 그녀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그러자 손등에서 더 많은 글씨가 나타났다.

"엄마는 항상 너를 사랑했어."

"네가 자랑스럽다."

"혼자 잘 살고 있구나."

"하지만 너무 혼자 모든 것을 견디려고 하지 마."

시윤은 손등을 바라보다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의 마지막 말들이,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야 자신의 마음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것은 10년 동안 피부 아래 숨어있던, 작고도 단단한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묘지를 둘러싼 침묵 속에서, 시윤은 처음으로 어머니의 부재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동시에 그녀가 남긴 사랑이 여전히 자신과 함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해가 완전히 진 후, 시윤은 묘지를 떠났다. 손등의 글씨들은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이제는 따끔하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했다.

집에 돌아왔을 때 준호가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갔었어? 연락도 안 되고."

준호의 목소리에 걱정이 섞여 있었다. 시윤은 자신의 손등을 보여주었다.

"준호씨, 이거 봐."

준호가 시윤의 손등을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게 다 뭐야? 글씨가 쓰여 있잖아."

"이게 모두 엄마의 말이야."

시윤이 말했다. 준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에는 의심과 당황함이 뒤섞여 있었다.

"엄마? 어머니는 돌아가신 지 오래됐잖아."

"응. 하지만 엄마의 기억이 내 피부에 남아있었어."

시윤은 준호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지현과의 만남, 도서관에서 우연히 찾은 책, 피부에 남는 기억에 관한 설명, 그리고 묘지에서 어머니의 존재를 느꼈던 순간까지—그녀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진솔하게 전했다.

준호는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의구심이 남아있었다.

"그런 게 정말 가능해?"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분명한 건 이 글씨들이 진짜라는 거야."

시윤은 손등의 글씨를 다시 보았다. 어머니의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준호도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해할 수 없어. 하지만······ 너에게 중요한 일이라는 건 알겠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시윤은 준호의 손을 잡았다. 준호의 손길에서는 여전히 지친 감정이 느껴졌지만, 그 안에 작은 따뜻함도 있었다.

그날 밤, 시윤은 어머니 꿈을 꾸었다. 어머니가 시윤의 손을 잡고 말씀하시는 꿈이었다. 어린 시절 살던 집 마당에서였다. 어머니의 얼굴은 아프기 전 모습이었다.

"시윤아, 이제 알겠니? 너는 혼자가 아니야. 엄마의 사랑이 항상 너와 함께 있어."

꿈속에서 어머니의 목소리는 생전 그대로였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 시윤은 자신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그 위에 선명하게 남아있던 글씨들은 조금 옅어져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마치 그 글자들이 어머니의 사랑을 잊지 말라고, 언제나 그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조용히 상기시켜 주려는 듯했다.

새벽 창가에 앉아 손등을 바라보며, 시윤은 깨달았다. 그녀의 피부는 단순히 감각을 느끼는 신체 기관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억을 저장하고, 감정을 통과시키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어주는 통로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느껴온 모든 감정—그 따뜻함과 슬픔, 두려움과 떨림—그 모든 것들은 타인의 것만이 아니었다. 결국은 자신 안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던 기억의 발현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았다. 어머니의 기억이 이렇게 생생하게 되살아났다면, 다른 사람들의 기억은? 혜진의 따뜻함, 수연의 슬픔, 민수의 탐욕, 준호의 지침—그것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 4.

토요일 아침, 욕실의 차가운 거울 앞에서 시윤은 전신을 확인해 보았다. 손등에서 시작된 변화가 다른 곳으로도 번져있었다. 손목, 팔뚝, 어깨로 이어지는 붉은 선들을 따라 작은 글씨들이 빼곡히 쓰여 있었다.

시윤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옷을 벗었다. 팔 전체에 글씨들이 새겨져 있었다. 어떤 것은 한글이고, 어떤 것은 영어였다. 심지어 어린아이의 삐뚤삐뚤한 글씨도 있었다. 마치 여러 명이 동시에 그녀의 피부 위에 펜으로 쓴 것 같았다.

"시윤아, 놀아줘."

"언니 미워."

"함께 있어 줘."

"혼자 두지 마!"

그 말들은 모두 시윤의 기억 속에 머물러 있던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시윤에게 건넸던 말들, 그리고 시윤이 마음속으로만 삼키고 끝내 말하지 못했던 말들이었다. 그 모든 말들이 글씨가 되어, 그녀의 몸에 하나둘 새겨졌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많은 말들을 혼자 품고 살아왔을까. 시윤은 각 글씨를 하나씩 따라 읽어보았다. 어떤 것은 따뜻했고, 어떤 것은 차가웠다.

그러던 중, 시윤은 오른쪽 어깨에서 유독 진하게 남아있는 글씨 하나를 발견했다. 다른 문장들과는 결이 달랐고, 그 무엇보다 선명하고 깊었다.

"시윤아, 도와줘."

그 글씨를 보는 순간 시윤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5년 전 자살한 친구 미영의 마지막 문자였다. 그때 시윤은 야근에 치여 바빠서 답장하지 못했었다. 다음 날 아침 미영의 부음을 들었을 때의 충격과 죄책감을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시윤은 떨리는 손으로 그 글씨를 만져보았다. 차갑고 아팠다. 미영의 절망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5년이 지난 지금도 그 죄책감이 피부 아래 숨어있었다.

"미안해, 미영아."

시윤이 혼잣말을 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자 글씨 아래에 새로운 글자들이 나타났다.

"괜찮아. 네 잘못 아니야."

시윤은 눈물이 났다. 그것은 미영이 살아있을 때 자주 하던 말이었다. 언제나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던 따뜻한 친구였다.

침실에서 준호가 깨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시윤은 서둘러 옷을 입었다. 하지만 목 부분은 가릴 수 없었다. 목에도 글씨들이 올라와 있었다.

"시윤아, 괜찮아?"

준호가 침실에서 나오며 물었다. 시윤의 목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의 얼굴에는 어제보다 더 큰 당황함이 서려 있었다.

"목에도 생겼네?"

"응."

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준호가 가까이 와서 시윤의 목을 자세히 보았다.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이거 글씨야?"

"응. 모두 기억들이야."

준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혼란이 뒤섞여 있었다.

"시윤아, 이거 정상이 아니야. 큰 병원에 가봐야겠어."

"준호씨."

시윤이 준호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시윤의 팔에 새로운 글씨가 나타났다.

"나는 너를·······"

하지만 그 글씨는 진한 붉은색이 아니라 연한 회색이었다. 마치 쓰다가 멈춘 것 같았다. 시윤은 준호를 바라보았다. 준호의 눈에서 사랑을 읽기 어려웠다. 걱정과 두려움, 그리고 어딘지 거리감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준호조차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니, 어쩌면 자신이 변해가는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호씨, 솔직히 말해줘."

시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뭘?"

"나 때문에 힘들어?"

준호는 잠시 침묵했다. 거실에 아침 햇살이 들어와 둘 사이의 침묵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왜?"

"요즘 너 너무 이상해. 갑자기 손에 뭐가 생기더니, 이제는 온몸에 글씨가 나타나고. 그리고 자꾸 이상한 말을 해."

준호의 목소리에 피로가 섞여 있었다. 마치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를 떠맡은 사람의 목소리 같았다.

"이상한 말?"

"응. 다친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든지, 어릴 때 어땠냐고 묻는다든지. 예전에 너는 그런 거에 관심 없었잖아."

준호의 말을 들으며 시윤은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의 기억과 감정을 받아들이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예전의 모습과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준호는 그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예전의 내가 더 좋았어?"

시윤이 물었다. 목소리에 상처받은 감정이 묻어났다. 준호는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예전에 너는······ 편했어. 복잡하지 않았고, 감정적이지도 않았고."

"지금은?"

"지금은 모르겠어. 네가 누군지 잘 모르겠어."

시윤의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동시에 이해할 수 있었다. 시윤도 자신이 누군지 모르겠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준호씨, 나 잠깐 혼자 있고 싶어."

시윤이 말했다. 준호는 안도하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외출 준비를 했다.

"어디 가?"

"친구들 만나러. 늦게 들어올 거야."

준호의 답변에는 어딘지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시윤은 그것을 느꼈지만 붙잡지 않았다.

준호가 나간 후, 시윤은 혼자 남았다. 아파트 안의 정적이 그녀를 둘러쌌다. 그녀는 다시 거울 앞에 섰다. 전신 거울에 비친 모습은 낯설었다.

시윤은 각각의 글씨를 하나씩 읽어보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들, 학창 시절의 기억들, 직장에서의 기억들, 연애했던 기억들—모든 기억이 거기에 있었다.

"넌 정말 착하다."

"시윤이는 믿을 만해."

"너 없으면 어떡하지?"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

좋은 기억들도 있었고, 아픈 기억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시윤을 만든 조각들이었다.

그리고 시윤은 몸에 새겨진 모든 글씨가 결국은 자신의 일부라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생겨난 기억들이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느낀 것은 자신이었다. 타인의 말이었지만, 그 말들은 자신 안에서 머물며 감정이 되었고, 경험이 되었다.

그녀는 왼쪽 가슴 위에 있는 글씨 하나를 발견했다.

"나는 누구인가?"

그 질문을 보는 순간, 시윤은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찾고 있던 것은 다른 사람들과 완전히 분리된 고유한 정체성이 아니었다. 자신은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사랑, 때때로 느꼈던 미움, 걱정스러운 눈빛, 그리고 말로 다 전해지지 않았던 슬픔까지.

시윤은 거울 속 자신에게 말했다.

"나는 하나가 아니야."

그 말을 입에 담는 순간, 시윤의 몸에 새겨졌던 모든 글씨가 잠시 밝게 빛났다. 그리고 이내 하나씩 색이 바뀌기 시작했다. 사랑은 분홍색으로, 슬픔은 파란색으로, 기쁨은 노란색으로, 분노는 빨간색으로, 걱정은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시윤의 몸은 마치 무지개처럼 변해갔다. 서로 다른 감정들이 각자의 색을 띠고 조용히 번져나갔다. 그 순간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수연이었다.

"언니, 괜찮으세요? 어제 회사에서 안 좋아 보이셨는데."

수연의 목소리는 걱정으로 가득했다. 그 따뜻함이 전화기를 통해 전해졌다.

"수연아, 고마워. 나 괜찮아."

"정말요? 목소리가 다른 것 같은데."

시윤은 거울 속 자신을 보며 웃었다. 무지개색 글씨들로 뒤덮인 그녀의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수연아, 나 지금 깨달은 게 있어."

"뭘요?"

"나는 나 혼자만의 존재가 아니라는 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존재라는 거."

수연은 잠시 침묵했다.

"언니,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니야. 좋은 일이야. 드디어 내가 누군지 알게 됐어."

시윤은 수연에게 자신의 변화에 관해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믿기 어려워하던 수연도 점차 시윤의 목소리에 담긴 진심을 느끼며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럼, 언니 몸의 글씨들이 모두 다른 사람들과의 기억인 거예요?"

"응. 그리고 그 기억들이 모여서 지금의 나를 만든 거야."

"신기해요. 그럼, 저도 언니 몸에 있을까요?"

시윤은 오른팔을 보았다. 거기에 수연과 관련된 글씨가 있었다.

"언니는 혼자가 아니야!"

"있어. '언니는 혼자가 아니야!'라고 쓰여 있어."

수연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제가 언니한테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에요."

"나도 너한테 하고 싶었던 말이야."

둘은 잠시 침묵했다. 따뜻한 침묵이었다.

"수연아, 고마워."

"뭐가요?"

"네가 있어서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

전화를 끊은 후, 시윤은 다시 거울을 보았다. 몸의 글씨들이 이제는 따끔하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했다. 자신을 구성하는 소중한 기억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윤은 감정과 신체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살아오며 겪은 감정과 기억이 쌓여 형성된 존재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곧 자신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이르렀다.

# 5.

10일이 지났다. 시윤의 몸에는 이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글씨들이 새겨져 있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이제는 익숙해졌다. 오히려 글씨가 없는 부위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회사 복도를 지날 때면 동료들의 시선이 피부 위로 기어다니는 듯했다. 목과 손목에 보이는 글씨들 때문에 사람들은 한 발짝씩 뒤로 물러섰다. 어떤 이들은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쳐다봤고, 어떤 이들은 마치 전염병 환자를 대하듯 무서워했다.

"시윤 씨, 괜찮습니까?"

상사가 시윤을 별도로 불러 물었다. 사무실 유리창 너머로 스며드는 오후 햇살이 책상 위에 길게 뻗어 있었다.

"네,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 몸의 글씨들은 뭡니까? 타투입니까?"

시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었다.

"일종의 피부 질환입니다."

"병원은 가보셨습니까?"

"네."

"치료는 가능합니까?"

시윤은 잠시 생각했다. 치료라는 말이 어색했다. 이것이 질병인가? 아니면 자신의 새로운 모습인가?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상사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걱정 뒤로 불편함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혹시 휴가가 필요하면 말씀하십시오."

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말로 이것을 치료해야 하는 것일까?

점심시간에 혜진이 시윤에게 다가왔다. 구내식당의 형광등 불빛이 차가웠다.

"시윤아, 괜찮아?"

혜진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 있었다.

"응, 괜찮아."

"글씨들이 더 많아진 것 같은데."

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새로 생긴 글씨들이 아직도 따끔거렸다.

"혜진아, 나 이상하니?"

혜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플라스틱 포크를 만지작거리며.

"이상하긴 하다. 하지만 무서운 이상함은 아니야. 그냥······ 신기한 이상함 정도?"

"신기하다고?"

"응. 마치 네 몸에 네 인생이 다 쓰여 있는 것 같아. 살아온 이야기들이."

혜진의 말을 들으며 시윤은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고마웠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혜진 같지는 않았다. 지하철에서 사람들은 시윤을 피했다. 목에 보이는 글씨들 때문에 자리를 옮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차창에 비친 모습을 보며 시윤은 목도리로 글씨들을 가리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준호와 심각한 대화를 나눴다. 거실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시윤아, 우리 잠깐 떨어져 살자."

준호의 말에 시윤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왜?"

"너 너무 변했어. 예전 너와 완전히 달라졌어."

"어떻게?"

"일단 모습부터. 온몸에 글씨가 쓰여 있잖아. 그리고 성격도. 자꾸 이상한 말만 하고, 너무 감정적이고."

준호의 목소리에 피로가 섞여 있었다. 그의 눈에서 사랑보다는 부담스러움이 먼저 읽혔다.

"그게 나쁜 거야?"

"나쁘다는 게 아니야. 그냥······ 적응이 안 돼."

시윤은 준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서 사랑을 찾기 어려웠다. 대신 두려움과 거부감이 있었다. 가슴 한복판이 텅 비는 것 같았다.

"준호씨, 나는 여전히 시윤이야."

"아니야. 넌 이제 다른 사람이야."

준호의 말이 시윤의 가슴을 찔렀다. 하지만 동시에 깨달았다. 준호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자신은 정말로 예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럼, 예전의 나로 돌아가면 돼?"

"어떻게?"

"병원에서 치료받으면."

준호의 얼굴이 밝아졌다. 마치 구원의 소식을 들은 것처럼.

"정말? 치료가 가능한 거야?"

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치료가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치료받고 싶은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목구멍이 메마른 것 같았다.

그날 밤, 혼자 남은 시윤은 욕실 거울 앞에 섰다. 온몸의 글씨들을 하나씩 읽어보았다. 각각의 글씨가 자신의 일부였다. 자신을 만든 기억들이었다. 만약 이 글씨들을 모두 지운다면? 그러면 자신도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시윤은 손등을 보았다. 맨 처음 나타났던 '엄마'라는 글씨가 여전히 있었다. 그 글씨를 지운다는 것은 어머니와의 기억을 지운다는 뜻이었다. 갑자기 따뜻하고 부드러웠던 어머니의 손길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안 돼."

시윤이 혼잣말을 했다. 어머니의 기억은 지울 수 없었다. 미영의 기억도, 수연의 기억도, 혜진의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기억이 소중했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을 만든 재료들이었다.

다음 날, 시윤은 병원에 갔다. 하지만 치료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담을 받기 위해서였다. 병원 복도의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의사 선생님, 이런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시윤이 물었다. 의사는 시윤의 몸을 자세히 살펴본 후 대답했다.

"의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입니다. 하지만 완전히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치료가 가능합니까?"

"스테로이드 치료나 레이저 치료로 글씨들을 지울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의사가 말을 멈췄다. 그의 눈에서 무언가를 읽으려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환자분께서 정말로 치료를 원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시윤은 의사를 바라보았다. 의사의 눈에서 이해하는 빛을 발견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환자분의 표정을 보니 이 현상을 질병으로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 같거든요."

의사의 말이 맞았다. 시윤은 자신의 상태를 질병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새로운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선생님, 이 글씨들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칩니까?"

"아닙니다. 전염성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지도 않습니다."

"그럼, 제가 이대로 살아도 괜찮습니까?"

의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의학적으로는 문제없습니다. 다만 사회적으로는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의 말이 맞았다. 의학적으로는 문제없지만, 사회적으로는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선생님, 혹시 이런 분들이 더 있습니까?"

"공식적으로 보고된 사례는 없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몇 분 더 봤습니다."

시윤의 눈이 커졌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말입니까?"

"네. 모두 감정적으로 민감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자신의 상태를 받아들이고 살아가고 계시더군요."

그 말을 듣고 시윤은 마음이 편해졌다.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길에 시윤은 결정했다. 치료받지 않기로. 이 몸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거리의 네온사인들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 준호가 짐을 싸고 있었다.

"어디 가?"

시윤이 물었다.

"친구 집에서 당분간 있을 거야."

"치료받기로 했어."

시윤이 거짓말을 했다. 준호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말? 언제부터?"

"내일부터.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준호는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시윤은 그 안도감이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향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행이다. 빨리 예전 너로 돌아와."

시윤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준호가 나간 후, 시윤은 혼자 남았다. 거실이 갑자기 넓어 보였다. 거울 앞에 서서 무지개색 글씨들로 가득한 몸을 바라보았다.

"이게 나야."

시윤이 거울 속 자신에게 말했다.

"나는 하나가 아니다. 나는 여러 개의 기억과 감정이 모인 존재다. 그리고 그게 아름답다."

그 순간 몸의 모든 글씨가 환하게 빛났다. 마치 시윤의 결정을 축하하는 것처럼.

한 달이 지났다. 시윤은 더 이상 목도리로 글씨를 가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쳐다봐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했다. 회사에서 동료들이 물어보면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것은 제 기억들입니다.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과의 기억들."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하던 사람들도 점차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특히 수연과 혜진은 시윤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었다.

"언니, 정말 용기 있어요."

수연이 말했다.

"뭐가?"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요."

시윤은 웃었다. 용기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자신을 부정하는 것보다 받아들이는 것이 더 편했다.

어느 날 저녁, 시윤은 준호와 다시 만났다. 카페의 따뜻한 조명 아래에서 준호는 시윤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치료 안 받았어?"

"받지 않기로 했어."

"왜?"

"이게 나니까."

준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커피잔을 꽉 쥐고 있는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시윤아,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

"알아. 하지만 상관없어."

"나는 상관있어."

준호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그럼 헤어지자."

시윤이 말했다. 준호는 당황했다.

"뭐?"

"나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헤어지는 게 맞아."

준호는 한참 시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는 체념과 안도감이 동시에 스쳐 갔다.

"그래. 헤어지자."

1년 후의 어느 오후, 시윤은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몸의 글씨들은 여전히 늘어나고 있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새로운 경험을 할 때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때 한 아이가 시윤에게 다가왔다.

"아줌마, 팔에 쓰여 있는 것은 뭐예요?"

아이의 순진한 질문에 시윤은 웃었다.

"이건 내 이야기야."

"이야기?"

"응. 내가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 느꼈던 감정들의 이야기."

아이는 신기한 듯 시윤의 팔을 바라보았다.

"예뻐요."

아이의 말에 시윤의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 순간 손목에 새로운 글씨가 나타났다. 아이의 이름이었다.

아이가 엄마에게 달려가자, 시윤은 혼자 남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공원의 나무들이 붉은빛으로 물들어 갔다.

시윤은 몸을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글씨가 저마다의 색깔로 빛나고 있었다. 어머니의 이름, 친구들의 이름,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 그리고 오늘 만난 아이의 이름까지.

갑자기 옆 벤치에 누군가 앉았다. 시윤이 고개를 돌리자, 낯선 남자가 있었다. 그의 목에도 작은 글씨들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남자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안녕하세요."

시윤이 대답했다.

"저도 당신과 같아요."

남자가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

시윤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서 이해와 공감을 읽을 수 있었다. 새로운 만남의 설렘이 가슴속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시윤의 손등에 새로운 글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시윤은 그 글씨를 보며 미소 지었다. 공원에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그 불빛 아래에서 두 사람의 몸에 새겨진 글씨들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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