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은 오래전부터 이야기의 통로였다. 나는 단 한 번도 그것을 선택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어떤 이의 눈빛은 나를 하나의 문장으로 빚었고, 누군가의 손길은 그 문장을 서슴없이 지워버렸다. 나는 그렇게 해석되었고, 쉽게 오해되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내 안에 남겨진 이야기들이 과연 내 것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내가 느낀 고통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내가 받아들인 따뜻함과 차가움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나 자신도 끝내 알지 못했다. 질문은 많았으나, 대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피부 아래에 침잠한 감정들은 뚜렷한 언어로 정리되지 않았고, 그저 흐르며 또 다른 감각으로 변해갔다.
기억은 쉽게 사라지는 법이 없다. 그것은 살아 있는 것처럼 몸에 달라붙고, 피부에 스며들어 각자의 상처로 남는다. 어떤 기억은 숨을 막히게 했고, 어떤 기억은 무감하게 지나쳤다. 어떤 기억은 내 몸을 스쳐 타인의 것처럼 멀어졌으며, 또 어떤 기억은 깊숙이 침투해 결국 나의 일부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확신할 수 없었다. 내 안의 것들이 진짜 내 것인지, 아니면 타인의 잔여물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타인의 말로 나를 이해했고, 타인의 침묵 속에 나를 감췄다.
사람들은 종종 내게 물었다. 왜 그렇게 예민하냐고, 왜 그렇게 자주 아프냐고. 그러나 그것은 나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문제였다. 이 세계는 무딘 이들을 더 잘 품어주고, 감각하는 존재들을 외면한다. 나는 늘 그런 세계 속에서 웃는 얼굴로 버텨야 했고,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증명해야만 했다.
내 상처는 쉽게 과장으로 치부되었고, 내 무표정은 무례함으로 오해받았다. 그 오해들은 차곡차곡 쌓여 어느덧 내 얼굴이 되었고, 나는 나답지 않은 방식으로 살아야만 했다.
그러다 마침내 나는, 내 피부 아래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말로는 다 표현되지 않는 아픔과 문장에 담기지 않는 떨림,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고요함이야말로 나를 이루는 본질이라는 사실도 함께 알게 되었다. 그 깨달음 이후, 나는 내 몸이 기억하는 것들에 조금씩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내가 외면했던 감정들과 무심히 지나쳤던 신호들, 그리고 감추고 싶었던 진실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조용히 나를 일으켜 세웠고, 나는 그제야 비로소 나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 순간은 낯설고도 아팠지만, 분명히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시간으로 남게 되었다.
이제 나는 내 몸에 남은 이야기들을 다시 꺼내어 써 내려가려 한다.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누구의 목소리를 흉내 내지도 않으며, 오직 나의 말로, 나의 속도로, 나의 감정으로. 이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살아남은 사람이 전하는 조용하지만, 선명한 증언이다.
이 이야기는 나만의 것이면서도, 당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당신 또한 누군가의 말에 갇혔고, 또 어떤 말은 끝내 거부했으며, 말도 없이 지워졌던 순간들을 지나왔을 것이다. 그 공백들, 닿지 못한 감정들, 묻히고 잊힌 언어들이 이 소설의 한 줄 한 줄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단지 ‘읽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느껴지기 위해’ 여기에 있다.
피부 아래의 여자. 당신은, 지금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