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같은 분위기의 탄생
불행히도 대부분의 밥벌이들이 그렇듯이, 일이란 재미가 없다. 그들이 하는 일도 예외일리 없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속칭 노동요다.(k의 표현이다.) 일전에 여름휴가 기간에 썰렁한 사무실에 울려 퍼진 적도 있었지만, 본격적인 등장은 역시 야근과 주말근무를 밥 먹듯이 하던, 그해, 그 가을 무렵부터였다.
노동요, 즉 노래라는 것이 그렇듯이, 각자의 취향이라는 것이 있다. y는 그들 또래(적게는 9살, 많게는 띠동갑이다.)의 취향과 자신 취향의 접점에 있을 법한 음악을 생각해 틀었고, 개중에는 볼 빨간 사춘기의 노래도 있었다. 인기 순대로 볼4의 주옥같은 명곡이 이어졌고, ‘썸 탈 거야’라는 노래가 나오자 k가 말했다.
“이거 제가 전에 남자 친구 꼬실 때 부른 노래예요”
사무실 안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사무실에는 TMI와 TMT가 늘 넘쳐났다.(참고로 TMI는 Too much information의 약자이고 TMT는 Too much talk의 약자 되겠다.) 그렇게 된 이유라면, 무엇보다 직원들 간의 깨알 같은 수다가 넘친 탓이었다. 커뮤니케이션의 목적이 정보 교류와 감정 공유라면, 그 매개체는 구성원들의 함께한 경험 내지는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본인만의 진솔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도 많은 이야기를 한 나머지, 혹은 서로를 향한 신뢰가 극에 달한 나머지(..) 기어이 자폭성 신상공개 또는 다른 구성원의 개인 신상 취조(?)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어쩌면 필요 이상 너무 많은 것을, 그리고 알고 싶지 않은, 무엇보다 굳이 알 필요 없는 개인 신상들을 자의와 타의로 알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른바 (가)'족같은’ 분위기의 탄생이었다.
k의 얘기인즉슨 이랬다. 이전 남자 친구(우리끼린 정대세 내지 ‘그분'으로, k는 ‘그 시끼’라 통상 지칭한다.)와 만나게 된 계기란다. 친구 여럿이서 술을 먹고(...) 있었는데, 당시 그냥 남자 사람이던 ‘그분’도 그 자리에 있었단다. 술자리는 자연스레 노래방으로 이어졌고, 가서 별생각 없이 그 노래(썸 탈 거야)를 불렀는데, 대뜸 ‘그분’이 대놓고 작업을 걸어왔더란다. y와 c 그리고 j는 일동 탄식을 내뱉었다.
본인이야 꽃밭인 줄 알았겠지만, 우리가 보기엔 심히 가시밭 길뿐인, 고난의 행군을 택한, (정말 가련하기 짝이 없는) 그 전 남자 친구의 선택에 대한 애도의 표시였다. 반면, k의 얼굴에는 ‘뭐 그 정도야 까이 꺼죠.'라는 뉘앙스의 의미심장한 미소가 만연했다. k의 얘기를 듣자 하니, y도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소라의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였다.
당시는 연애의 초기였다. 당시 y의 연애란 것은 규정 이상 높게 만든 속도방지턱이 구비구비 기다리는 도로 위를 달리는 것과 같았다. 속도 내보려면, 속도방지턱이 사사건건 걸고넘어졌다. 넘는 순간순간마다 중력이 선사하는 불쾌감. 동시에 청각으로 전해지는 새 차 하부의 손상을 알리는 굉음. 그리고 그로 인한 심리적 충격. 그 무엇보다 y를 괴롭힌 건 과속은커녕 정규속도 조차 낼 수 없어 그저 참고 인내해야만 했던 자신의 처량한 처지였다. 이 악물고 어찌어찌 어영부영 몇 개 넘어가도, 눈 앞에 기다리는 것은 일렬횡대로 줄지어 늘어서 의기양양한 자태로 y를 기다리는 그들뿐이었다. 올 테면 와보라고. 이 길을, 결코 쉽지 않을게 뻔한 그 길을, 그리도 간절히 달려보고 싶다면 와봐.라고 마치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방지턱은 기실 종교 문제였고,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었다. 끝내 타협점을 찾지 못한 y커플은 그만 만나기로 하고 뒤돌아섰다. 야간 당직을 서던, 어느 날. y는 울적한 마음에 회사 강당에 있는 음향시설을 몽땅 켠 뒤 이소라의 노래를 오래오래 돌려 들었다. 그곳엔 오로지 y 혼자 뿐이었다.
y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이런저런 상념에 잠시 빠졌다. 그리곤 일부러 사무실에서 들으려고, 집에서 들고 온 거대한 블루투스 스피커에 이소라의, 문제의 그 노래를 틀었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그 노래는 이소라의 여러 노래 중에서도 특히나 구구절절한 노래다. 첫 소절부터 사연 많은 듯한 이소라의 목소리가 사무실의 공기를 채웠다. 상념에 취한 y를 깨운 건 c의 나지막한 한 마디였다.
"아.. 부장님.. 왜 저래..”
“네??????”
놀라 벌떡 일어난 y와 당황한 얼굴의 k는 역시나 황당해하는 얼굴의 c와 서로를 놀란 사슴 눈으로 쳐다봤다. 그리곤 c가 외쳤다.
“애절하다고요! 애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