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삶에게로 뛰어든 날, 죽음 위에 죽음이 피어나다.
이튿날 아랫배에 분홍색 반점이 여덟 개로 늘어났다. 어떤 것은 백 원짜리만 하고 또 어느 것은 완두콩만큼 작았다. 다음날은 열두 개, 그다음 날은 스무 개였다. 그것은 곧 온몸으로 퍼졌다.
김애란,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중에서
장미색 비강진은 겉으로 드러나는 부위에 별 이상이 없어 남들에게는 멀쩡해 보이는 병이었다...... 배 위의 반점이 분홍색일 때는 그냥 두드러기쯤으로 보였다. 처음에는 분홍빛이다 과일처럼 발갛게 무르익은 뒤- 검붉어졌다. 그러다 나중에 연한 갈색으로 변하며 비늘처럼 반질거렸다. 며칠 동안 같은 자리에 허물이 내려앉고 벗어지길 반복했다. 그 위에 다시 '인설'이라 불리는 살비듬이 내려앉아 흉하게 파들거렸다...... 피부 위 허물이 새살처럼 계속 돋아날 수 있다는 데 놀랐다. 그건 마치 '죽음'위에서, 다른 건 몰라도 '죽음'만은 계속 피어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겁이 많은 지용이가 마지막에 움켜쥔 게 차가운 물이 아니라 권도경 선생님 손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놓여요. 이런 말씀드리다니 너무 이기적이지요? 평생 감사드리는 건 당연한 일이고. 평생 궁금해하면서 살겠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지용이 손을 잡아주신 마음에 대해 그 생각을 하면 그냥 눈물이 날 뿐, 저는 그게 뭔지 아직 잘 모르겠거든요. 사모님, 혼자 계시다고 밥 거르지 말고 꼭 챙겨드세요.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그 순간 남편이 무얼 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굵은 눈물 방울이 편지지 위로 두둑 떨어졌다. 허물이 덮였다 벗어졌다 다시 돋은 내 반점 위로, 도무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얼룩 위로 투두둑 퍼져 나갔다. 당신이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