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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eet little kitty Aug 22. 2023

죽음 위에 피어난 죽음, 장미색 비강진

삶이 삶에게로 뛰어든 날, 죽음 위에 죽음이 피어나다.

이튿날 아랫배에 분홍색 반점이 여덟 개로 늘어났다. 어떤 것은 백 원짜리만 하고 또 어느 것은 완두콩만큼 작았다. 다음날은 열두 개, 그다음 날은 스무 개였다. 그것은 곧 온몸으로 퍼졌다.
김애란,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중에서


딸아이가 김애란의 소설을 과제로 읽고 있습니다. 덩달아 저도 도서관에서 김애란의 단편 모음집 <바깥은 여름>을 빌려와서 읽었습니다. 맨 마지막 소설이 눈에 띕니다. 영어로 번역된 단행본도 있습니다. 제목은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입니다.


주인공 명지는 역사 선생님인 남편을 사고로 잃게 됩니다. 현장학습을 떠났다가 계곡 물에 빠진 학생을 구하는 와중에 함께 목숨을 잃고 말았지요. 슬픔 속있는 그녀에게 영에 사는 친척언니여행 간 사이 빈 집을 빌려줍니다. 낯곳에서 애도의 시간을 가지는 동안 명지는  장미색 비강진(pityriasis rosea)이라는 피부발진을 앓게 됩니다.


장미색 비강진은 겉으로 드러나는 부위에 별 이상이 없어 남들에게는 멀쩡해 보이는 병이었다...... 배 위의 반점이 분홍색일 때는 그냥 두드러기쯤으로 보였다. 처음에는 분홍빛이다 과일처럼 발갛게 무르익은 뒤- 검붉어졌다. 그러다 나중에 연한 갈색으로 변하며 비늘처럼 반질거렸다. 며칠 동안 같은 자리에 허물이 내려앉고 벗어지길 반복했다. 그 위에 다시 '인설'이라 불리는 살비듬이 내려앉아 흉하게 파들거렸다...... 피부 위 허물이 새살처럼 계속 돋아날 수 있다는 데 놀랐다. 그건 마치 '죽음'위에서, 다른 건 몰라도 '죽음'만은 계속 피어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남편이 군복무로 발령받은 지방의 한 중소병원에서 함께 근무할 때였습니다. 다문화가정의 9살 여아가 오래된 비염 및 호흡기 증상으로 찾아왔습니다.


아이는 열이나 심한 기침이 없이, 두 달 이상 가래가 끼고 코가 막히는 등 알레르기 질환의 양상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이의 아빠는 엄마가 한국말을 잘 못 해서 그동안 다른 소아과에 다니면서 설명을 이해하고 아이를 잘 케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간단한 혈액검사와 가슴사진을 촬영 후 결과를 설명드리고 기본 호흡기약에 알레르기 약을 보충하여 처방했습니다. 또 아이의 증상은 심하지 않은 대신 회복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임을 설명했지요.


그런데 2주 후에 오기로 한 아이는 1주 만에 다시 왔습니다. 이번에는 얼굴, 팔다리를 제외한 몸통에 비가 내리듯 불규칙하고 많은 발진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아빠는 지난주 처방해 간 약 때문이 아닌지 의심스러워했습니다.


저는 맨 처음 생긴 발진을 보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발진 크리스마스트리 모양이라는 교과서의 수식어처럼, 분포도가 불규칙하면서도 방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엄마는 맨 처음 등부분에 큰 발진이 1개 있었다고 했고요. 저는 원발진이 있은 후 몸통 위주로 수많은 발진이 생겼다가 4-6주 후 사라지는 장미색 비강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https://www.pcds.org.uk/imager/gallery/clinical/pityriasis-rosea

비강진이란 피부의 각질이 얇게 비늘처럼 벗겨진다는 뜻입니다. 허옇게 벗겨지는 병변을 인설(scale)이라고 합니다. 장밋빛 분홍색의 베이스 발진이 곧 비늘처럼 허옇게 벗겨진다는 뜻이지요.


이름은 유별나지만 사실 이것도 바이러스 감염(human herpes virus 6,7)이 원인이라고 여기는 발진입니다. 피부발진의 개수가 많아 심하게 보이지만, 주로 옷을 입어 가리는 부분에 생기고 특별히 아픈 데가 없이 낫는데 한 달 정도 소요됩니다. 잘 모르면 약 부작용이나 식중독인지 걱정하게 됩니다.


소설 속 명지는 애도 중에 있습니다. 아무리 자기 학생을 구하려 했다지만 아내인 내 생각은 안 했을까, 명지는 속으로 남편을 원망도 합니다. '왜 삶이 죽음으로 뛰어들었을까' 의문스러워합니다. 애도 중에 돋아난 발진은 변화무쌍한 과정을 거치며 결국 비늘처럼 변해 죽음을 연상시킵니다.


이러한 의문은 죽은 아이의 누나로부터 받은 편지를 읽고서 조금씩 해소됩니다. 아이는 부모가 없었고 누나인 지은은 우측 마비증세가 있어 선생님의 장례식에 오지 못했습니다. 지은은 명지의 전화번호를 수소문해 몇 번 걸었지만 명지는 모르는 번호라 받지 않았습니다. 지은은 통화 대신 편지를 보내옵니다.


겁이 많은 지용이가 마지막에 움켜쥔 게 차가운 물이 아니라 권도경 선생님 손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놓여요. 이런 말씀드리다니 너무 이기적이지요? 평생 감사드리는 건 당연한 일이고. 평생 궁금해하면서 살겠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지용이 손을 잡아주신 마음에 대해 그 생각을 하면 그냥 눈물이 날 뿐, 저는 그게 뭔지 아직 잘 모르겠거든요. 사모님, 혼자 계시다고 밥 거르지 말고 꼭 챙겨드세요.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마비가 온 손으로 삐뚤빼뚤 쓴 글씨를 보면서 명지는 눈가가 흐려집니다.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러 내 목숨을 거는 것. 그게 무언지 모르겠다는 것은 명지와 지은의 공통된 물음이었습니다.


그 순간 남편이 무얼 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굵은 눈물 방울이 편지지 위로 두둑 떨어졌다. 허물이 덮였다 벗어졌다 다시 돋은 내 반점 위로, 도무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얼룩 위로 투두둑 퍼져 나갔다. 당신이 보고 싶었다.


명지는 장미색 비강진을 통해 삶과 죽음을 봅니다. 피부는 우리 몸을 지켜주는 성벽이자 면역기관으로, 수많은 세포가 끊임없이 태어나고 사멸합니다. 그래서 피부는 각종 자극과 감염, 약물에 취약합니다. 특히 소아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소녀의 부모는 저의 진단을 믿고 기다려 주었습니다. 대개 발진이 심하면 부모는 불안한 마음에 여러 병원을 전전하게 됩니다. 행히 소녀는 제 예상보다 빠르게 3주 만에 발진으로부터 회복했습니다. 호흡기 증상도 좋아졌습니다.

https://img.medscapestatic.com/pi/meds/ckb/64/28864.jpg

장미색비강진의 원발진(좌)과 몸통에 분포한 크리스마스트리 패턴의 발진


비록 삶이 삶으로 뛰어들었다 해도 거기엔 죽음을 감수할 만큼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죽음 앞에 죽음 위에 피어나는 죽음 같은 발진을 앓습니다.


이타심이라는 것은 도대체 일까요?


이타적인 인간이 왜 죽어야 하는지, 삶과 죽음이 수이 오가는 이 시대에 우리는 묻습니다. 인생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  발진이 사라지듯 연하게 당신을 기억하고 눈물을 흘리며 애도합니다. 감사합니다.



커버이미지

영화로 제작된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포스터

https://naver.me/5HEikXD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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