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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eet little kitty Sep 25. 2021

비올라를 좋아하는 이유

없으면 티가 많이 나지만 있어도 티 나지 않는 자리

 코로나 시국으로 1년 이상 쉬었지만, 나는 지역 동아리로 소규모 오케스트라에서 2nd violin을 맡았었다. 휴직하고 시작한 일이니 2년 정도일 뿐이지만, 참 재미있었고 좋아하던 일이었다.

 

프로 오케스트라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서는 단원들이 대개 2nd violin보다 1st violin 자리를 선호한다. 1st violin은 대개 멜로디를 연주하기에 빛나기도 하고 주요 역할이지만 2nd violin은 아무래도 화음을 넣거나 멜로디를 받쳐주는 역할을 하기에 재미가 덜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공연 때 1st violin은 객석에서 가까운 자리고 악장을 둘러싼 파트에 눈길이 더 가게 된다.


 입단한 지 1년 반 정도 되었을 때, 마음 맞는 현악 파트 단원 몇 분이 합주 연습과는 별개로 실내악 연습을 제안했다. 나는 내 위치가 명확하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참여하게 되었다. 1st violin을 할 만큼 고음이나 비브라토가 완성되어 있지 않은데, 2nd violin 주자도 나보다 잘하는 분이 계셔서였다. 다만 viola 자리는 공석이었다. 본래 viola를 맡았던 단원이 올해 개인 사정으로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혹시, 제가 viola를 해야 하나요?"


 괜한 질문이 일을 만들었다. 2nd violin 단원 선생님은 전공자였고 viola 악기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금방 악기를 빌려주셨다. viola는 가온 음자리표라고 높은 음자리표와 낮은 음자리표의 중간 악보를 사용하는데, 말하자면 한글만 쓰다가 한자를 배우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쉬워 보이지만 익숙한 악보 체계를 벗어나는 viola 악보 보기는 연주보다 어려운 관문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viola연주는 viola 레슨을 시작하게 했고, 실내악 파트에서는 역할이 비교적 적어 그럭저럭 적응했지만 오케스트라 연주회 연습에서도 6개월 정도를 비워 두었던 viola 자리에 내가 앉게 되었다.


"선생님, 거기 왜 앉아 있어요? 거기로 왜 간 거예요?"


 모두들 의아해했다. 내가 그 자리를 맡게 된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했지만, '예상치 못했다'는 반응이 더 많았다. 나랑 친한 단원은 '좀 더 버티다가 1st violin으로 가지, 왜 거기로 가냐'라고 했고, violin 레슨 선생님은

" 비올라를 하면 독주 기회가 별로 안 와요. 나는 violin 전공했는데,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viola 파트로 보내졌어요. 엄연한 차별이었어요."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빌려 쓰는 악기로 2달 정도 연습한 뒤, 망설이지 않고 내 viola를 사러 갔다. 레슨 선생님도 새로 소개받았다. 내 체격과 평소 violin 연주 패턴을 보면 viola를 하기에는 힘이 부족하고 버거울 것 같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었다.


 실내악 연습을 개인 사정으로 하루 빠진 날, 나는 왜 비올라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최종 리허설을 못한 채 행사에 연주 하러 가는 길에, 실내악 멤버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음과 저음을 연결해 주는 중간이 없으니까 너무 이상했어요. viola 없으면 안 되겠더라고요."


 물론, 어느 악기든 빠지면 안 된다. 실내악은 구성이 단출하기 때문에. 특히 1st violin이 결석하는 날에는 그냥 연습을 취소한다. 리더 없이는 연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각 악기들은 모두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viola의 존재감이 덜 했던 이유는 있을 때 티가 덜 나는 중간 음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연주를 쉬는 마디도 생각 외로 많다. (나는 쉬는 부분이 많아서 사실 좋은데....)

 그런데 그 덜한 존재감은 <없을 때>에는 갑자기 눈덩이처럼 커졌다. 사실 오케스트라 연습 때도 비올라 파트가 없어서 지휘자가 그 부분은 노래를 하거나 얼버무리면서 박자를 세고 넘어가야 했는데, 말도 안 되는 실력이지만 내가 그 자리에 있으니 너무 좋아했다. 채워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있을 땐 티가 별로 안 나지만 없을 땐 엄청나게 티 나는 그 자리는 바로 지금, 내 인생과 퍽 닮아 있었다.


 직장에 나가면 직함이 있고, 그에 걸맞은 월급과 나를 찾는 환자들의 피드백이 있다. 물론 진실한 노동의 대가이고 보람된 일이지만, 당시 나에게 그것은 무언가를 잘해서 칭찬받고 주목받는 어린 시절의 경험과 닮아 있었다. 나는 절대로 그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집에 무슨 일이 있다 해도, 아무리 큰 대가를 치러야 하더라도, 나는 내 직업의 정체성을 붙들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나는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이 더 중요했지 티가 나지 않는 자리에는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마도 그것이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는 전업주부의 삶이었나 보다. 

1st  violin처럼 빛나는 삶을 살고 싶었다. 젊을때부터 몸이 아파서 불행하고 서러운 엄마, 아빠의 삶을 빛나게 해 주고 싶었다. 한 순간이라도 진심으로 웃게 해 드리고 싶었다.


 그리하여 내가 최종적으로 얻고 싶었던 건, 그냥 편하게 웃으면서 보내는 가족의 시간이었다. 단 한 번이라도, 얼마의 돈을 쓰든 상관없으니 ,

"너희랑 있으니 참 즐겁네. 뭘 하지 않아도 좋아."

"이거면 됐다."

라고 얘기하는 부모님을 보고 싶었다.


 또, 일찍 돌아가실 것이 예정된 엄마, 아빠가 인생의 마지막에

"힘든 일도 많았지만 너희와 함께 해서 그래도 참 좋았다. 너희가 내 자식이어서 참 좋았다."

이런 비슷한 말씀을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랬는데.


 아빠는 주무시다가 뇌경색이 왔고, 중환자실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아빠를 부르는 내 목소리에 눈 한 번 깜빡인 것이 전부였다.

 엄마는 시간이 충분히 있었지만, 굳은 표정으로 하루를 보내시다가 마지막 순간에 눈물이 떨어졌다.


"서. 러. 워. 서."라는 말을 건조하게 내뱉은 엄마는 눈을 감으셨고, 동생은 엄마의 그런 모습을 보며 중환자실 바닥에 주저앉아 고통스러워했다.


 나는 아빠와 엄마의 죽음에 죄책감이 앞섰다. 그 죄책감은 부당한 것 같아서 엄마 아빠를 잃은 슬픔보다 죄책감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엄마, 아빠가 행복하지 못했던 건 우리 탓이 아니야. 행복할 수 있는 순간도 많았는데, 스스로 마음을 돌보지 않았잖아. 내가 얼마나 최선을 다 했는데, 내가 얼마나 엄마 아빠를 빛나게 해 주려고 애썼는데.'


 고로 나는 이제 <빛나는 자리, 화려한 자리는 그다지 의미 없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있겠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나를 위한 일이 아니라면 결국 나처럼 뒤끝이 남게 되기 때문이다.

 전업주부와 엄마라는 자리, 돈과 커리어를 잠시 내려놓고 누가 보지 않는 자리로 들어가 나와 가족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다. 그 안에서 고음과 저음을 이어주고 독주 선율을 받쳐주며, 없으면 크게 비어 겨울바람처럼 가슴 시리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다.

 동시에, 모든 노력과 성취가 무의미하다는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 한다. 나는 내 인생의 균형을 잡는 것이지 절대 선의 가치를 발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st violin의 빛나는 자리는 오케스트라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다. 지휘자는 가이드를 제시한다면, 악장은 1st violin을 포함해 전 악단을 이끌어가는 행동 대장일 것이다. 빛나 보이는 만큼 온몸으로 뛰어다녀야 하고, 궂은일도 많다. 나도 viola 자리에서 충분히 지지 역할을 하고 나면, 언젠가 테크닉을 완성시켜 1st violin으로 가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 모든 과정은 항해이고, 모든 발걸음은 성공이든 실패든 아름다운 순간일 것이다.

 

 없으면 티가 많이 나지만 있어도 티가 나지 않는 조용한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을 응원한다.


슈만 <이야기그림책> -리처드 용재 오닐 연주

Schumann I Marchenbilder Op.1 13 I Richard O'Neill & Jeremy Denk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올라 독주는 빛이 나는 곡도 많다.


https://youtu.be/e_vlf79XU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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