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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eet little kitty Sep 18. 2024

스스로 봉인되었던 화가, 힐마 아프 클린트

인정받지 못한 일을 계속 한다는 것은

2018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는 역대 가장 많은 관객이 다녀간 화가의 개인전이 있었습니다. 무려 60만 명이 다녀간 이 전시회의 주인공은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1862-1944)입니다. 힐마 아프 클린트는 스웨덴의 여성화가로 칸딘스키, 말레비치, 몬드리안 등 추상화의 선구자로 알려진 화가들보다 몇 년 앞서 추상화를 그렸습니다. 원래 추상화의 선구자는 칸딘스키로 알려져 있지만, 1911년에 그렸다고 주장하는 그의 추상화 작품은 분실되었습니다. 반면 클린트는 1906년 세계 최초의 추상화 연작인 <최초의 혼돈>을 남겼습니다.


2019,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힐마 아프 클린트 회고전, '미래를 위한 그림'


클린트는 1862년 스웨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해군사관학교의 책임자였고, 집안의 남자들은 대개 해군으로 복무했습니다. 클린트가 열일곱 이 되던 해, 막내 여동생이 갑자기 사망했습니다. 19세기 유럽에서는 폐렴, 천식, 폐결핵 등 감염병으로 아이들이 사망하는 일이 흔했습니다. 여동생이 죽은 후 그녀는 영적인 세계에 관심을 품고 신지학(theosophy, 19세기에 설립된 밀교, 신비주의적인 사상 철학 체계)에 빠져들었게 됩니다.


그녀는 스톡홀름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그림을 배웠습니다. 당시 스웨덴은 남성과 여성이 완전히 평등하지는 않았지만 여성이 정규교육을 받을 기회는 있었습니다. 1888년, 클린트는 <안드로메다>라는 작품으로 스웨덴 왕립 미술 아카데미가 수여하는 상을 받고, 이후 1908년까지 정기적으로 단체전에 참여했습니다.


좌> 자신의 작업실에 있는 힐마 아프 클린트, 1895           우> 힐마 아프 클린트, 최초의 혼돈, 1906-7


심령주의, 영적인 세계 등 그녀의 관심분야와는 달리, 1900~1901년 클린트는 스톡홀름 수의학 연구소에 취직해 삽화를 그리는 화가로 일했습니다. 1906년, 클린트는 세계 최초의 추상화 연작 <최초의 혼돈>을 그렸습니다. 대개의 추상화가 그렇듯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없고, 아이들 장난 같기도 한 그림입니다.


<10 점의 대형 그림>은 자연에서 따온 곡선과 상징, 문자와 기호로 이루어진 추상화 연작으로, 어린 시절부터 노년까지 삶의 단계를 표현한 작품입니다. 클린트는 폭 3미터가 넘는 대형 그림을 바닥에 깔아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사흘 동안 쉬지 않고 작품을 그렸다고 합니다. 이젤을 놓고 앉아서 그림을 그렸던 당대의 화가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법이었습니다.


힐마 아프 클린트, 10 점의 대형그림, 1907, 좌> No,7(성인), 우>No.3(청소년)

1908년 클린트는 저명한 신지학자였던 루돌프 슈타이너를 초대해 자신의 그림들을 보여주습니다. 그러나 슈타이너는 클린트가 시도한 새로운 형식의 추상화를 보고 “앞으로 50년 동안 누구도 이 그림들을 봐서는 안 된다.”라고 했습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그림이라는 뜻이었고 결코 긍정적인 평가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슈타이너는 그녀의 그림에 그다지 관심도 없고, 그림을 평가할만한 식견을 갖추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낙담한 클린트는 그림을 포기했다가 4년 후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녀는 결혼도 하지 않고 시골 농가에 은둔하며 홀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조수도, 후원자도, 그림을 거래해 줄 화상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1200여 점의 그림을 그리고는 1944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대신 그녀는 조카에게 자신의 작품들을 맡기고 향후 20년 동안 절대 공개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슈타이너는 당대에 이해받지 못할 그림이라고 부정적으로 말했지만, 어쩌면 그녀는 미래의 어느 순간에라도 반드시 인정받을 그림이라는 확신이 있었을까요?


냉정하게 보면 클린트는 비주류의 세계에서 은둔하며 비주류의 그림을 그리고, 사후 20년간 자신의 그림을 봉인한 괴짜 화가입니다. 그러나 클린트의 조카는 그녀의 유언대로 1966년 이후 클린트의 그림을 세상에 내놓았고, 스웨덴의 미술관에 그림을 기증하고자 했지만 거절당하자 그녀의 이름을 딴 재단을 만들어 꾸준히 세상에 알리고자 했습니다.


2018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는 마침내 클린트의 회고전 <미래를 위한 그림> 열렸고, 구겐하임 역사상 최다 관객인 60만 명이 그녀의 그림을 보러 습니다. 또, 2019년 독일에서는 그녀의 일생을 담은 영화가 만들어졌습니다. 역사 속에 묻혔던 한 여성화가의 예술 세계는 <최초의 혼돈>으로부터 100년이 지나서야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클린트는 은둔의 화가, 신비주의에 빠진 괴짜화가 같지만, 율리아 포스의 <힐마 아프 클린트>라는 평전을 읽어보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클린트는 살아생전에 스톡홀름과 런던에서 추상화를 전시하며 자신의 그림을 알리려 했고, 유럽의 각국을 여행하며 다양한 미술작품을 접했으며, 수의학 연구소에서 그린 삽화에는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이 충분히 드러납니다. 그녀는 허황된 신비주의를 따라간 은둔의 화가가 아니라, 성별과 계급에 따른 차별, 물질주의, 이분법적 사고 등 사회의 인습을 초월하는 더 높은 가치를 추구했고, 자신의 세계관과 작품을 알리고자 꾸준히 노력했던 화가였습니다. 클린트가 자신의 작품을 봉인하고, 관리할 조력자를 지정한 것은 자신의 예술세계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림을 그리면 비평가와 관객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그림이 팔리는 것이 화가의 직업에 대한 보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 일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저 역시 즉각적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 일들에  시간을 할애하며 좌절감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어떤 삶을 선택하긴 했지만 확신이 서지 않는 분이 있다면,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나는 그것을 왜 하려고 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힐마 아프 클린트도 끊임없이 그런 고민을 해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굳혔을지 모릅니다.


 아울러 일러스트 같기도 하고, 기호와 상징의 모음 같기도 한 클린트의 추상화를 보며 스스로가 소중하다고 느끼는 시간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그녀가 그토록 기다렸던 미래의 관객이 바로 우리니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런치북 설정을 누르지 않아 재발행하게 된 점, 양해 부탁드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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