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카와라(Kawara 1932 – 2014)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뉴욕에서 활동했던 개념미술 화가입니다. 그는 오늘 연작(Today series)이라는 작품으로 유명한데요. 매일 작은 캔버스에 날짜를 기록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1966년 1월 4일부터 시작하여 그는 50년간 같은 작업을 반복했습니다. 그림은 하루의 시작인 자정부터 다음 날 자정까지 완성한다는 원칙이 있었으며, 날짜를 기록하는 방식은 자신이 머무르던 국가의 관습과 표준에 따랐습니다. 당일 일간신문으로 내부를 포장한 종이 상자에 작품을 보관하고, 작품 제작 날짜와 크기, 부제 등을 따로 기록해서 남겼습니다.
2015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렸는데, 부제는 그의 삶을 대변하듯 ‘침묵 (Silence)’이었습니다. 카와라는 생전에 공식 인터뷰를 하지 않았고, 자신의 얼굴이나 약력 등을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는 매일 성실하게 자신의 일상을 기록했습니다. 예술가라고 하면 즉흥적이고 충동적일 것 같은데, 카와라는 오히려 성실하다 못해 강박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카와라의 작품을 보면서, 저는 '전쟁'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습니다. 그가 날짜를 기록한 행위가 커다란 상실 후에 '시간'을 바라보는 관념의 변화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카와라는 1932년 생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터질 때 10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비록 원폭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아니었지만, 일본이 광기로 태평양 전쟁까지벌였다가 결국 패전국이 된 것을 지켜본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엔지니어였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멕시코, 파리를 거쳐 1960년대 중반 뉴욕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언론과의 접촉을 피하며 신비주의 미술가처럼 각인되었습니다. 그러나 2000년부터 그를 연구한 양은희 건국대 연구교수에 의하면, 2002년 그는 두 차례 6시간의 인터뷰에 응했으며 이후에도 전화로 다양한 이야기를 쏟아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장거리 여행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광주 비엔날레에도 혼자 왔고, 한국의 시인과 교류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양은희 교수는 온 카와라가 전후 '일본'이라는 테두리를 넘어 자유로운 세계시민으로서의 예술가의 정체성을 확립했다고 설명합니다. 1)
오늘 연작을 제작한 순서
온 카와라의 삶과 작품을 보며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엉뚱하고 즉흥적으로 보이는 미술가에게도 성실과 강박을 오갈 만큼 고된 매일의 노동이 있다는 점입니다.예술가에게도 저렇게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이 있다는 점이 평범한 저의 일상을 위로해 줍니다. 두 번째로 '커다란 상실을 겪고 난 뒤에 사람은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저는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난 뒤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몸으로 깨닫게 된 것이지요. 제 부모님은 60대에 돌아가셨지만, 질병과 싸우고 죽음을 걱정하는 동안 그마저도 온전히 현재를 살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루를 느리게 살고 싶습니다. 천천히 걸어가며 좌우 양옆을 보고, 돈이 되지 않더라도 제가 가치 있게 생각하는 일에 시간을 더 쓰려고 합니다. 상실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입니다.
'날짜기록'이라는 독특한 주제로 성실과 강박을 오갔던 온 카와라의 시간을 기억합니다. 여러분의 시간도 소중하고 의미 있게 기록되고 기억되기를 기원합니다.
1) 서울아트가이드, 양은희, 「온 카와라의 유목적 정신: ‘세계시민’의 자서전(On Kawara’s Nomadic Mind: Autobiography of a ‘Citizen of the World’)」,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