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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eet little kitty Oct 23. 2024

없어질 작품을 만드는 화가, 우르스 피셔

파괴적 죽음본능을 예술로 승화시키다

2021년 5월, 프랑스의 파리의 증권거래소(bourse de commerce) 자리에는 새로운 사립 미술관이 오픈했습니다. 구찌, 생 로랑 등 명품 브랜드가 속한 기업 케링의 소유주이자 거물급 미술컬렉터 피노(François Pinault, 1936-) 컬렉션입니다. 그는 꾸준히 모은 현대미술품으로 건물을 임대하여 자신의 미술관을 열었습니다.


아름다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술관의 로툰다(원형 바닥에 돔 천장을 올린 건축구조, 피노컬렉션의 메인홀에 해당)에는 16세기 조각가 잠볼로냐(Giambologna, 1529-1608년)의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를 오마주 한 조각상이 설치되었습니다. 스위스 출신 현대미술가 우르스 피셔(Urs Fischer,1973-)의 작품으로, 피노 컬렉션 로툰다의 첫 전시품이었습니다.


좌)우르스 피셔의 오마주 작품 우) 16세기 잠볼로냐의 원작품

고대 로마에서는 여성인구가 부족해 인근 사비니족의 여성들을 강제로 데려와 신부로 삼는 폭력적인 행위가 있었습니다.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는 이 사건을 묘사한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특별할 것이 없는 고전적 미술품의 모방작이지만, 이 작품에는 특별한 계획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이 조각상은 단단한 재질이 아니라 밀랍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미술관 직원들이 아침에 출근해서 작품에 불을 붙이면 하루치 분량의 밀랍이 녹아내립니다. 아래 사진을 보면 녹아내린 작품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로툰다의 웅장한 벽화가 녹아내리는 조각상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좌> 녹기 시작한 조각상   우> 거의 다 녹아내린 조각상 (출처: Urs Fischer | Bourse de Commerce)


우르스 피셔는 스위스 출신이지만 미국에서 주로 활동하며, 세계 현대미술 축제인 베니스 비엔날레에도 자주 초대되는 작가입니다. 밀랍으로 만든 조각상이 유명하기는 하지만, 사진, 회화, 설치 작품 등 다양한 종류의 작품을 만듭니다.


피셔는 의사인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 스위스에서 미술과 사진을 공부했고, 독특하게도 한때 나이트클럽의 경비원으로 일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피셔는 어깨가 떡 벌어진 체격인데, 나이트클럽의 경비원이라면 잘 어울렸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의사 부모님 밑에서는 의대에 가라고 압박을 받을 것 같은데, 피셔의 아버지는 160년 된 집을 재건축하면서 아들에게 스위스의 목공과 장인정신 등을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1)


피셔는 자신의 작품을 왜 불태우는 걸까요?

오스트리아의 아동정신분석가 멜라니 클라인은 갓 태어난 아기의 마음속에는 타고난 죽음 본능에서 비롯된 파괴적 공격성이 들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원시적인 파괴성이 삶의 동력이자 갈등의 중심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기는 처음에는 환상 속에서 파괴적 본능을 처리하다가, 따뜻한 양육과 보살핌을 받으며 점차 본능을 조절할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이 타고난 본능을 처리하는 방법 중 '승화'가 있습니다. 승화는 성숙한 방어기제에 해당하며, 대개 문화 예술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피셔가 파괴적 본능을 승화시키듯 '자신의 작품을 불태워 없앤 것'처럼 우리는 파괴적 죽음 본능을 타고나지만, 차츰 조절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죽음을 향해 가는 대신 삶을 살아냅니다.


성북구에 위치한 <제이슨 함 갤러리>에서는 우르스 피셔의 개인전 'Feelings'가 열리고 있습니다. 불에 타는 밀랍작품은 없지만 10여 년간 그가 만든 다양한 작품들입니다. 이번 전시와 관련한 인터뷰에서 그는 '작품에 담으려는 세상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삶은 축제이자 선물'이라고 답했습니다. 밀랍 조각상을 통해 파괴와 죽음을 표현했던 그가 결국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삶'이었을까요?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고,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습니다. 파괴적 공격성이 묻지 마 범죄로 이어지는 뉴스를 자주 접하는 요즘, 우르스 피셔의 밀랍 조각상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본능을 승화시키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는 예술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참고한 기사


1. The Imperfectionist | The New Yo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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