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산속 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원주의 '뮤지엄 SAN'에 가면 <제임스 터렐관>이 있습니다. 한 회 인원을 최대 28명으로 제한하고 안내 직원을 따라 관람하는 전시관입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시작하기에 방탈출 느낌도 납니다. 벽에 설치된 손잡이를 잡고 더듬더듬 나아가면, 빛과 색으로만 이루어진 그의 작품들을 하나씩 체험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체험을 시작할 때, 자리에 앉아서 신발을 벗고 계단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벽에 사각형 하나를 붙여놓은 작품이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계단을 올라가 보니 그 사각형은 문 없는 방의 입구였습니다.
내부로 들어가 보니, 방안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벽과 시시각각 변하는 색만 존재했습니다. 가이드 직원이 관람객들에게 벽을 직접 만져서 경계를 확인해 보도록 했습니다. 분명히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마치 무한한 우주처럼 팽창되어 보였습니다.
1930년대 독일의 심리학자인 볼프강 메츠거(WolfgangMetzger)는 시각 자극을 박탈했을 때 환각을 보는 현상을 ‘간츠펠트 효과(Ganzfeldeffect)’라고 불렀습니다. 간츠펠트란 '전체시야'라는 뜻인데, 우리의 최대 시야영역에 시각 자극을 없애면 뇌에서 거짓 신호를 만들어내서라도 절대적인 감각 박탈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현상입니다.
2006년 BBC는 건강한 사람들에게 빛과 소리가 완전히 차단된 독방에서 48시간을 지내도록 하는 감각박탈 실험을 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피실험자들은 독방에서 환각을 지속적으로 경험했는데, 줄무늬 등의 기하학적 패턴부터 살아 있는 뱀, 용 같은 괴물까지 보았습니다. 이들은 계속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불안을 호소했습니다. 48시간 후에는 기억력이나 계산 능력이 떨어지고, 연구진들의 지시에 무조건 복종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는 간츠펠트 효과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임스 터렐은 '내면의 빛'을 핵심 사상으로 하는 퀘이커 교도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빛과 명상, 정신 수련 등을 가까이 접했습니다. 비행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16세에 항공 조종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하늘을 비행하면서 바라본 빛에도 매료되었습니다. 그는 1961년 중국 통치하에 압박받던 티베트 승려를 탈출시키려고 비행하다가 총격을 당했다고 합니다. 당시 서울의 미군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받았기도 하고, 그의 부인은 한국의 화가 이경림으로 터렐은 한국과 깊은 인연을 갖고 있습니다.
터렐은 대학에서 지각 심리학을 공부했고, 졸업 후에는 미술과 미술사를 공부했습니다. 인상주의 화가들도 빛에 매료되어 화폭에 빛을 담았지만, 터렐은 빛을 그리지 않고 직접 다룬다고 말합니다. 그에게 빛은 대상을 표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작품의 대상인 셈입니다.
제임스 터렐관의 마지막은 하늘을 향해 뚫려 있습니다. 계단을 걸어 나가면 전망이 좋은 테라스로 연결됩니다.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 같은 문으로 나가면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는 점이 해피엔딩처럼 느껴집니다.
좌)sky division 우)horizon room
내가 본 것이 전적으로 옳다고 믿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나의 감각으로 직접 체험한 것이니 신뢰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간츠펠트 효과를 알고 터렐의 작품을 보고 나니, 우리의 감각과 뇌가 얼마나 허점투성이인지 깨닫습니다. 어쩌면 수많은 시각 자극 속에 살아가다가, 산속의 미술관에서 빛과 명상을 경험하게 된 것부터가 저에게는 간츠펠트 효과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저의 세상이 확장되고, 현실에서 벗어나 환상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 지금 내가 추구하고 있는 것이 무조건 옳고 보편적 진리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오히려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힘든 순간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터렐의 할머니는 그가 어릴 때 예배당에 데려가 '내면으로 들어가 빛과 인사하렴'이라고 자주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어린이에게는 조금 어려운 말이었겠지만 지금 저에게는 멋지게 들리네요. 여러분도 언젠가 내면으로 들어가 빛과 만나는 경험을 하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