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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eet little kitty Aug 14. 2021

모더나와 공짜 산책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공짜이기 마련

 모더나 주식이 난리다. 지난주부터 심상치 않길래 눈팅만 하다가, 나의 매수 타이밍 감은 맞는 법이 없으니 가격이 떨어질 확률이 큰 금요일에 조금씩 사서 오래 묵히자는 나의 신조대로 지난 금요일에 딱 2주를 샀는데, 바로 다음 월요일 밤 20프로 가까이 올랐던 것이다.


 인터넷 카페에선 난리였다. 조금 전에 아마존을 손절한 금액으로 모더나를 사고 라면 끓여 먹고 와 보니 100만 원 수익이라는 글, 오늘 20프로 오른 가격에 모더나 1억 원 들어간다는 글, 절대로 불나방처럼 뛰어들면 안 된다는 글....

나는 매수 타이밍은 맞았지만 물량 조절에는 실패했으니 벼락 거지가 된 기분으로 뒤숭숭한 아침을 맞이했다.


새벽 6시면 공원에 나가서 뛰고 오는 남편은 9시가 넘으면 더워서 공원 산책은 불가할 것이라는 얘기를 하며 내가 차려 준 아침을 먹고 있다.

'나도 알지. 하지만 난 늦게 잠이 드는 큰 딸 때문에 12시가 넘어야 잘 수 있고 어제는 모더나 때문에 억울한 마음에 진정도 안 됐고, 잠귀가 밝아 5시부터 뒤척이는데 6시에 나가긴 싫어.....'


 

남편이 출근한 뒤, 집안 정리를 하고 소파에 앉아 조용히 거실을 독점한 채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하루 중 몇 안 되는 평온한 시간이다. 9시가 가까워오자 방학을 맞은 아이들이 주섬주섬 일어나서 잠이 덜 깬 눈으로 각자의 미디어 기계를 찾는다. 슬슬 눈치를 보며 뭘 해야 허락해 줄 거냐는 눈빛을 보내온다. 전날 충분히 공부를 하고 잤거나 주말인 경우, 엄마가 기분 좋은 예외적인 날에는 눈을 뜨자마유튜브를 볼 수 있다. (일관성 없는 안 좋은 양육의 예)


 창문을 통해 공원을 바라본다. 해가 공원을 비추고 있지만 아직 그늘 구역이 남아 있다. 그럼 한 번 땀 흘릴 각오 하고 나가 볼까? 그늘처럼 보이는 루트만 따라서 기회주의적인 공원 산책을 해 볼까나.

나는 아이들에게 각자 하고 싶은 대로 놀아도 되지만 엄마가 산책을 다녀올 동안 배가 고파도 기다리거나 알아서 챙겨 먹을 것을 지시한다. 모자를 쓰고 천천히 걸어 나간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밖에 나가 보니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시원한 바람이 분다. 비가 오려나? 공원에는 산책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덕분에 마스크를 때때로 내리고 숨을 쉴 수 있다. 나는 비가 올지도 모르지만 우산이 없는 아슬아슬한 상황을 감수하고 산책을 시작한다.

 배추흰나비가 유난히 눈에 많이 띈다. 생각해 보니 혼자 나와서 느긋하게 나비까지 관찰하는 공원 산책은 오랜만이다. 공원에는 정말 많은 식물과 동물이 있구나. 하늘은 적당히 어둡고 바람도 적당히 분다. 어제의 모더나 사태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내가 글쓰기를 시작한 이유가 무엇이었더라. 글쓰기는 내 마음을 치유하고 튼튼하게 하는 기능이 있다는 그 말을 믿었기에, 또 글을 쓰면 나와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그 말에 힘을 얻었기에. 나는 지금 이 넓고 아름다운 공원을 걸으며 글을 쓸 생각을 한다. 모더나 주가로 들뜨고 뒤숭숭한 마음이 이미 진정되고 있음을 느낀다.


 

지난겨울 눈이 많이 오던 어느 날, 작은 딸과 동갑내기 조카를 데리고 놀아주던 생각이 난다. 아무리 눈이 와도 놀기로 한 약속을 포기할 수 없다는 작은 따님의 분부에 차로 15분 정도 걸리는 조카네 집까지 엉금엉금 차로 기어가서, 눈사람 마냥 소복이 눈을 맞으신 사돈 할머니로부터 조카를 인수인계받고, 인근 복합 쇼핑몰의 아담한 야외 정원에서 신나게 아이들을 놀아주었다. 예쁜 인조 가로수길의 적당한 사이즈의 나무에는 가지를 따라 눈이 반듯하게 쌓여 있었고, 가지를 살짝 흔들면 눈꽃비가 내렸다. 8살 난 두 소녀들은 그저 즐거운 마음에 눈에서 뒹굴고, 눈싸움을 하고, 사진을 찍고, 바로 옆 햄버거 가게에서 햄버거를 먹고 다이소 쇼핑까지. 그렇게 좋은 시간을 보내는 완벽한 장면이었는데......


별안간 집에서 전화가 왔다.

"영어 학원 수업 안 들을 거야! 나도 거기 가서 눈싸움하고 싶은데 왜 안 데려갔어?"

말이 통하지 않는 서너 살 아이처럼 큰 딸이 떼를 쓰고 난리였다. 어차피 줌 수업을 하면 되는데, 컴퓨터 앞에 앉는 것도 싫다는 아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게다가 수업 시작하자마자 이러면 학원에 전화하는 것도 면목이 없는데, 이미 학원에서는 출석 여부를 묻는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집에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시터 이모님의 부재중 전화와 함께.


 왜 내 인생은 번번이 이렇게 지옥 같은 일이 늘 따라다니는 것일까. 지금 저 두 아이를 데리고 있는 것도 만만찮은데 아까 같이 가자고 할 때는 싫다면서. 그랬음 학원 스케줄도 미리 조정했을 것이고 하루쯤 빼 주었을 텐데.

 감각이 지극히 예민하고 충동적 성향이 있는 큰 아이는 늘 이런 식이다.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은 평소의 일정을 소화하지 못할 확률이 백 퍼센트다. 하지만 날씨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상황을 점잖게 표현하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함께 외출할 것을 물어보았을 땐 본인이 거절했음에도 꼭 뒤에 이런 식으로 동생만 예뻐하는 엄마로 둔갑시킨다. 나는 일단 학원에 전화해서 사정을 설명하고 죄송하지만 수업은 먼저 시작하시라고 말씀드린다. 다시 집으로 전화해서 시터 이모에게 억지로 달래려 하지 말고 그냥 두시라고 하고, 마지막으로 아이와 통화한다. 참을 수 없는 화를 최대한 다스려 보지만, 지금 저 하얀 눈밭의 아름다운 풍경과 나의 전화 통화는 정말 상극이다.


 이 날의 심정을 며칠 후 상담 선생님과 이야기했다. 조카를 집으로 다시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인근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직원들이 만들어 놓은 완벽한 눈사람과 사진 한 컷까지. 딸을 위한 나의 서비스는 완벽하였으나 내가 도대체 무얼 한 건지 너무 많이 힘들었다고.


" 정말로 좋은 건 대개 공짜지요. 만약에 영화를 찍기 위해 눈이 오는 세트장을 만든다면 비용이 얼마나 들까요? 선생님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이 든 만큼 그 세트장은 값어치가 있는 훌륭한 경험이었을 거예요. 그 아이들에게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을 해 주신 거지요. 그래서 힘이 드셨을 거예요."


 그렇구나. 내가 영화 세트장만큼 비싼 것을 아이에게 해 주었구나. 정말로 가치 있는 것은 공짜였구나.

초등학교 때 피아노를 취미로 치던 내게, 넉넉지 않은 환경에도 부모님은 그랜드 피아노를 사 주셨다. 손 터치가 약해 무거운 건반, 묵직한 피아노가 필요하다는 피아노 선생님의 설득에 넘어가신 거였다. 중학교 때 공부를 하는 듯 하니 학생들끼리 먼저 팀을 짜서 선생님을 선별 초빙해오는 학원에도 보내주셨다. 통학 차량비와 수업료를 내야 하는 고등학교도 내가 원하니 보내주셨고, 학교에서 주최하는 2주 남짓의 해외 어학연수도 어찌 됐든 보내주셨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순순히 포기하지 않고 늘 원했다. 아빠가 편찮으시니 집에 고정적 수입이 없었고 엄마 역시 일을 하기에는 몸과 마음이 지쳐 있어 우리 집은 어떻게 살아갔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분에 넘치는 모든 것에 감사해야 했고, 받은 만큼 성과를 내지 못하면 안 되는 인생이라는 생각의 무게를 어깨에 가득 지고 살았다. 엄마가 화가 난 순간이 있다면 주제와 무관하게 내가 얼마나 많은 돈을 쓰고 있는지, 그로 인해 엄마 아빠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 복습하는 레퍼토리가 반복되었다.


 하지만 인간이란 가득히 채워진 것에 감사하기보단, 결핍된 것에 항상 눈이 가기 마련이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6개월 전의 어느 봄날, 나는 그토록 내가 원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이제 보니 선생님 말씀대로 그건 공짜였다. 처음으로 엄마의 진짜 웃는 얼굴을 보았던 것이다. 엄마가 진정으로 행복해하는 모습을. 딱 한 번이었다. 엄마의 몸이 있는 곳에 마음도 함께 있는 그런 순간을 나는 아주 오랫동안 목말라했었나 보다.




그늘진 공원을 다 산책하고 집으로 향하려니 해가 쏙 얼굴을 내민다. 내 얼굴에 닿는 공기는 다시금 뜨거워지고, 몸에서는 땀이 났다.

"하아, 내가 산책을 다 한 걸 기막히게 아나? 이제부터 더워질 거니?"

대꾸할 리 없는 자연에게 나는 물어본다. 3년 전 엄마의 모습과 1년 전 눈 오던 날, 그리고 상담실에서의 깨달음까지. 이 무심하고 아름다운 공원은 나에게 시공을 초월한 여행을 가능하게 해 주는구나.


지난 금요일에 모더나를 1억 원어치 샀다한들 (1억 도 없지만) 내가 그만큼 행복했을까. 지금 나에겐 이 공짜 그늘이, 공짜 산책이 1억 원의 20퍼센트보다 더 값진 경험이구나. 마음을 가다듬게 해 주어 고맙다. 이 아름다운 공원과 이 하늘, 이 날씨에게.


 비록 엄마는 돌아가셨지만 난 단 하루라도 그 모습을 보았지. 내가 열심히 살아온 이유를, 닿고 싶었던 지점을.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겐 굳이 힘들게 노력해서 엄마의 웃는 얼굴을 보여줄 게 아니라 그냥 엄마로서, 나로서 행복한 인생을 살아주면 그것으로 배를 채우고 또 그들의 인생을 살아가기를. 나를 웃게 하려고 살게 하지 않기를 기도해 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글을 쓰고, 산책을 하고, 나의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나눈다.



( 모더나는 이틀 후 다시 15퍼센트 하락했다. 역시, 뭘 모르면 금요일에만 사야 해. 이젠 쫄려서 못 들어가지...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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