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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흥미진진한 독자 Aug 01. 2023

도서관에서 게임하는 남자

상팔자 중에 상팔자

여름철 최고의 피서 장소는 단연코 도서관이다. 공짜 에어컨 바람을 마음껏 쐴 수 있으며 아늑한 조명과 따뜻한 분위기는 심신을 편안하게 해 준다. 도서관 책장에는 간택을 기다리는 책들이 열과 행을 맞춰 가지런히 줄 서서 나를 반겨준다. 보스가 나타나면 양쪽에서 90도로 인사하듯 책장 사이를 지날 때마다 묵직한 인사를 받는 것 같다.

도서관 자리는 더운 날씨 탓인지 아침부터 만석이다. 공부하는 청소년부터 신문 읽는 할아버지, 시험공부하는 청년들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삶의 목표와 씨름하고 있는 모습이다.  더위를 피해 여유롭게 책이나 읽자고 도서관에 온 내 팔자가 상팔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열하지 않게 시간을 소비해도 되고, 내가 읽고 싶은 것만 골라서 읽을 수 있는 지금 내 상황이 복 받은 상황이라 여겨졌다.



하지만 상팔자 중에서도 상팔자인 분이 있으니, 도서관이라는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하며 행복해하는 사람이 있다. 멀리서 바라봐도 포스가 남다른 똥배 나온 남자분이 비장하게 책상을 세팅하고 게임에 접속한다.  이 많은 책과 이 많은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게임을 하면 미안한 마음이 안 들까? 지금 이 도서관에서 내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는데 남편을 보는 순간 두 번째로 밀려난 느낌이다. 괜한 질투심이 올라온다.


도서관에서 가장 만나기 싫은 사람이 자판을 세게 두드리는 사람과 마우스를 자주 딸깍 거리는 사람이었는데 지금 내 남편이 그런 짓을 하고 있다( 노트북 자리지만 괜히 시비 거는 속 좁은 아내). 당신이 내는 소리는 도서관에서 가장 진상 짓에 들어갈 비매너라고 구박 폭격을 가한다. 성격 좋은 남편은 내가 왜 구박하는지 본마음도 모른 채 무음 마우스를 가지고 도서관에 나타난다.  눈앞에서 직접 마우스를 누르는 동작을 여러 번 보이더니 이 정도면 괜찮지?라는 눈빛을 보내온다. 웃는 얼굴이 밉살스럽다. 내가 싫었던 건 자판 소리도 마우스 소리도 아니다. 도서관에서 게임하며 즐거워하는 당신 마음의 웃음소리!! 그 소리가  싫었던 거야! 알겠니?


더위를 피해 도서관 왔더니 마음속에서 뜨거운 천불이 올라오 한다. 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갑자기 하늘에서 장맛비가 쏟아지며 자판소리도, 마우스 소리도 빗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맛비가 내 마음의 천불 식혀주며 남편을 감싸준다. 날씨의 가호도 받는 정말 운 좋은 남자다.


남편에게 무언의 압박을 주기 위해 두 권의 책을 선택했다.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와  <연경, 담배의 모든 것>을 펼쳐 놓고 읽었다. 남편은 이런 걸 왜 읽냐며 비꼬듯 웃고 지나간다. 왜 읽기는 당신 때문에 읽는다.  개똥벌레 같은 남편 말고 책벌레 남편을 원한다는 희망사항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잖아!  금연할 생각이 없는 당신을 위해 내가 담배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내겠다는 마음에  이 책을  선택한 거야!  당신 때문에 읽고 싶어진 책이라고!!


<남편을 버려야 내가 산다>라는 책도 도서관 책장에  꽂혀있던데 책 제목이 마음에 든다. 내일은 이 책을 읽을 작정이다.

다음부터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모든 이들의 정신건강을 위해 남편은 데려오지 않을 것이라 다짐한다.

(ft. 인생은 참 아이러니하다. 남편에게 불편한 감정을 주기 위해 선택한 이 두 권의 책은 오히려 남편을 이해하는 수단이 되어버렸다. 책벌레 남편도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담배에 너무 진심이어서 담배라는 기호 식품 하나로 책 한 권을 써낸 조선시대 사람을 만나면서 담배를 강제로 끊게 할 수 없겠구나 싶었다.  이해하고 싶지 않은데 책을 읽는 나는 자꾸 상대방을 이해하게 된다. 이런 내가 싫다. 건강에 앞선 기호식품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금연은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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