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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녜 May 23. 2024

​여름

여름이었다.


나는 여름에 태어났다. 어스름한 새벽을 깨우는 울음소리를 내며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더운 계절에 나왔다고 운명처럼 여름과 사랑에 빠진 건 아니었다. 숨이 턱턱 막히고 푹푹 찌는 더위에 하늘이 뚫리듯 쏟아지는 장맛비. 불쾌지수가 수직 상승하는 꿉꿉한 습도. 아스팔트를 녹일 듯한 태양열. 소금에 절듯 땀으로 흥건해지는 온몸. 호시탐탐 인간을 노리는 모기 녀석들. 나에게 여름은 하루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한 계절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름부터 시작된 나의 생은 여름 나라에서까지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서 사람들이 여름을 애정하는 이유를 알아갔다. 아니, 이제는 나도 여름을 조금은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듯싶다. 여름 하면 못마땅한 인상보다는 푸른 생명력이 눈앞에 펼쳐지고 여름에만 마주할 찬란한 순간이 분명히 있어서다.


  여름이 오면 짙은 나무숲에서 시끄럽게 들리는 매미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여름 바람에 춤추는 초록의 이파리들을 지긋이 바라보며 아름다운 자연에 고개를 끄덕인다. 해가 느리게 넘어가니 하루가 길어져 자투리 시간을 획득한다. 더위가 한풀 꺾이는 여름밤 달빛 아래서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하는 산책은 경쾌하다. 새파란 하늘에 몽글몽글한 구름을 풍경으로 삼아 시원하고 달콤한 수박을 한입 먹자면 여름 나기에 설렘이 묻어난다.


  여름날은 짧아서 찰나가 영원으로 자리하는 마법이 일어난다. 여름 방학은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처럼 순수하고 한여름 밤의 고백은 무더운 더위같이 뜨겁다. 그 해 여름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일직선으로 흐르는 시간에 의해 지난여름은 소멸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기억을 가슴속에 깊이 간직한다. 그리고 여름이 돌아올 때마다 그것을 꺼내어 또 다른 여름을 보낸다. "여름이었다." 문장 하나가 심금을 울리는 것도 여름의 찰나성에 기인한 것이겠지.


  모든 생명체에 생기가 도는 여름. 짧디짧은 여름철이 지나면 귀뚜라미 소리에 하나둘씩 고개를 숙이고 겨울에는 이내 깊은 잠을 청한다. '낮이 길고 더운 계절'의 여름. 이 계절을 기다리는 이들은 몽롱한 잠에서 깨어나 온몸으로 살아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에게 여름은 빛나고 소중한 존재다. 나에게도 여름은 마음 한구석에 안착하고 있는 초록빛 정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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