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박령은 되고 싶지 않아
아무리 집순이어도 말이야
전 세계적인 대혼란으로 어쩌다 보니 재택근무가 시작되었다. 매일 출퇴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도 잠시, 말레이시아 정부에서 거주하는 지역의 반경 5km 이상의 이동을 금지하였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집이라면 사족을 못쓰던 터라 불편하기는 해도 집순이의 만렙을 찍을 수 있겠다며 '이불 밖은 위험해' 하는 생각이 앞섰다. 게다가 재택근무로 광고주를 상대하는 창구인 전화가 지원되지 않으니, 이보다 더 좋지 아니한가!
2020년 3월 중순부터 4월 초까지는 반강제적인 집순이 생활이 꽤 괜찮았다. 이메일로만 광고주와 의사소통을 했기에 심적 스트레스가 거의 없었으며, 사무실에서 매일 같이 야근해야 했던 예전과는 다르게 칼퇴가 가능했다. 그리고 워낙 집에서 혼자 노는 법이 터득되었던 터라 약 2주간의 칩거 생활은 버틸 만했다.
그러나 선택형 집순이가 강압형으로 변모하던 순간, 그렇게 탈출이 하고 싶었다. 카페나 식당에서 취식이 금지되었고, 피트니스 센터도 문을 닫았다. 마트에서도 기나긴 줄을 서서 겨우 물품을 구매해야 했다. 배달 서비스마저 오후 8시에는 허용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 같은 생활이 한 달간 지속되니 이러다가 집순이가 지박령으로 변신할 것이 뻔했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서 주인공이 어느 날 잠에서 깼는데 흉측한 해충이 된 것처럼 말이다.
특히 몇 년간 생경했던 ‘고독’이라는 것이 발밑으로 부서지는 파도처럼 가까이 다가왔다. 인간관계의 범위가 매우 좁은 편인 나는 말레이시아에서도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만났다. 그런데 친구들 대부분이 내가 사는 지역의 반경 5km 이내 거주하지 않았기에 얼굴을 직접 볼 수 없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이 가슴에 비수를 꽂아 내리듯 공감된 적이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렇게 고독은 어느새 마음 한구석에 안착하게 되었고, 사람에게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온몸을 감싸며 살아있음을 자극해주길 바랐다.
집순이어도 지박령은 되고 싶지 않았다. 살아있는 감옥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서 사람답게 생활하고 싶었다. 사람이 그리워졌다. 그리고 사람이 그리워서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누군가는 외로움을 어르고 달래주는 특별한 존재였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결국 한 달간의 투옥 생활은 모르쇠로 일관했던 외로움을 증폭하여 폭발하는 기폭제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