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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녜 Sep 28. 2021

긴 여행의 시작

말레이시아 생활의 제2막을 열다.

몸이 꽁꽁 얼어붙는 한파가 웃돌기도 전에 연중 온화한 날씨가 계속되는 나라로 갑작스레 여행길을 떠났던 2019년 11월 18일. 당시에는 몰랐다. 말레이시아에서 2년 가까이 지낼 줄은, 그리고 이곳에서 여러 차례의 인생의 변곡점을 맞이할 줄은. 그래서인지 이맘때쯤이면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한국의 가을날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리고 어떤 한 노래가 무의식에서 반복적으로 재생된다.


  에피톤 프로젝트의 ‘긴 여행의 시작’이라는 노래가 있다. 전주는 기다란데, 노래가 짧아서 처음에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듣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왜 이 곡의 제목이 ‘긴 여행의 시작’인지 어렴풋이 이해하게 된다. 긴 여행을 하기로 결심한 마음가짐부터 꼭 필요한 물건을 배낭에 차곡차곡 쌓는 과정, 그리고 언제 고향으로 돌아올지 모른다는 핑계로 가지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모임. 여행을 준비하는 길을 상상하며 이 노래를 들으면 전주가 길어야 하는 게 납득된다.


  에피톤 프로젝트의 노래처럼 말레이시아에서 또 다른 항해를 시작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찰나에 물 흐르듯 찾아온 이직이 전환점이었다. 다만, 새로운 회사에서 일을 시작하기까지 기나긴 나날을 보내야 했다. 2021년 7월 1일부터 2021년 9월 14일까지 워크 퍼밋 비자(Employment Pass, EP)가 승인되는 데 약 세 달이 소요되었다. 마치 노래의 전주처럼 말이다. 그리고 2021년 9월 27일, 마침내 제2의 여행의 서막이 열렸다.


  사실 말레이시아 생활이 더없는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이곳에서 삶을 영위하는 이유는, 나 자신을 잃어보고, 정체성을 회복하고, 타인으로부터 스스로를 객관화하며, 지성인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가는, 일생일대의 성숙기를 체득하고 있어서다. 물론 이직이라는 현실이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지만,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과도 같은 성장을 계속해서 맛보고 싶어 하는 심중 또한 가슴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생활의 2막은 지금 베일에 싸여 있어 앞으로 어떻게 기상천외할지   없다. 그러나 이미 완성된 스케치는 뒤로하고 새로운  도화지에 또다시 스케치해야 한다는 점은 인지하고 있다. 이번에도 이전과 비슷하게 스케치를 그려낼지, 아니면 과감한 선들이 모이고 모여 파격적인 스케치를 완성할지는 살아보면 요지(了知)하게 되겠지. 이제부터  여행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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