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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녜 Jul 30. 2021

흐르는 강물처럼

인생사 새옹지마

"인생은 흐르는 강물과도 같다"라고 한다. 때로는 잔잔한 물결에 한없이 평화롭다가도 갑작스러운 급류로 거세진 물길에 어찌할 바를 모를 때가 인생과 같아서다. 목표 지향적이었던 파릇파릇한 10대, 20대 시절을 보내고 나서야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이유는 30대 처자의 시선에서 '물 흐르듯 사는 게 인생'이라는 걸 어렴풋이 깨닫고 있어서다.


  회사마다 다르지만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BPO(Business Project Outsourcing) 회사의 특성상 사직서를 내더라도  달간 직무를 이행해야 한다. 그만두었음에도 일해야 하는 기분은 헤어진 연인의 질척거림과 비슷한 찝찝함이었다. 이미 사직서를 제출했는데  달도 아닌  달씩이나 해야 하니 스트레스는 해소되기는커녕 극심한 수준에 이르렀다. 다음 목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적당한 '' 필요했다. 그래서 가족과 상의한 끝에 - 오롯이  결정을 존중해주신 부모님의 은덕에 - 이직이고 뭐고 퇴사 절차가 완전히 마무리되고 나서부터 휴식기를 가지기로 했다.


  사직서를 던지고 한 달쯤 지나던 5월의 어느 날이었다. 이력을 업데이트하고자 링크드인(Linkedin)을 접속했다. 보통 링크드인에서는 등록된 경력으로 알고리즘이 적용된 '추천 직업'이 뜬다. 이날도 여러 직업이 추천되었는데, 그중에서 눈에 띄는 직책이 하나 있었다. 고객을 직접적으로 상대하지 않으면서 디지털 마케팅으로 커리어를 이을 수 있는 매력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링크드인으로 'Easy Apply' 버튼만 누르면 이력서가 전송되는 공고였기에 부담 없이 입사를 지원했다.


  인고의 세월을 보내니 어느덧 퇴사하기 한 달 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당시에는 아직도 한 달씩이나 남았냐며 친구들에게 하소연을 했지만 말이다. 5월에 지원했던 포지션은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그런데 퇴사 준비로 바빠질 때쯤 해당 업무를 관할하는 팀 리더에게서 인터뷰 초대장이 날라왔다. 지원한 이후에 회사로부터 거의 한 달 동안 아무런 연락이 없었고 이미 기나긴 휴가를 보내기로 결심했던 터라 이메일로 송부된 초대장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실은  전에도 저명한 비디오 플랫폼 회사에서 인터뷰 기회가 있긴 했었다. 당시에는 퇴사 바로 직후에 직장 생활을 이어서 하는  자체가 피곤하여 정중하게 인터뷰를 거절했다. 이번에도 피차일반으로 인터뷰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전에는 내 의견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던 남자친구와 단짝이 요번에는 인터뷰를 승낙해보라며 필사적으로 나를 설득했다. '그래, 어차피 잃을 것도 없는 마당에 인터뷰로 경험치를 쌓자' 하는 생각으로 초대장을 수락했다.


  인터뷰 당일날이 되기까지 준비랄 것이 딱히 없었다. 그저 인터뷰가 빨리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나 막상 인터뷰는 미래의 상사가 될 면접자와의 인터뷰가 아니라 인상 좋은 외국인과의 안온한 대화로 젖어들었다. 그래서인지 마케팅 플랫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요하는 질문에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인터뷰에 임할수록 새로운 보직에 흥미가 늘어났다. 약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는 "합격"이라는 단어를 듣고서야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몇 가지 절차를 거쳐 마침내 이전 직장보다 월등히 우수한 조건의 오퍼레터(Offer Letter)가 이메일로 전달되었다.


  참으로 신기했던  퇴사하자마자 이직할 회사에서 바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휴식기를 그대로 유지할  있다는 것이었. 일은 하반기부터 시작해서. 뜻하지 않은 이직 성공으로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드리고 내가 원하는 휴식도 충분히 취할  있다는 게 놀라웠. 모든 것이 순조로운 지금이다.


  물 흐르듯 자연스레 '기회'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것이 내 것이라면, 아무리 애를 써도 미꾸라지처럼 손에서 미끄러지는 것은 애초에 내 것이 아니다. 나노 단위로 시간을 쪼개서 목표를 이뤄야 성에 찼던 이전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던 것은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긴장으로 뭉친 근육을 이완하여 온몸을 온전히 흐르는 강물에 맡기는 인생사 덕분이겠다. 인생은 참으로 흐르는 강물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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