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환점을 돌자 문뜩 P 과장이 생각났다. 나보다 출발이 늦었으니 반대편에서 P 과장이 오는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날 P 과장은 근육질의 두꺼운 어깨를 자랑하며 하얀색 나시티를 입었다. 찾기 쉬울 것 같았다. 반대편에서 오는 러너들에 집중하다 보니 지루함이나 힘듦이 덜했다. 그렇게 달리고 있는데 6km 지점에서 갑자기 뒤에서 낮은 저음의 "파이팅" 소리가 나며 근육질의 하얀색 나시티가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P 과장이었다. 순간 따라붙어볼까 하다가 내 페이스를 유지했다. 그렇게 P 과장은 어느새 저 앞 어딘가로 사라졌다.
아마 7km 구간 정도 지나서였다. 살짝 힘들다는 기분이 들었다. 호흡은 그래도 안정적이었는데, 반대쪽에서 여유롭게(?) 걸어오는 러너들이 보였다. 포기하지 않고 걸어서라도 완주하겠다는 대회에 대한 열정들이 대단했다. 그러다가 문뜩 '나도 잠시 걸으면서 숨을 골라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고개를 흔들며 두 눈 부릅뜨고 앞선 러너의 등을 쏘아보며 팔을 힘차게 휘둘렀다. 첫 대회인데 절대로 멈추기 싫었다. 그래도 속도는 11km/h대로 늦췄다. 첫 대회여서인지 페이스 조절을 보수적으로 하고자 했다. 기록보다는 완주가 목표였다.
몸이 지친 기분이 드니, 양보도 잘하게 됐다. 한 러너가 왼쪽 옆으로 달려 나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추월 못하게 속도를 좀 더 내서 앞설 수 있었지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양보를 했다. 나를 지나간 그 러너의 등에는 내가 다니는 회사의 경쟁사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아마 회사 동아리가 대회를 나온 것 같았다. 괜히 빈정 상했다. 왜 양보해 줬을까. 바로 따라잡아 앞질러 버릴까? 하다가도 금방 내 페이스를 유지했다.
그렇게 달리니 흙길이 끝나고 처음에 지나왔던 '연결브릿지'를 건넜다. 행사 진행 요원이 여전히 러너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막고 차량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문뜩 '저 차들은 아직까지 대기하는 걸까?', 괜한 걱정이 다시 들었다. '이렇게 힘든 와중에 생뚱맞게 차량 통제 걱정이라니!'
'연결브릿지'를 지나고 나니 오르막 길이 나왔다. '아 젠장! 출발할 때는 내리막 길이라 좋았는데, 다시 돌아 갈라니 오르막이었다. 체력도 떨어져 가는 마당에!'
그래도 힘을 내보겠다고 다시 팔꿈치를 뒤로 크게 당기면서 힘차게 휘둘렀다. 그렇게 조금 더 달리자 출발선 인근 광장이 나왔다.
'드디어 끝이 보인다. 저기가 끝인가? 그런데 왜 결승선 구조물이 안 보이지?'
마지막 구간이 굉장히 길게 느껴졌다.
스퍼트를 내볼까 하다가, 너무 힘들어져서 걷고 싶어질 것 같아 현재 페이스를 유지했다. 그래! 끝까지 '달리는 것'이 목표다!
드디어 결승점이 보였다. 결승점 주변에는 이미 먼저 들어온 러너들이 동료나 지인들을 기다리며 응원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혹시나 해서 나를 앞질러간 P 과장, 5km를 다 달렸을 K 대리를 찾아보지만, 역시나 안 보였다.
그렇게 결승점을 통과하자 나도 모르게 오늘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해냈다."
이 순간 일본 오사카의 명물인 양손을 든 '글리코 러너' 간판이 떠올랐지만, 오른 주먹 불끈 쥐는 것으로 참았다.
다행히 걱정했던 왼쪽 발목도 달리는 내내 불편함이 없었다.
천천히 속도를 줄이다가 걸으면서 손목을 들어 스마트워치를 확인했다. 눈에 들어온 것은 53분 XX초. 이미 몸이 기진맥진해서 시계를 자세히 볼 여유가 없었다.
조금 더 걸어가니 10km 완주 기념품 부스가 보였다. 가서 행사 요원이 전해주는 비닐봉지를 받아 들고는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았다. 봉지 안을 들여다볼 기운도 없었다.
숨을 가다듬고 P 과장에게 전화했더니 K 대리와 같이 있었다. P 과장은 목표한 10km를 45분에 끊었다고 한다. K 대리도 목표한 5km를 30분에 완주하는 것을 달성했다. 목표를 달성해서 그런지, P 과장과 K 대리의 얼굴이 밝게 빛나 보였다.
이들과 함께 중앙광장으로 가서 사람이 드문 곳에 앉자마자 러닝화를 벗었다. 왼쪽 발목 통증이 걱정되어, 발목보호대를 하고 달렸더니 왼발 앞박이 강해서 그런지 답답했다. 앉아서 10km 완주 기념 선물을 보니, 꿀호떡, 과자, 음료수, 멸치 한 봉지 그리고 10km 기념 완주 메달이 있었다. 바다의 날 기념 대회 아니랄까 봐 볶음용 멸치 한 봉지가 선물에 포함됐다.
완주 기념 메달을 보니 뿌듯했다. 마치 큰 상을 받은 것 마냥 메달을 들어 요리보고 조리 살펴봤다. 마치 어린아이가 소중한 장난감을 선물 받았듯이 메달을 손에서 놓기 싫었다. 그리고 기념촬영은 필수였다. P 과장, K 대리와 기념 촬영을 찍고 앉아서 서로 달렸던 이야기를 나누면서 열기를 식혔다.
10km를 완주하면 대회 주최 측에서 마이크로칩으로 측정된 공식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링크를 문자로 보내줬다. 내 첫 마라톤 대회 기록은 53분 22초, 속도는 11.31km/h, km당 평균 5분 20초 페이스로 달렸다. 순위는 10km 3386명 중에 784등이었다. 10km 남자 2413명 중 698번째였다. (대회전 신청은 4088명 참가였는데, 대회 당일 700명가량이 줄었다.) 그래도 한 시간 내에만 달리자 했는데, 53분이라는 내 인생 최고 기록을 세웠다. 나의 달리기를 증명하는 공식적인 숫자가 생겼다. 다음번에 달린다면 50분의 벽을 깨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나와 마찬가지로 K 대리 역시 마라톤 대회의 매력에 흠뻑 빠져 버렸다.
P 과장의 "다음에도 대회 나가실래요?"라는 물음에, K 대리와 눈이 마주치며 웃었다.
제29회 바다의 날 기념 마라톤 대회 공식 10km 완주 기록증을 모바일로 받을 수 있다.(맨 왼쪽). 가운데와 오른쪽은 마이크로칩을 통해 기록된 내 기록과 순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