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흑백요리사에서 백종원 심사위원이 참가자들의 음식을 한 입 먹고는 팔짱을 낀 채 오른 주먹으로 턱을 괴고는 내뱉는 감탄사다. 맛이 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취하는 제스처.
처음으로 무동력 트레이드밀을 달리고 난 후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거참! 재미있네!" 물론 턱을 괴지는 않았다.
10월 20일(일)~24일(목)까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외곽의 선웨이 리조트 호텔(Sunway Resort Hotel)로 출장을 다녀왔다. 아니 이 글을 쓰는 지금으로 보면 다녀오는 중이다. 그렇다. 비행기 안이다.
쿠알라룸프르 외곽 셀랑고르주에 위치한 대형 리조트호텔로 '선웨이 라군(Sunway Lagoon)'이라는 거대 테마파크를 둘러싸고 '선웨이 리조트 호텔', '선웨이 파라미드 호텔', '선웨이 라군 호텔' 등 고급 호텔들이 테마파크를 둘러싸고 있다. 그 옆으로는 '선웨이 시티(Sunway city)'라는 대형 쇼핑몰이 함께 있다.
오랜만에 해외 출장이었다. 바쁘게 출장 준비를 하면서도 구글맵으로 숙소인 선웨이 리조트 호텔을 찾아봤다. 여행을 가기 전에 항상 구글맵으로 달릴만한 코스를 찾아보듯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러닝코스를 찾았다.
구글맵으로 보니 선웨이 라군과 인근 호수가 러닝코스가 있을 것 같았다. 혹시나 해서 챗GPT에게도 인근 러닝코스를 물었다. 역시나 인근 호수로 선웨이 사우스 퀘이 레이크가 나왔다.
선웨이 리조트 호텔 좌하단에 커다란 호수 선웨이 사우스 퀘이 레이크가 있다.
그래서 선웨이 사우스 퀘이 레이크 주변을 달리기로 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은 가을이 절정에 이르며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는데, 겨울철 동남아시아의 날씨가 궁금했다. 막상 도착한 말레이시아의 날씨는 26도~33도로 초여름 날씨에 살짝 습했다. 그래도 예상치도 못한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견딜만했다. 이래서 동남아시아 여행은 겨울이 성수기라고 하나보다.
첫날 새벽과 둘째 날 오후 짬을 내서 호수가로 달리러 가봤지만 지도에서 본 선웨이 사우스 퀘이 레이크는 프라이빗 구역으로 출입이 안 됐다.
선웨이 리조트 호텔 주변 도로의 새벽 모습
그렇다고 테마파크를 중심으로 형성된 호텔을 따라 달리지니 코스 자체가 애매했다. 그냥 차도 옆에 난 인도를 따라 달릴 뿐, 뭔가 두리번두리번하는 재미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번 출장은 실외 달리기는 코스를 찾기 어려울 것 같았다. 리조트와 연결된 테마파크는 아침 시간에는 닫혀서 새벽에 들어갈 수 없었다. 테마파크가 색다른 러닝 코스가 될 것 같았는데, 이 역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달리기를 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내키지 않지만 리조트 내 피트니스를 찾았다. 그래도 러닝머신, 자전거, 각종 운동 기구가 갖춰져 있었다.
선웨이 리조트 호텔 파트니스의 러닝머신과 오른쪽은 바로셀로나 해변가 모습이 나오는 화면
러닝머신 위로 올랐다. 러닝머신 앞 유리 너머로 리조트 수영장이 보였다. 항상 회사에서 오래된 러닝머신을 달리다가 리조트 러닝머신을 보니 신기했다. 기존 러닝머신처럼 각종 수치를 볼 수도 있었지만, 마치 실외를 달리듯이 바르셀로나 해변가 모습을 보는 화면을 볼 수 있는 디스플레이 기능이 있었다. 신기했다.
평소 달리던 러닝머신이 아닌 리조트 수영장 모습을 보며 달리면 기분이 새로워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았다. 착각이었다. 러닝머신은 러닝머신이었다. 5분도 안돼 지루해졌다. 게다가 평소처럼 일산호수공원을 떠올린다던지 마인드 컨트롤도 안 해서 금방 지쳤다. 그래서 바르셀로나 해변이 나오는 디스플레이 모드로 전환했다.
마치 해변가를 달리듯이 내가 달리는 속도에 맞춰 영상이 바뀌었다. 게다가 해변가를 지나거나 달리는 사람들의 모습도 있었다. 저 멀리 바르셀로나 W호텔이 보였다. 궁금했다. 과연 화면에서 저 멀리 W호텔이 계속 멀리 보일지 아니면 가까워질지. 후자였다. 10분 정도 지나니 어느새 멀리 있던 W호텔 밑까지 도달했다. 화면만 보면 1km~2km 달리다가 W호텔에서 방향을 바꿔 돌아가는 화면이었다. 역시 기술의 발전이란 대단하다. 아니면 내가 너무 최신 문물에 무지한 걸까?
어차피 출장 기간에는 무리해서 전투적으로 달릴 생각이 없었다. 천천히 러닝 머신 위를 달리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오른쪽에서 카가 큰 백인 아저씨가 성큼성큼격렬하게 달리고 있었다. 대체 속도가 얼마나 빠른 걸까? 속도가 잘 안 보인다. 오른쪽으로 돌아보니 저 멀리 TV에서만 보던 기구가 눈에 들어왔다.
선웨이 리조트 호텔 피트니스에서 발견한 무동력 트레이드밀
넷플릭스의 피지컬 100의 첫 관문이었던 무동력 트레이드밀! 다른 러닝머신과는 다르게 바닥이 타원형으로 오목하게 파여있다. 전기로 바닥 트레일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 발로 바닥을 밀어서 러닝을 하는 구조다. 그래서 무동력이다. 피지컬 100이나 운동 유튜브를 보면 일반 러닝머신보다 운동강도가 세다고 한다.
갑자기 호기심이 일었다. 안타깝게도 이미 누군가 무동력 트레이드밀을 달리고 있었다. 내려올 기미가 안보였다.
"그래! 내일은 무동력 트레이드밀이야!"
어차피 이번 출장에서 거리를 달리지 못할 바에는 최신 기구를 시험해 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한번 호기심이 일어나니깐 머릿속에서 무동력 트레이드밀이 떠나질 않았다. 대체 어떤 느낌일까? 하루종일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리고 드디어 다음날 새벽 6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오늘이 출장 마지막날이라 오늘 못하면 무동력 트레이드밀을 달릴 기회를 찾기 힘들 것 같았다. 제발 아무도 없기를 속으로 외치며 내려갔다.
운동화 끈을 조여매고 1층 피트니스로 향했다. 러닝머신은 이미 어제 보았던백인 아저씨를 비롯한 다른 러너들이 차지해서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다행히 무동력 트레이드밀은 비어있었다. 아싸! 잽싸게 수건을 챙겨 기구 위로 올랐다.
오목하게 파여있는 바닥 위로 올라, 앞쪽 올라와 있는 부분 레일에 오른발을 올렸다. 레일을 밟는 힘에 바닥이 자연스럽게 뒤로 미끄러졌다. 경사진 언덕을 오를 때 발이 레일을 뒤로 밀면서 오르 듯이, 레일을 미는 힘으로 기구의 바닥을 뒤로 밀어서 달리는 구조였다. 그리고 자전거 기어처럼 오른쪽 옆에 있는 노란색 레버로 레일의 저항을 조절할 수 있었다. 저항이 크면 레일이 잘 안 미끄러졌다. 걷기에 좋았다. 반면 저항이 약하면 레일이 쭉쭉 뒤로 밀려 안 뛸 수가 없었다. 마치 얼음 위를 달리듯이 쭉쭉 미끄러지는 느낌이었다. 즉, 쳇바퀴 안에서 다람쥐가 챗바퀴를 돌리는 것과 똑같았다.
일반 러닝머신과 비교해서 몸의 자세를 잡기가 힘들었다. 바닥은 움푹 파여, 조그만 힘에도 쭉쭉 미끄러지니 상체의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다. 얼음 위를 달릴 때 마냥 상체가 휘청 휘청거렸다. 오히려 속도가 빨라지니깐 자세가 안정적이 되었다.
조금 달리니 종아리가 뻐근해졌다. 딱 언덕길을 달리면 나타나는 종아리가 터질 것처럼 탱탱하게 붓는 느낌이다.달리면 달릴수록 속도가 조금씩 빨라졌다.
순간 피지컬 100에서 본 것처럼 전력질주를 해보고 싶어졌다. 다리를 쭉쭉 뻗어 속도를 높여 전력질주를 했다. 무동력 트레이드밀에서는 내 신체능력이 된다면 계속 속도를 높이면서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회사 피트니스의 러닝머신은 최고 속도가 15km/h였다. 최고 속도 이상 속도를 올릴 수가 없다. 시선을 내려 계기판을 봤다. 속도가 20.4km/h까지 올라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기분은 항상 생동감을 준다. 내가 살아있는 기분이 생생하게 든다. 그래서 달리기를 포기할 수가 없다.
양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두 발을 들었다. 레일 속도가 줄어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걸었다. 어차피 오늘은 무동력 트레이드밀을 시험 삼아 달리는 날이니깐 하는 마음으로 슬슬 달렸다. 다시 천천히 달려봤다.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쉽지 않다. 점점 빨라졌다. 달리던 관성이 있어서 그런지 의외로 속도를 늦추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기어를 높였다. 저항이 세지니 속도가 천천히 줄었다. 마치 자전거 기어를 높여 묵직하게 페달을 밟는 기분이다.
무동력 트레이드밀을 처음 달린 소감은 재미있었다. 물론 밖을 달릴 때와 비교할 순 없다. 하지만 새로운 느낌으로 달린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달리기에 푹 빠져있다. 새로운 방식으로 달리는 것에 이렇게까지 설레일일인가 싶다. 그런데 설레고 생동감이 느껴져 기분이 좋기만 하다.
하지만 이번주는 출장 때문에 마음에 차게 달리지 못했다. 지난 주말부터 일주일 동안 슬슬 달리기만 했다. 이제는 어서 다시 주말이 와서 일산호수공원을 달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