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월 여수에서 오동도 방파제를 달렸다. 오동도에서 백색 등대로 이어지는 길에 짧은 경사로가 있었다.
"아우 씨!"
눈앞에 펼쳐진 언덕길을 바라만 봐도 숨이 턱! 하고 막혔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잰걸음으로 올랐다.
야외를 달리다 보면 '저항'을 마주하는 순간이 있다. 풀어서 말하면 환경 요인으로 달리기 힘든 구간을 만났을 때다.
대표적인 것이 언덕길이다. 일산호수공원을 달리면 오르막길이 있는 포인트가 3군데 있다. 웨스턴돔을 등지고 오른쪽 방향으로 달리다가 호수공원을 3/5 정도 달려 호수교를 지나고 나면 바로 언덕길이 나온다. 사실 경사는 그리 높지 않다. 그래도 몸 측정계 기준으로 거리가 50m는 되는 것 같다. 이 구간에 들어서는 것이 이미 3km를 달린 시점이다. 이미 몸은 지쳐가고 있는데, 언덕길을 마주쳤을 때, 참 곤욕스러웠다. 가뜩이나 힘든데, 언덕길을 오르려면 힘을 더 내야 하니 말이다. 처음 호수공원을 달리면서 가장 싫었던 구간이 바로 짧은(?) 언덕길이었다. 오르고 나면 짧지만 막상 오를 때는 세상 길게만 느껴지는 것이 언덕길이다.
그래도 2년 넘게 언덕길을 달리다 보니 나름의 요령과 재미를 찾게 된다. 어느 날 문뜩 '피할 수 없으면 즐기기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힘들다고 달리기를 포기하는 것은 나의 선택지에는 없었으니깐.
어쩔 때는 일부러 더 속도를 내서 언덕길을 올랐다. 또는 체력 보존을 위해 천천히 달려보기도 했다. 여러 방법으로 오르다가 평소 보폭보다 보폭을 더 줄여서 '타다다다닥' 잰걸음으로 오르기도 했다. 걸음을 쪼개니, 언덕길을 오르는 것이 한결 수월했다. 그래서 지금은 마지막 방법인 잰걸음으로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언덕길을 오른다. 웬만하면 언덕길이라고 속도를 늦추고 싶진 않았다. 언덕길이라고 힘 아끼겠다고 속도를 한번 늦추면, 그 이후 페이스가 계속 떨어지기 때문이다.
두 번째 언덕은 호수교를 지나 폭포광장 쪽으로 가다 보면 작은 다리인 낙수교가 나온다. 출발지점에서 약 3.5km 지점이다. 낙수교는 작은 다리지만 봉긋 솟아있다. 낙수교를 오를 때 언덕이 있다. 5m도 안 되는 짧은 언덕인데, 경사가 있어서 오르는데 은근히 힘이 들어간다.
그런데 낙수교는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가 더 신경 쓰인다. 내리막길이라고 경사에 몸을 맡긴 채 내려오면 오히려 무릎에 무리가 가기 쉽다는 이야기가 기억났다. 그래서 내려올 때도 의식적으로 속도를 더 조절해서 내려온다. 필라테스를 하면서 배운 것 중 하나가 중력에 저항하는 법이다. 예를 들면 스쿼트를 할 때, 몸을 낮출 때 중력에 몸을 맡긴 채 쑥 내려가지 말고 내려가는 속도를 내 몸으로 조절하면서 내려가면 운동 효과가 늘어나고 몸이 받는 무리가 적다. 달리기도 마찬가지다. 내리막길이라고 중력에 몸을 맡겨 내려오기보다는 보폭을 줄여 다리에 충격이 적게 오도록 속도를 조절해서 달리고 있다.
세 번째 구간은 폭포광장을 지나 호수교 반대편을 지나면 만난다. 출발점에서 4.3km 지점이다. 여기서 호수교를 지나면 꽃전시관 아니면 호수가를 따라 야외공연장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 방향, 꽃전시관 방향으로 향하면 언덕길이 나온다. 이 언덕길도 싫었다. 4km 넘게 달려서 한참 지친 상태에서 짧은 언덕길이라도 오르기가 더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꾸준히 달리니 어느 순간부터는 별생각 없이 달리게 됐다.
달리는 것 자체를 즐기면서부터 언덕길도 하나의 재미거리가 됐다. 언덕길을 오르면 확실히 다리가 무겁다. 하지만 그만큼 다리에 힘이 더 들어가면서 생동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언덕길을 다 오르면 기분도 개운하다. 한걸음 한걸음 다리에 힘을 줘서 언덕길을 오르고 있는데, 언덕길 정상에 도착해 평지로 된 길에 도착했을 때, 마치 자전거의 기아가 풀리면서 페달이 가볍게 돌아가듯이, 저항감이 사라지며 갑자기 다리가 가벼워지는 구간이 있다. 그 순간 '다 올랐다'는 자부심과 함께 나를 뒤로 잡아끌던 힘이 사라지는 해방감도 느껴진다.
또한 처음 코너길을 달릴 때처럼 처음 넘는 언덕은 '저 언덕을 넘으면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궁금하기도 하다. 또 '지금 달리는 이 언덕길은 산 길보다 더 평탄하겠지?', '이 언덕길을 오르는데 에너지를 얼마를 더 쓸까?' 등 다양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렇게 생각이 이어지다 보면, 어느 순간 산 트레킹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길 자체는 더 험하겠지만, 흙길이라 바닥은 푹신하고 경사는 더 높고 길 것 같다. 하지만 나무로 가득한 숲길을 달린다는 생각을 하면, 빽빽한 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향 가득한 청량한 공기를 상상하면 가슴이 두근 거린다. 언젠가는 꼭 도전해보고 싶다.
지난 8월 여수에서 오동도 방파제를 달렸다. 앞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달렸다.
언덕길 말고 또 다른 저항은 바로 '맞바람'이다.
나는 보통 새벽 6시~7시에 호수공원을 달리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이 드문 것도 이유지만, 새벽 시간에는 바람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겨울이라도 바람만 없으면 춥지 않다. 오히려 오전 혹은 오후 시간에 바람이 부는 경우가 더 많다.
호수공원은 웨스턴돔에서 라페스타 방향으로 옆으로 길게 달릴 때 맞바람이 강한 편이다. 어느 계절이건 맞바람을 헤치고 달리는 것이 힘이 더 든다. 맞바람이 투명한 벽이 되어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다. 그런 바람의 저항을 이기기 위해 힘을 더 내서 몸을 앞으로 밀어야 한다. 그래서 맞바람이 불면 앞으로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에 힘을 더 주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힘을 내서 달리면 어느 순간부터는 바람을 헤치고 달리는 청량감이 찾아온다. 양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거센 바람 소리는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빠르게 뛰는 심장, 거칠어지는 호흡이 귓가의 바람 소리와 어우러져, 나 스스로 엄청 빨리 달리는 듯한 기분 좋은 착각이 든다. 물론 남들이 보면 실제로 빠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함정이다. 예전에 내가 달리는 모습을 찍은 영상이 있는데, 내 생각보다 느려서 충격을 받았었다.
맞바람은 저항이 되기도 하지만 달리기로 한껏 오른 열기를 시원하게 식혀주는 역할도 한다. 맞바람이 주는 청량감이 달리는 맛을 더해준다. 지난 8월 여수의 오동도 방파제를 달렸을 때, 바닷가 특유의 짠내와 함께 앞에서 불어로는 바닷바람은 매우 청량했다. 숨 막히게 무더운 날씨에 시원한 바닷바람이 주는 시원함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맞바람이 있다는 것은 방향을 바꾸면 등바람이 된다는 것이다. 맞바람은 힘들게 뚫고 지나가야 하지만, 등바람을 맞으면 왠지 다리가 세상 가볍고, 저절로 움직이는 것 같다. 바람이 등 뒤에서 나를 밀어주니, 그 추진력으로 속도가 붙는 것이 느껴진다.
날씨도 마찬가지다. 눈이 오거나 비가 오면 달리기를 쉬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눈이 올 때도 달려봤다. 눈이 오면 바닥이 미끄러워 조심스럽게 달리게 된다. 그리고 눈이 좀 쌓이면, 발이 눈에 푹푹 빠지며 발이 무거워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신발이 젖어 발에 축축함이 느껴진다. 양말까지 젖은 그 축축한 느낌, 생각만 해도 정말 싫다.
그래도 새벽 눈 오는 호수공원을 달리는 풍취가 있다. 어두컴컴하지만 고요하다. 그런 와중에 사방에서 사부작사부작 눈이 쌓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나의 발걸음 소리는 '탁! 탁! 탁! 탁!'에서 어느새 '뽀드득! 뽀드득' 눈 밟는 소리로 바뀐다. 눈 오는 날 달리기의 가장 큰 매력은 뒤를 돌아봤을 때다. 뒤를 돌아보면 눈이 쌓인 길에 오로지 내 발자국만 찍혀 있다. 눈이 오고 난 후 가장 처음 그 길을 걸은 사람이 나라는 사실에 묘한 흥분감이 돈다.
2년 넘게 달리면서 못해본 것이 우중 러닝이다. 비 올 때, 한번 달려보고 싶은데 엄두가 안 난다. 축축한 신발, 비에 젖어 무거운 운동복, 생각만 해도 무겁다. 그래도 한 번은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다만, 비 오는 날 달리러 나가는 것 말고, 달리는데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맞아 보고 싶다.
올해 여름처럼 무더운 날씨 속에서 달리는 것은 사절이다. 가을이 되니 올해 여름이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더웠는지 새삼 실감이 났다. 여름에는 평소 달리던 구간의 3/5도 안 돼서 지쳐서 걷곤 했다. 여름 내내 더위 때문인 줄 알면서도 컨디션이나 체력이 떨어졌을까 봐 노심초사했다. 다행히 본격적인 가을이 되니 다시 달릴만하다.
친한 후배 K 과장이 얼마 전에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여름에 덥다고 달리기를 쉰 러너들은 가을에 다시 달리면서 힘들어 하지만, 여름에 꾸역꾸역 달린 러너들은 가을에 펄펄 날아다닌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 괜히 어깨 한번 으쓱하게 된다.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는 것 또한 재미다. 사실 달리기 편한 것은 평탄한 트랙이나 아스팔트 길이다. 하지만 너무 평탄해서 때로는 그 단조로움이 지겹게 느껴진다. 하지만 보도블록이나 푹 들어간 아스팔트 길, 희미하게 느껴지는 자전거 도로의 경사, 메타세쿼이어길의 흙길을 달리면, 그 불규칙한 도로 상황 때문에 달리기에 더 집중하게 된다. 행여나 발을 헛디딜까 봐, 혹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달리기에 더 집중하면 지루할 새가 없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언덕길, 맞바람, 눈, 불규칙한 바닥 등 저항이 참 싫었는데, 어느 순간 이를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어떻게 보면 한결같은 달리기에 작은 변화를 주는 다양한 저항들 덕분에 달리기가 지루할 새가 없다. 그때그때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저항을 즐기고 있다. 또 새로운 저항 요소는 무엇이 있을까?
지난 8월 여수에서 오동도 방파제를 달렸다. 방파제를 달리며 맞바람과 등바람을 즐기면서 달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