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린이 다이어리 68
8※ 프라하 마라톤 대회 시작을 알리며 한 여성 마라토너가 만세를 부르며 출발선을 통과하고 있다.
5월 4일(일) 오전 8시. 프라하 마라톤 대회인 'ORLEN PRAGUE MATRTHON 2025'가 한 시간 남았다.
전날 오후 갑자기 내린 부슬비로 기온이 뚝 떨어졌다. 10도를 넘나들던 프라하의 아침 기온이 10도 밑으로 뚝 떨어졌다. 성 바츨라프 동상이 있는 바츨라프 광장에서 얀후스 동상이 있는 구시가 광장으로 향하는 마라토너들로 줄을 이었다. 갑작스럽게 추워진 날씨에 아랑곳하지 않고 짧은 반바지에 쇼츠 차림에 앞에는 배번을 달고 들뜬 혹은 비장한 표정으로 구시가 광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반면에 그들을 응원하기 위한 사람들은 너도 나도 패딩처럼 두꺼운 옷을 껴 입고 있었다.
프라하에서 5박 6일 일정의 마지막날, 프라하 마라톤 대회를 두 눈으로 구경했다.
2일 전인 여행 4일 차, 천문시계탑이 있는 구시가 광장을 지나다가 낯익은 구조물이 눈에 띄었다. 분명 2일 전엔 없었는데. 파란색의 게이트 모양의 구조물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ORLEN PRAGUE MATRTHON 2025'라고 쓰여있었다. '엥? 마라톤 대회? 프라하에서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고?'
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해봤다. 프라하 마라톤 대회가 프라하를 떠나는 날인 5월 4일(일) 오전에 열린다는 것이다. 오후 17시 비행기라 오전에 출발은 볼 수 있겠다 싶었다. 묘한 흥분감이 일었다.
올해 몸 상태가 안 좋아 제대로 달리지 못했다. 대회 참가는 꿈도 꾸지 못했다. 컨디션이 전혀 회복되지 않아 달리기 말고 등산이나 수영 같은 다른 운동을 찾아봐야 하는 생각이 들던 차였다. 프라하에 올 때도 러닝화를 챙겨 오지 않았다. 무리해서 달렸다가 진짜로 무리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달리기에 대한 열정이 빠르게 식어가던 차에, 프라하 마라톤 대회를 두 눈으로 볼 기회가 생긴 것이다.
'달리기를 포기하지 말라는 계시인가?'라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그래서 프라하 마라톤 대회는 꼭 보고 가기로 했다.
마라톤 대회 당일 오전 8시. 구시가 광장에 세워진 스타트/결승점 구조물 주변으로 각종 부스가 마련돼 있었다. 이미 광장은 마라토너, 응원객들로 가득 찼다. 여기저기서 마라토너들이 가볍게 다리거나 스트레칭을 하면서 몸을 풀고 있었다.
작년에 10km 마라톤 대회를 두 번 나갔을 때 같은 흥분감이 밀려왔다. 실제 풀코스 마라톤 대회는 처음 구경하는 것이었다. 코스를 보니 구시가 광장에서 시작해 명품샵들이 몰려있는 '파르지슈스카(Parizska)' 거리를 지나 카를교를 지나 프라하성을 돌아 다시 블타바강 강변으로 온다. 그리고 프라하를 관통하는 블타바강 강변을 길게 따라 달리는 코스였다. 프라하 마라톤 대회를 검색했더니 주로 평지를 달려 난이도가 쉽다는 평가였다. 아름다운 프라하 역사지구를 따라 달리면 매력적인 도심을 구경하느라 힘든 줄도 모르고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회장 주변을 둘러보는데 중국어가 들렸다. 프라하 마라톤을 위해 중국에서 온 마라토너들이 보였다. 최근 프라하에는 아시아 관광객은 한국 사람이 가장 많다고 하는데, 한국 마라토너는 잘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한 중국 마라토너는 중국어로 핸드폰을 내밀며 말을 걸었다. 우리가 중국인처럼 보였나 보다.
42.195km 풀코스 대회인데 머리가 하얀 노년 마라토너들도 있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마라톤을 달릴 수 있다니, 나도 저렇게 건강하게 나이 들고 싶었다. 다들 신나 보였다.
비록 날은 추웠지만 달리기에는 좋은 날씨였다. 처음엔 춥더라도 조금 달리면 몸에서 나는 열기로 추위를 금방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찬 공기로 몸에 너무 열이 오르지도 않는 쾌적하게 달릴 수 있는 날씨였다. 이런 날씨에 마라톤 대회라니. 계속해서 입맛만 다셨다.
출발선 근처에서 등에 큰 깃발을 꽂고 몸을 풀고 있는 마라토너들이 보였다. 페이스 메이커들이다. 말로만 들었던 페이스 메이커. 이들은 각자 다른 색깔의 깃발을 꽂고 있었고, 깃발에는 3:30, 4:00 등 시간대가 쓰여 있었다. 이들을 따라 달리면서 각자의 페이스를 확인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신기했다.
몸을 푸는 페이스 메이커들 근처에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다.
"ALL RUNNERS ARE BEAUTIFUL(모든 러너는 아름답다)." 이제는 그 의미를 공감할 수 있다.
출발 시간이 다가오면서 여기 저기서 마라토너들이 몸을 풀기 시작했다. 대회에 참가한 마라토너들은 어떤 러닝화를 신는지 궁금해 두리번두리번거렸다. 유독 아디다스, 아식스, 브룩스 로고가 많이 보였다. 아디다스가 대회 타이틀 스폰서였다. 러닝화 욕심이 슬금슬금 고개를 내밀었다. 괜히 사진 않더라고 신어보고 싶어졌다.
출발 20분 전 출발선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대회 진행자가 페이스 메이커들을 일일이 소개하고, 이어서 엘리트 선수들을 소개했다.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체코말로 쉴 새 없이 호들갑스럽게 떠들었다. 진행하다 숨넘어가면 어쩌나 싶을 정도였다.
10분 전, 5분 전, 1분 전, 30초전, 10초전, 타앙!
환호성과 함께 마라토너들이 뛰쳐 나왔다. 출발에 맞춰 체코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베드르지흐 스메타나(Bedrich Smetana)'의 '나의 조국' 2악장 '몰다우강'이 반복되어 구시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블타바강의 독일어 명칭인 몰다우강을 묘사한 음악으로 넓은 블타바 강물이 조용히 흐르는 모습을 묘사한 바이올린 협주가 흘러나온다. 비록 경쾌하진 않지만 장엄하고 비장미가 넘치는 멜로디로 이제 막 대회 첫발을 내딛는 마라토너들의 심정과 잘 어울렸다. 음악에 맞춰 힘차게 한발 한 발을 내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엘리트 선수들에 이어 일반 선수들이 뒤를 따랐다. 어떤 이는 비장감 넘치는 표정으로, 어떤 이는 행복하게 웃으며 만세를 외치며 달렸다. 마치 동화 속 피리 부는 사나이의 피리소리를 따라가는 아이들처럼, 마라톤 대회라는 황홀경에 빠져 따라가는 마라토너들의 행진이 장관이었다. 이들이 내뿜는 에너지가 피부에 와닿으며 흥분되기 시작했다.
참 별별 사람들이 다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마라토너는 금발 머리의 백인 남성인데 상의를 탈의하고 짧은 반바지에 번호표를 달고 두 주먹을 불끈 쥐어 하늘 위로 뻗으며 달리고 있었다. 마치 그리스의 영웅 헤라클레스 같았다.
그렇게 모든 마라토너들이 출발선을 빠져가는데 21분이 걸렸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1만 600명이 참가한 대회였다. 마음 같아서는 이들이 결승점에 돌아오는 모습까지 보고 싶었지만, 출발만 구경했다.
오전 내내 주변 구경을 하다가 점심을 먹는데 관광객들 사이로 번쩍번쩍 빛나는 메달을 목에 건 마라토너들이 하나둘씩 바출라프 광장에 마련된 탈의실로 걸어왔다. 12시경이니 출발 3시간이 지났다. 빠른 마라토너들을 결승점에 돌아왔을 시간이다. 마라톤 대회가 끝났구나 싶었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를 타고 프라하 역사지구를 빠져나오는데 아직 한창 달리는 마라토너들이 보였다. 아직 대회는 끝나지 않았다. 씩씩하게 달리는 마라토너, 지쳐서 걷는 마라토너 등 제각각이었지만 그 모습 자체가 아름다웠다.
"All Runners Are Beautiful!"
그래도 마라톤 대회장 근처에 마련된 부스에서 프라하 마라톤 티셔츠를 판매해 와이프한테 선물 받았다.
프라하에서 내가 산 유일한 기념품이었다. 아직 난 달리기를 좋아하는 것이 맞았다. 이 티셔츠 선물이 어찌나 좋던지.
언젠가는 프라하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러 다시 올 수 있을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