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만난 지 11주 차
아가야,
이제는 질 초음파가 아니라 배 초음파로 만날 수 있을 만큼 자랐구나.
이제 엄마 배는 제법 볼록해져서, 두꺼운 니트 속에는 숨길 수 있지만 얇은 옷 위로는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단다. 이번 검진은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어. 엄마가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아가에게 많이 미안한 일이 있었어.
며칠 전, 할머니와 집 근처 작은 동네 목욕탕에 갔어. 오랜만에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묵은 때도 벗기고 참 좋았어. 할머니는 위험하다고 가길 꺼려하셨는데, 조심할 테니 가자고 엄마가 설득을 했었지. 목욕탕으로 가는 길에, 엄마는 일어날 수 있는 위험한 상황들을 죄다 상상해 보았어. 각 상황에 대한 대비책도 함께 고민하면서 말이야. 핵심은 엄마가 조심하면 되는 거였어.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딛고, 양수 온도가 높아지면 아가에게 안 좋다고 해서 탕 온도도 잘 살피고 잠시 동안만 몸을 담그고 있다가 나오고 그랬었지. 탕을 드나들 때마다 할머니는 혹여나 넘어질까 봐 엄마를 잡아주었고 말이야. 상상했던 모든 위험한 상황들에 잘 대처하며 목욕을 마쳤어. 마지막으로 몸을 씻고 수건으로 몸을 닦았지. 수건을 주지 않는 동네 목욕탕이어서 챙겨 왔던 수건을 다시 가져가기 위해 몸을 닦고 흥건해진 수건의 물기를 짜려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바닥이 미끄러웠어.
‘앗! 안돼 넘어지면 안 되는데……. 로마야! 미안해…….’
엄마가 마음을 놓고 있던 그 순간, 할머니가 마른 수건을 가지러 엄마에게서 잠시 눈을 뗀 그 순간, 탕 내부를 울리는 쿵 소리를 만들며 엄마는 바닥으로 미끄러졌어.
"어머나! 어떡해!"
아침 운동을 마치고 목욕을 하시던 아주머니들의 수다소리가 한순간 멈추고 잠시 정적이 돌더니 이윽고 걱정이 가득 담긴 소리가 들렸어. 그 순간 엄마는 솔직히 말하면 미끄러진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워서 얼른 그 자리에서 일어났어. 나가려고 하는데, 그 소리를 듣고 할머니가 들어오셨지.
할머니는 주변 아주머니들에게 상황을 듣고는, 당신의 걱정되는 마음을 입 밖으로 분출하기 시작하셨어. 몇 마디 말에 처음 보는 아주머니들은 엄마의 상황을 모두 알게 되었지. 아직 안정기에 접어들지 않은 11주 차 임산부가 목욕하고 싶다고 해서 데려왔는데, 그렇게 조심하랬는데, 막판에 결국 미끄러져 버려서 아주 큰일이 났다라고.
흡사 아침마당 방청객 같은 아주머니들의 반응과 시선을 뒤로하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어. 이 위험한 곳을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 집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지. 옷을 챙겨 입으면서 미끄러진 순간을 곱씹었어.
아가야, 그래도 엄마가 운동신경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엉덩이로 정직하게 떨어지면 정말 위험할 수 있겠다는 마음에, 그 순간 엉덩이를 틀어서 옆구리로 슬라이딩을 했어. 크게 아픈 곳이 없었고 아가에게 큰 충격이 전해지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지. 그런데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은 엄마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으시고 지나가시면서 한 마디씩 붙이셨어.
“일단 병원부터 가봐.”
“그래, 괜찮아도 무조건 병원부터 가봐.”
할머니가 많이 놀라서 계속 걱정을 하시니 엄마도 슬슬 걱정이 되었어. 집으로 돌아와서 병원을 가야 하나 고민을 했는데, 내내 긴장한 채로 목욕을 했고, 마지막 순간에 많이 놀라서 그런지 잠이 쏟아졌어. 혹시 하혈을 하거나 복통이 심하면 바로 병원을 가기로 하고, 꽤 긴 시간 낮잠을 잤단다.
자다가 일어나 배에 손을 가져다 댔어. 기척 없는 배를 쓰다듬으며 평소에 잘하지 않던 기도를 드렸지. 아마도 듣지 못하겠지만 아가에게 사과도 하고 말이야. 다행히 복통도 하혈도 없고 다른 부분에 통증도 없어서 병원에는 가지 않았어. 그리고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엄마는 아가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는 기묘한 확신이 들었단다.
하지만 할머니는 엄마가 낮잠을 자는 동안, 온갖 포털사이트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간호사인 이모에게까지 전화를 걸어 미끄러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병원에 안 가도 되는지를 알아보셨다고 해. 엄마가 설득한 건데, 괜히 목욕탕을 데려갔다고 자책도 하시면서 마음을 많이 쓰셨어. 그 이후로도 며칠을 걱정을 하며 매일 전화를 하셨단다.
그래서 이번 검진 때 긴장을 했던 거야. 배 위에 차가운 젤이 올려지고 바코드 같은 기기가 배 위에 얹어지는데 화면으로 팔다리가 긴 아가의 모습이 보였어. 나비 모양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뇌도 보고 오똑한 코와 손가락, 발가락도 보았단다. 아가는 큰 문제없이 너무도 잘 자라주고 있었어. 엄마의 기묘한 확신이 맞았지? 우리 한 몸속에 있으니 텔레파시가 통하나 봐!
이제 아가는 약 5센티미터로 엄마의 새끼손가락만 한데, 갖춰야 할 것들이 거의 다 만들어져 온 우주가 담겨있었어. 나의 아랫배 속에 새끼손가락만 한 나의 우주가 들어있다니, 경이로웠지. 새끼손가락을 가만히 펼쳐서 요리조리 돌려다 봤어. 요만한 우주 속에 스스로 뛰는 심장과 뇌, 각각 기능을 할 기관들과 혈관들, 손가락, 발가락, 눈, 코, 입이 만들어지고 있었어.
아가는 부지런히 크고 있는데, 조심성 없는 엄마가 한순간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겠다 생각하면 아찔해. 아직 생명을 품고 있다는 인지가 부족한 초보 엄마는 오늘도 반성을 하며 하나의 행동을 할 때도 조심해야겠다는 다짐을 몇 번이고 되뇐단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해. 어쩌면 입덧이나 두통, 무기력함은 태동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아가가 자라기 전에, 아가를 품었다는 것을 초보엄마들이 까먹지 않게 하려고 만든 장치가 아닐까. 엄마가 조심 또 조심할 테니 부디 아무 일 없이 건강한 너와 건강한 나로 좋은 날에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