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함께

너를 만난 지 13주 차

by 맘고래

아가야,

이제는 '안정기'라고 불리는 시기에 진입했어. 이제 엄마와 아빠가 전해준 유전자 때문에 아가의 발생에 문제가 생겨 갑자기 아가가 떠날 수 있는 시기는 지났다는 이야기야. 다시 말해서 중요한 부위들이 만들어지는 시기가 완료되고, 이제는 발달하고 성장하는 단계에 들어왔다는 거지. 고생 많았어!


엄마가 적지 않은 나이라 걱정했던 기형아검사 결과도 다행히 저위험군으로 나와서 다시 한번 고마운 마음이 들었어. 요즘은 고마운 마음이 참 자주 드는데, 고마움이란 감정이 지구만큼 커서 그 대상을 특정하기 어려울 정도야.


부지런히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있어. 이번 봄은 이제껏 엄마가 겪어본 다른 봄보다 더 따뜻하고 노곤하구나. 이제 배는 눈썰미 좋은 사람이라면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봉긋해졌어. 옷이 얇아졌지만 품 넓은 셔츠 아래로 아가를 보호하며 봄날의 거리를 걷곤 해. 이제는 조금씩 무거워지는 몸을 느끼며 여전히 조심해야 하고, 무거운 짐을 드는 것을 피해야 하지만, 아직 어떤 도움을 요청하기엔 스스로 민망한 배 크기야. 지하철을 탔을 때 자리 양보를 받으면 고마우면서도 조금은 민망하기도 한 복잡한 마음이 드는 시기이기도 해.


우리 이번 주에는 함께 큰 일을 치렀지? 엄마의 숙원사업인 건축사시험을 아가와 함께 응시하러 갔었지. 건축사시험은 본인이 사용할 커다란 제도판을 직접 들고 가야 해서 짐이 많아. 대개 고등학교에서 치러지는 시험은, 입구에서 본인확인을 하고 교실 위치를 파악한 후 그 모든 준비물을 들고 올라가야 해. 지난번에는 5층 교실을 배정받아서 짐을 다 들고 교실에 도착하니 쉴 시간이 필요할 정도였어.


그래서 이번 시험 때 걱정이 많았어. 겉으로 크게 티가 안 나는데 괜히 유난스럽게 행동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면서도, 우리에겐 아가가 더 중요하니 무리가 되는 행동은 피해야겠다 마음먹었어. 학교에 도착해서 아빠는 입구의 담당자분께 양해를 구했어. 임산부라 무거운 것을 들기에 위험하니 교실까지 제도판만 옮겨줘도 되는지 말이야. 다행히 시험장에는 이런 상황에 대비해서 도와줄 분들이 계셨어. 감사하게도 도움을 받아 안전하게 시험을 치르는 자리까지 도착할 수 있었지. 천천히 자리 정비를 하고 마음을 잡았어. 긴장은 크게 되지 않았어. 따뜻하고 묵직한 아랫배에서 든든함이 전해졌어.


'이번엔 두 뇌가 합심을 했으니 더 수월하지 않을까!'


입덧약 덕분에 컨디션 조절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세 시간 동안 치르는 시험 중간에 분명 찾아올 허기로 인해 속이 울렁거릴까 걱정이 되었어. 책상 한쪽에 초콜릿과 레몬사탕 몇 개를 대비책으로 두고 시험을 치기 시작했어.


평소보다 긴장이 줄어들어서 놓칠 뻔한 것도 체크하며 순탄하게 풀이가 진행되었어. 계획한 대로 작도를 시작하는데 갑자기 긴장이 되었어. 이미 두 시간이 지난 시점이라 허기가 몰려오며 속이 울렁거리기도 했고 말이야. 서둘러 레몬사탕 하나를 까서 입에 넣었어. 정신없이 작도를 하다가 어느새 하나를 다 먹고 바로 이어서 사탕 하나를 더 먹었지. 시계를 보며 작도를 마무리할 때쯤에는 엄마 자신도 잊고 아가도 잊고, 오로지 시험지와 제출할 도면 그리고 그 위를 움직이는 샤프를 쥔 손과 삼각자 밖에 존재하지 않았어.


시험을 마치고 조심스레 짐을 챙겨 천천히 밖으로 나왔어. 아빠가 마중을 나왔고, 우리는 시험이 끝나면 가려고 지도에 표시해 놨던 맛집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단다. 시험 결과는 한 달 정도 후에 나오게 될 텐데,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아가의 힘을 받은 이번 시험은 결과를 기대해보려고 해.


엄마가 준비한 이 시험은, 엄마가 사랑하는 일을 할 자격을 국가로부터 공인받기 위한 시험이야. 엄마가 사랑하는 일은 건축설계란다.


엄마는 어릴 적부터 꿈이 매일매일 바뀌는 아이였어. 건축가를 꿈꾸게 된 건 고등학교 3학년 때야. 미래의 아가가 맞이할 고등학교 3학년 시기가 어떤 의미와 형태를 가지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엄마 때는 이 시기에 이미 무슨 대학교에서 무슨 전공을 하고 싶은지 다 정해놓고 준비를 해야 했어. 너무 거창하게 생각했던 걸까? 엄마는 앞으로의 인생 전체를 쏟아붓고 싶은 일을 찾아야만 한다고 생각했어. 그런 일이 뭘까, 충분히 탐색할 시간을 가지지 못한 채 울타리 쳐진 연못 안을 헤엄만 쳤어. 고인 물인 줄도 모르고 그곳이 바다인 줄 알고 말이야.


알고 있는 것이 없으니 답 없는 고민만 이어졌어. 방황은 길어졌지만 티 나지 않았어. 목표가 없어도 공부는 계속했어야만 하는 것이었으니까. 어느 주말, 우연히 식탁에 놓인 신문에서 어떤 책의 서평을 읽었어. 그 책이 궁금해 도서관에서 그 책을 빌렸지. 열람실에 공부하러 왔다가 자료실 한편에서 책 한 권을 다 읽었어. 어느 건축가의 자서전이었는데, 건축이라는 일에 대한 날것의 이야기들이 담겨있었지. 복싱선수의 마음으로 눈앞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며 마침내 만들어내는 공간 속에서의 이야기들은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어. 마음속에서 엔진이 다시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고 할까? 고등학교 3학년 초기, 엄마의 방황이 끝나는 순간이었어.


그렇게 엄마는 건축설계를 하게 되었단다. 그 일은 쉽지 않아. 닿고자 하는 지점을 향해 욕심내는 작업은 늘 짝사랑하는 기분이란다. 하지만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밤새 고민해서 편지를 쓰는 것이 힘들지 않고 오히려 행복하듯 밤을 새워 작업을 해도 피곤하지 않은 그런 일이야. 언젠가 우리 아가도 짝사랑이란 걸 하게 되겠지. 그때는 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아가는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할까? 아가에게도 언젠가 방황의 시기가 올까? 엄마는 그때 아가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을까? 함부로 너에게 삶의 길잡이가 되어줄 수는 없겠지만 너의 뒤에서 함께 걸어주며 응원을 해 줄 거야. 고민과 방황 끝에 아가는 어떤 일을 사랑하게 될까? 아가야, 사랑하는 일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여야 한대. 엄마는 말이야, 늘 누군가를 치유할 수 있는 일을 하기를 꿈꿔왔어. 누군가 비를 피할 곳을 만들어주고, 사람들이 그 안에서 행복하고 쾌적하고 안온했으면 좋겠어. 그런 마음으로 임하는 이 일을 엄마는 사랑한단다.


아가야, 엄마는 아가에게 본인의 일을 멋지게 잘 해내는 엄마, 쉬지 않고 꿈을 꾸고 스스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멋진 한 인간으로서 닮고 싶은 그런 엄마가 되고 싶단다. 멀고 어려운 길이겠지만 나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아가를 위해서 열심히 해보려고 해. 너와 함께할 내일들이 너무도 기대되는 오늘이구나. 언젠가 너와 마주 않아 꿈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 나누게 될 날을 기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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