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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장밥 Oct 18. 2023

지금부터 결혼을 시작하겠습니다

결혼 당일 (1)

오전 9시

D-day. 알람을 맞추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눈이 떠졌다. 희미하게 거실에서 TV소리가 들린다. 가족들도 전부 일어난 것 같다. 아, 알고보니 아니었다. 동생은 아직도 자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에도 늦게까지 잠을 자네. 저 대단한 녀석.


두둘이에게서 카톡이 와있다. 발신 시간은 7시. 나보다 훨씬 먼저 일어났다. 하긴, 그럴 수 밖에. 오늘 우리가 결혼할 심청루는 우리집에서는 30분이면 가지만, 주말 오후 서울의 교통 상황을 생각하면 두둘이네에서는 1시간 반은 잡아야 하는 곳이니까.


그나마 다행이었다. 느즈막히 저녁시간에 하기로 해서. 보통의 평범한 결혼식이라면 꼼짝없이 점심에 했어야만 했을 텐데. 여유로운 일정은 결혼식 없는 결혼의 장점이다.


오전 10시

두둘이네 집에 출장 메이크업 팀이 도착했다. 먼 길을 나서야 하는 두둘이네의 부담을 최소화 할 방법을 찾기 위해 두둘이와 함께 머리를 싸맨 결과다. 두둘이네는 출장 메이크업을 불러서 집에서 준비하고, 우리집은 심청루와 가까운 종로 메이크업룸에 들러 준비하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르긴 했다. 아침 열 시라니. 다섯 식구가 차례대로 준비해야 하니까 이해는 간다만. 간략할대로 간략할 우리의 결혼도 이럴진대, 대체 남들은 이 복잡스러운 걸 어떻게들 했는지 모르겠다. 어휴, 정말 두 번은 못 할 일이다.

출장 메이크업 현장. 바닥에 널부러진 고대기와 드라이어까지 깨알 같다.


오전 10시 30분

오늘 섭외한 사진작가님과 계속 얘기를 나누고 있다. 가족들이 전부 예쁘게 꾸민 김에 사진들을 꼭 남기고 싶은데, 하필 주룩주룩 비가 내리는 탓에 야외 촬영이 불투명해져서 속상하다. 작가님은 비가 온다해도 너무 거세게만 쏟아지지 않으면 더 멋진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격려해주셨다. 우리는 희망을 갖고 사진용 투명 우산을 가져가기로 했다. 비가 좀 그쳐야 할 텐데.


오후 1시

이제 집에서 나설 시간이다. 엄마, 동생과 함께 셋이서 먼저 메이크업숍으로 향한다. 할머니는 좀 이따 아빠가 모시고 오기로 했다. 여자 메이크업이 남자에 비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엄마와 동생이 선발대로 우선 출발할 필요가 있었고, 나는 식장에 먼저 가서 장소를 세팅해놔야 하기 때문에 또 아빠나 할머니 보다 먼저 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연로하신 할머님의 대기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아빠께 할머니를 모시고 와달라고 부탁드렸다.


엄마가 입으실 한복을 들고 우리는 현관을 나섰다.


다시 이 집에 들어설 때면 난 유부남이구나. 새 가정이 생기는구나. 오직 우리 가족 구성원으로서는 이 집에 있는 마지막 순간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메이크업숍으로 향하는 선발대 세 명. 엄마의 부시시한 머리가 인상적이다.


오후 2시30분

두둘이네 선발대가 식장으로 출발했다. 두둘이와 처제, 처남이었다. 본식은 18시에 시작할 예정이었지만, 약속시간은 16시였다. 식 전에 사진을 찍기로 한 까닭이다. 주말 오후 서울의 교통 체증과 우천이라는 기상상황까지 고려하면 적당한 출발시간이었다.


한편 우리집 남은 식구들도 마저 출발했다. 아빠와 할머니가 메이크업숍으로 향하셨다. 엄마와 동생은 한창 메이크업 중이었고, 나는 메이크업 선생님들께 아부성 커피를 사다드렸다.

메이크업을 시작하는 우리집 후발대.


오후 3시30분

후발대가 메이크업숍에 도착하는 걸 보고, 나와 동생이 먼저 식장으로 향했다. 오늘 행사의 책임자로서 속속 도착하고 있을 화환을 배치하고, 테이블과 각종 소품들을 비치하고, 사진작가님과 만나서 이후 일정을 확정하고, 예식장측 사람과 만나서 이를 공유하고. 자잘하지만 챙겨야할 일이 꽤나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회자놈을 진작 오라고 하는 건데, 하고 후회했다. 그랬으면 날 대신 해서 현장을 잘 운용했을 텐데 말이다. 어우, 다시 생각해도 정신 없다.


오후 4시

도착했다. 우리집 선발대와 두둘이네 선발대가 만났다. 5분 정도의 시차를 두고 우리는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두둘이가 입은 하얀 원피스는 어딘지 모르게 드레스 느낌이 났고, 머리도 화장도 모두 신부 같았다. 좀 추워보이긴 했어도 웨딩을 하는 사람 같긴 했다. 그래, 최소한 그 제주도의 공장식 메이크업보다 훨씬 나았다. 두둘이도 같은 생각이었다. 잘 차려 입은 처제와 처남도 멀끔했다.


화환은 엉뚱한 곳에 놓여져 있었다. 아니 왜 이게 여기 와있어. 심지어 쌀화환은 비에 맞아 찢긴 채로 야외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래, 내 이럴 줄 알았지. 아무리 잘 말해두어도 소용이 없다. 역시 현장에 사람이 있어야 한다. 컨트롤 타워가 이렇게 중요하다.


예식장 측과 얘기하며 장소를 다시 꾸미고 있을 때, 사진작가님들도 도착하셨다. 바쁜 날 대신해서 두둘이가 작가님들께 샌드위치와 음료를 드리며 시간을 벌어주었다. 나는 장소 세팅에 열을 올렸다.


자리가 얼추 정리되며, 우리는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나머지 가족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신랑과 신부의 커플사진이 먼저였다. 다행히 오전에 비해 빗줄기는 많이 약해졌고, 덕분에 우리는 처마 밑에서 또는 우산을 쓴 채 뜰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완전한 숲 속을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이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현장의 상황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바빠서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기가 힘들었다. 이정도가 딱 좋았다.


작가님들은 열심이셨다. 두 분이 와주셨는데, 비가 와서 아쉽다며 이런저런 소품들을 챙겨와주셨기에 우리는 더욱 다양한 컷들을 남길 수 있었다. 농담을 쉴 새 없이 던지며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스타일이 아니라 아기자기하고 진솔하게 사진을 담아주시는 스타일이었다. 나도 두둘이도 시끌벅적한 걸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어서 작가님들과 케미가 더 좋았다. 우리의 소중한 날이 잘 남을 수 있겠다 싶어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작가님들은 못 다 한 야외촬영 대신에 평일에 시간이 되면 커플 촬영을 1시간 정도 해주시겠다는 얘기도 주셨다. 여러모로 감사했다.

세팅을 마친 예식장 입구와 두둘이네 선발대의 모습. 기둥 뒤로 사진작가님의 모습도 빼꼼 보인다.


오후 4시30분

아빠와 엄마와 할머니. 우리집 후발대가 도착했다. 이제 우리집 식구들은 다 왔다.


슬슬 우리 둘 사진을 그만 찍고 가족 사진을 남겨야 한다. 하는데, 이거 참. 좀 밀렸다. 작가님들이 워낙 열심이시라 우리들 사진을 계속 찍어주셨다. 우리도 욕심이 나서 그만하자고 얘기를 못 했다. 작가님들을 만나고 나서 두둘이와 사진을 4백장 정도 찍었는데, 우리 가족이 오고 나서도 4백장을 더 찍었다.

할머니 도착. 손자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오르신다.


오후 4시50분

우리 둘 사진만 8백장 쯤 찍었을 무렵, 두둘이네 후발대도 도착했다. 아이고, 이거 큰일났다. 아직 가족 사진은 한 장도 못 찍었는데 어쩌나. 조바심이 났다.


그나저나 어머님은 참 고우셨다. 한복이 정말 잘 어울리셨다. 두둘이도 어머님처럼 한복이 잘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궁투어라도 같이 해봐야겠다.


어찌됐건, 이제 벌써 거의 5시. 시간이 많이 없다. 장인어른과 장모님께 양해를 구하고 우리 가족 먼저 가족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두둘이와의 커플사진은 일단 스톱. 처마 아래서 건물을 배경으로 찍고, 내부로 들어가 바깥 풍경을 뒤로 하고 다시 또 찍었다.


그런데 사람은 역시 경험이 중요한 것 같다. 시간이 빠듯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촬영을 해보니 가족사진은 5분컷이었다. 우리 가족 사진을 찍고, 이어서 두둘이네 가족사진을 찍는데, 그건 2분컷. 도합 10분이 채 안 걸렸다. 다시 두둘이와 커플 사진을 찍고, 신랑 신부 독사진들을 찍었는데도 시간이 남았다. 그래서 우리는 다양한 조합으로 촬영을 이어갔다. 고부사진도 찍어보고, 부자사진, 모녀사진, 엄마, 장모님, 할머니, 동생 독사진 등을 연이어 찍어댔다. 그래도 시간이 남았다.


아깐 빠듯한 거 같아서 문제였는데, 이젠 시간이 남아서 문제였다. 사진기는 쉼 없이 일을 했으나, 앵글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소수였다. 사진을 찍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휑한 테이블을 앞에 두고 멀뚱멀뚱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분리된 대기실이 없는 탓이었다. 예식장 측에 식후차를 먼저 부탁드렸지만, 차 한 잔으로 채우기에는 현장의 고요함이 너무 짙었다. 적막이 흐르는 속에서 오직 셔터소리만이 들려왔다.


이거 그냥 빨리 본식을 시작해야겠는데? 나는 사회자에게 SOS를 쳤다.


두팔 「야 너 언제오냐」
정석 「아니 왜. 택시가 안 잡힌다 지금」
두팔 「여기 모두가 너를 기다리고 있어」
정석 「뭐? 아직 시간 안 됐잖아?」
두팔 「천천히 와 빨리」
정석 「?」
두둘이네 가족사진을 촬영하는 모습. 처남이 눈을 감아서 NG가 났다.


오후5시40분

마침내 사회자가 도착했다. 당초 예식시간보다 20분은 빨리 도착했지만, 우리가 기다린 것도 20분은 됐을 거다. 어쨌든 이것으로 오늘 이 자리에 올 사람은 다 왔다. 신랑과 신부, 가족 여덟 명, 그리고 사회자까지. 좌석 열 자리와 사회석 한 자리가 모두 채워졌다.


가족들에게 사회자를 소개하고, 물 한 잔으로 숨 돌릴 시간을 줬다.


두팔 : 내가 어제 보낸 대본 봤지?
정석 : 어제? 하여튼 대본은 봤어. 뽑아왔어.


좀 불안한 대답이었지만 오케이. 알아서 잘 했겠지. 대본 체크까지 마쳤다. 사회자는 모두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앉아있는 모습을 보더니 발길을 재촉했다. 도착한 지 5분 남짓 됐을까. 사회자는 진행석 마이크 앞에 섰다.


정석 : (지금 시작해도 되지?)
두팔 : (끄덕)


땀이라도 마저 닦고 오지 그러냐는 엄마의 말에 정석이는 웃으며 손사레를 쳤다. 그리고는 곧바로 스크립트에 있는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정석 : 그럼 지금부터 두팔 군과 두둘 양, 두둘 양과 두팔 군의 결혼을 시작하겠습니다.


길기도 참 길었다. 뭔 준비할 게 이렇게도 많은지.


이제 진짜 시작한다.

사회자. 본식의 시작을 알리기 30초 전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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