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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장밥 Mar 31. 2021

오리고기를 닭고기라고 말했더라면 큰고모는 지금쯤

오리백숙

살아계실 수 있었을까.



할머니에게는 엄마가 계셨다. 작은 키, 왜소한 체구, 살짝 굽은 등. 그리고 하얬다. 할머니엄마는 머리도 순백색이었지만, 옷차림도 언제나 뽀얗게 희었다. 할머니엄마는 하얬다.


할머니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할머니는 우셨다. 나중에는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고 우셨다. 마른 눈물. 눈물이 다했기 때문이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할머니는 계속 우셨다. 밥을 먹고 우셨고, 밥을 먹지 않고 우셨다.


그러다 이레 째 되는 날 저녁. 한참을 울다가 한 순간에 울음을 멈추셨다. 후. 한 어린 한숨과 함께. 이만하면 되었다. 나지막한 혼잣말.


할머니는 할머니엄마와 이별하는 데 꼬박 칠 일이 걸렸다. 칠 일만큼의 울음과 함께.



나는 서울에서 났다. 서울에서 자랐다. 친할머니와는 같이 살았고, 외할머니도 서울에 계셨다. 그러니까 '고향'하면 떠오르는 풍경, '외가집'하면 떠오르는 풍경. 그 모습은 시골 속 풍경이 아니었다. 고향도 없었고, 시골집도 없었다.


딱 하나. 어린 기억 속 유일하게 있는 시골 모습이 있다. 아버지와 열 살은 차이나는, 첫째 누이네 집이었다. 큰고모네 집이었다.


무슨 일이었을까. 잘 모이지도 않는 친척들이 한 데 모여 할머니를 모시고 큰고모네로 놀러갔다.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시골이었다.


풀내음과 흙내음과 꾸리한 똥내가 섞인 냄새 사이. 집 하나가 보인다. 엉성한 건물에는 새마을운동 시절에 덧댔음직한 얆은 판자 외벽과, 쨍하게 파란 플라스틱 차양 지붕이 얹어져있다. 조잡스러운 느낌. 이제 막 현대식 건물을 지을 때쯤 함께 지어진 것 같다.


크엄! 크으엄!

큼큼! 크암!


썩 유쾌하지 않은 냄새와 허술한 건물 외관보다도 더 어색한 소리가 들린다. 동물소리를 못 내는 사람이 개 울음을 흉내내는 듯한 소리다.


소리는 집에 다가갈수록 더 크고 분명하게 들렸다. 우리 일행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소리의 근원지가 보였다. 개. 진짜 개였다.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소리를 개가 내고 있었다. 기괴했다.


애초에 모든 게 부자연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때까지만 해도 시골에서 한 밤을 자본 적이 없던 터다. 하늘도 바람도 도시와 다른 곳. 어색했다. 사람 목소리 같은 개 울음은, 가뜩이나 낯선 시골을 더 멀리 느껴지게 했다.


쟈가 원래 안 저랬어.

매운 거 먹였더니 저렇게 됐다니께.


매운 먹이를 먹고 울대가 상해버렸다는 해명조차 석연찮았다. 어린 눈에는 모든 곳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기이한 건 또 있었다. 큰고모의 모습이었다. 할머니를 맞는 큰고모의 얼굴이 너무 검었다. 너무 주름졌고, 너무 늙었다. 분명 큰고모가 맞이하는 건 큰고모를 낳아준 엄마일 텐데, 딸은 엄마보다 한참은 더 늙어보였다. 다른 사람에게 큰고모를 언니로, 할머니를 동생으로 소개해도 의심하지 않았을 거다. 무슨 고생을 하면 사람이 이렇게 늙는 걸까. 시골 농사일이 이렇게 힘든 걸까. 속으로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큰고모네 거실에는 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큰고모만큼 검은 얼굴에 가슴이 살짝 보이도록 풀어헤친 옷. 남자의 옷차림은 중년의 모습만큼 허름했고, 담배를 뻑뻑 피고 있었다. 큰고모네 거실에 앉아있는 나이 많은 남자였지만,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먼 친척일 거라 생각했다. 얼굴을 모르는. 그래서 꾸벅 인사를 드렸다. 그러나 얼굴이 검고 마른 남자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곧 큰고모가 작은 상을 차려 내왔고, 남자는 말 없이 밥을 먹었다. 나중에 듣게 된 이야기지만, 그 남자는 이웃에 사는 일꾼이라고 했다. 왜 생판 남이 집에 들어오고, 왜 거실에 앉았으며, 왜 큰고모는 그에게 상을 차려 주실까. 기괴하고 이상함 투성이었다.


큰고모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예닐곱살쯤 차이가 나는 누나였다. 큰고모와 달리 예쁘장한 얼굴을 달고 있었고, 어린 나는 예쁜 누나가 좋았다. 하지만 누나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를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누나를 보고 싶어서 누나방에 들어가면, 누나는 자꾸 나가라고만 했다. 앉아있던 의자에서 잘 일어나지도 않았다. 하긴, 생각해보면 누나는 큰고모도 싫어했다.


하여튼 모든 게 이상했다.



큰고모는 괄괄했다. 동시에 순했고 선했다. 그렇게 잘 웃었고, 그렇게 밝았다. 큰고모가 웃을 때면, 얼굴의 주름이 둥글게 줄을 섰다. 평소에 워낙 웃을 일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를 본 날에 그렇게 웃었는지도 모르겠다.



안방에 들어서자 앉은뱅이 밥상 몇 개가 나란히 늘어서있었다. 가족들이 온다는 소식에 오랫동안 창고에 처박아두었던 놈까지 꺼낸 듯했다. 곧 이어 큰고모가 야심차게 준비한 음식이 상 위에 차려졌다. 서울에서 먹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커다란 닭이었다. 백숙이었다.


사람도 많았지만, 백숙은 더 많았다. 한껏 푸짐했다.


다리 한 쪽은 오목한 국그릇에 덜어져 내 앞으로 왔다. 가끔 집에서 해먹는 백숙을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었다. 커다란 백숙은 평소 먹던 것보다 더 맛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덜어진 다리 끝을 손으로 잡고, 야물딱지게 한 입을 베어물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평소에 먹던 백숙 맛이 아니었다. 국물 맛도 다르고, 고기의 식감도 달랐지만, 무엇보다 달랐던 건 향이었다. 집에서 먹던 백숙에서는 맡아보지 못한 생소한 냄새였다.


마치 큰고모네 같았다.


도시와는 다른 똥내와 풍경, 사람 소리를 내는 개, 허술한 건물 외관, 할머니 보다 늙은 큰 고모의 모습, 거실에 앉아 있는 늙은 남자, 큰고모를 싫어하는 큰누나.


그리고 백숙.


모든 게 평소와 달랐다.



우리집은 음식에 보수적이다. 먹던 것만 먹는 경향이 있다. 이색적인 맛에 거부감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비위도 약하다.


우리집의 음식 보수성은 우리집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고모도, 사촌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음식 보수성은 우리 대에서 비로소 발현된 게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가 물려주신 유전자였다.


태생적으로

우리 모두는 새로운 음식에 소극적이었다.



커다란 다리살을 베어물었을 때, 우리는 막 식사를 시작했을 때였다. 몇몇은 백숙을 막 맛봤고, 몇몇은 막 맛을 보려던 찰나였다.


큰고모의 성급한 설명이 나온 건 그 때였다.


이게 토종오리여.

스울에선 이런 거 못 구햐.


아, 오리였다. 닭이 아니었다. 오리백숙이었다.


이거 느그들 줄라고 아침에 막 잡은거여.

목 따고 피 빼고 오늘 다 해싸.


그 날의 음식은 귀했다. 재료도 귀했고, 메뉴도 귀했으며, 음식을 준비해준 큰고모의 마음이 귀했다.


그러나 그 날, 그 귀한 음식은 상당히 많이 남았다. 큰고모의 음식 브리핑에, 백숙을 막 맛봤던 몇몇은 닭백숙과 다른 맛과 향을 더욱 또렷이 느껴버렸고, 백숙을 막 맛보려던 몇몇은 색안경을 끼고 수저를 든 까닭이었다.


우리에게 토종오리백숙은 낯 선 음식이었다.



아이고. 닭이라고 할 걸.

닭이라고 하고 뻘겋게 도리탕을 했으면 잘들 먹었을 틴디.

먹고 나서 얘기해줄 걸 그래쌰.


잔뜩 남은 백숙을 보며 큰고모가 아쉬워했다.


큰고모의 아쉬움은 때 늦은 아쉬움이었다. 동시에 필연적인 아쉬움이었다. 큰고모는 거짓말을 할 줄 모르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순박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교묘하고 예리하게 머리를 굴려 말을 꾸며낼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큰고모는 오리고기를 닭고기라고 얘기하지 못했다.



쾅쾅! 쾅쾅!


어느 날. 우리집 안방에서 나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달려갔다. 눈 앞에는 전에 없던 광경이 펼쳐져있었다.


아버지는 장농에 기대어 누워계셨다. 그리고 시뻘개진 눈에서는 눈물을 계속 흘리고 계셨다. 한 잔의 술도 하지 않으셨지만, 만취를 하셨을 때보다 더 정신을 못 차리고 계셨다.


쾅! 쾅쾅쾅!


아버지는 장농에 뒷통수를 계속 찧으셨다. 아. 이 소리였다.


쾅쾅!


장농에 머리를 빻는 소리가 공허했다. 공허함 속에는 분노가 있었다.


으흐흑. 왜 그랬어, 왜. 바보같이.


의미를 알 수 없는 혼잣말을 하시며, 아버지는 이상행동을 계속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말리지 않고, 가만히 서서 지켜보실 뿐이었다. 역시 눈물을 흘리며. 입술을 깨무신 채로.


바보같이!!!



큰고모가 돌아가신 날이었다.



할머니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할머니는 칠 일을 우셨다. 딱 칠 일이었다. 칠 일 뒤에, 할머니가 할머니엄마를 그리며 우시는 걸 본 적은 없다.


큰고모가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평생을 우셨다. 울음의 빈도는 잦아들었다. 눈물의 양 역시 줄었다. 그러나 슬픔의 크기가 작아진 것 같지는 않았다. 일 년 뒤에도, 이 년 뒤에도, 할머니는 발작적으로 우셨다. 꺼이꺼이. 세상 서럽게.


자식을 잃은 부모의 울음을, 그 때 보았다.



암이었단다.

흔해 빠진 병.


흔한 만큼, 지금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암에 대한 두려움도 많이 줄어들었다. 임상 데이터가 쌓인 만큼, 파훼법도 능숙해졌다. 우리에게 암은 관리성 질병이다.


하지만 옛날 사람들에게 암이 주는 두려움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암이라는 글자가 주는 무게가, 환자와 환자 가족들을 짓누르던 때였다. 암 진단이 사형 선고와 같던 때였다.


다행스러운 것은, 큰고모가 암을 늦지 않게 발견했다는 것이다. 수술을 받고 치료를 하면, 큰고모는 살 수 있었다.


불행스러운 것은, 큰고모에게는 그만한 돈이 당장 없었다는 것이고, 자신의 동생들에게 수술비를 달라고 고백할 용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동생들의 생활도 부유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다행스러운 것은, 큰고모는 삶을 포기하지 않으셨었다는 거다. 큰고모는 노름을 하던 큰고모부 몰래 수술비를 모으기 시작하셨고, 돈 모으기는 꽤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다시 불행스러운 것은, 수술비에 조금 못 미치는 돈이 모였을 무렵, 큰고모부가 그 돈의 존재를 눈치챘다는 거다. 비극적인 소설처럼, 큰고모부는 그 돈을 큰고모에게서 앗아갔다. 그리고는 노름으로 탕진해버렸다.



폐암이었단다.


평생 담배를 태우지 않으셨던 큰고모가

폐암이셨단다.


뻔하다. 큰고모를 옆에 두고, 큰고모부가 그렇게 담배를 펴대셨었겠지. 큰고모 집을 제 집처럼 드나들던 의문의 늙은 남자들이, 그렇게 담배를 펴댔었겠지. 담배를 입에도 대지 않은 사람의 폐에서 암이 자랄만큼, 그렇게 담배연기를 뿜어댔었겠지.


그 늙은 남자들은 과연 큰고모의 사람들이었을까. 큰고모는 그들에게 밥상을 차려 내어주며 행복하셨을까.


세월이 흐르면, 예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곤 한다. 그 늙은 남자들도 그렇다. 그들이 누구였는지는 아스라히 추측할 수밖에 없지만, 적어도 몇 가지 분명한 사실들이 있다. 그들은 큰고모부의 사람이었을 거다. 큰고모부의 동의 없이, 그들이 그 집에 드나들 수는 없었을 거다. 또한 그들은 큰고모를 착취했을 거다. 그들이 올 때마다 큰고모는 노동을 해야했을 거다. 밥을 차려냈어야 했고, 또 다른 일들을 했어야 했을 거다. 그들은 결코 단순한 일꾼이 아니었을 거다.


큰고모는 담배연기를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없었을 거다. 체념하고 수용하는 것만이 큰고모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을 게다.


큰고모의 간접흡연은 큰고모부로부터 비롯하였다.


큰고모는 남에 의해 폐암에 걸렸고

바로 그 남에 의해 치료 기회를 빼앗겼다.



한참 뒤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큰고모는 애를 낳지 못하는 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큰누나는 큰고모가 낳은 자식이 아니었던 거다. 큰누나는 큰고모부가 데려온 딸이었고, 그러니까 큰고모부는 이미 결혼을 한 번 했었던 사람이었다.


그제서야 큰고모네에서 느꼈던 위화감이 조금 이해가 갔다. 왜 큰누나는 큰고모를 안 좋아했는지. 큰고모는 왜 그곳에서 괄시를 당할 수 밖에 없었는지.



가정이 어땠건, 큰고모는 맏누이였다. 동생도 많았다. 그러니까, 아무리 동생들이 안 넉넉하대도, 동생이 몇인데. 수술비, 한 사람당 얼마큼씩만 하면 되는데. 그거, 마련 못 할 돈 아닌데. 심지어 사람 목숨이 달린 문젠데. 그런데도 순둥한 큰고모는 차마 동생들에게 손을 벌릴 수 없었던 거다. 자신 때문에 동생들에게 폐를 끼치는 걸 못 견뎌한 거다. 바보같이.


큰 고모가 조금만 영악했더라면. 조금만 이기적이었더라면. 조금만 약삭빨랐더라면. 낯 선 음식을 잘 못 먹는 식구들의 특성을 떠올리고, 오리고기를 닭고기라며 능숙하게 속여넘길 줄 알았던 사람이었다면. 어쩌면 큰고모는 동생들에게 수술비를 부탁하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리고기를 닭고기라고 말할 수 있었더라면 큰 고모는 지금쯤 살아계셨을지도 모른다.



큰고모와 함께 했던 기억은 별로 없다. 또렷한 추억도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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